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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7화 (7/134)

7. 그라츠 제국 (3)

2016.12.21.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거지, 아예 못 들어오는 건 아니지. 산책 중인 황족에게 전할 내용이 생기면 당연히 찾으러 와야 할 것 아냐.”

우씨, 생각 읽기는 실패! 너무 잘생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듣다보니 집중을 못 했다.

아무튼... 젠장, 그런 것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흙투성이가 되도록 산책로를 헤매고 다닌 거고?

제길제길제길

하긴 내 인생에 이런 로또 같은 일이 생길 리가 없지. 대운하에서 빨래 중에 귀공자를 만난다든가 그런 일... 있을 리가 없잖아!!

“네, 그럼 이만.”

“잠깐, 너 공주처소에서 일하는 하녀지? 이름이 뭐야?”

그의 말 어딘가에서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마음이 급한 남 대충 넘겨버렸다.

아씨,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이 왜 물어. 넌 내 타깃이 아니라고.

“리엘이에요. 레비넌 백작가의 리엘이요.”

“흐음. 백작 영애면 곱게 자랐을 텐데 빨래라니...”

“....다 알면서 놀리는 건가요?”

“응?”

“쉬쉬하고 있지만, 여기 하녀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진짜 영애가 아니니까요.”

내 말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서, 난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몰랐는데.... 관심이 없어서. 하하”

에휴, 그래 너랑 아무 상관없는 일일 테니...

그나저나 이런 것도 모는 거 보니 진짜 말단인가 보네. 그런데 황궁은 시종도 얼굴보고 뽑나? 왜 이렇게 쓸데없이 잘 생겼어!

“근데 초면에 왜 반말이죠? 아무리 제가 하녀라지만 좀 무례하잖아요!”

“응? 아, 미안.”

남자는 얼떨결에 사과했다. 그래, 그래도 순순히 사과하니 봐주자.

“앗, 나 가봐야겠다. 그럼 다음에 또 봐! 안녕 리엘!”

“앗, 잠깐만!”

뭐야, 여전히 반말에... 누가 마음대로 이름 부르래...?

쳇 내가 진짜 백작영애고, 하녀가 아니라 왕족을 모시는 시녀였으면 레이디 레비넌이라고 했을 텐데... 억울하고 분하다!!

앗!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으아악 나 망했다! 저 시종 때문에 완전 시간 날렸어!!

***

그리고 난 정말 망했다.

완벽히 수선하기는커녕, 제대로 세탁도 못 한 채 난 공주 앞에 질질 끌려갔다.

짜악!!

“내 말이 우습더냐!!”

드레스에는 내가 어떻게든 고쳐 본다고 이리저리 찔러 놓은 시침핀이 볼품없이 꽂혀있었다. 그 엉망인 모습에 공주가 열 받을 만도 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한 번만 용서를...”

짝!

아오 진짜 그만 좀 때려. 얼굴 아파 죽겠네...

하지만 속마음과 다르게 난 그저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건방진 계집 같으니라고!! 당장 손가락을 분질러 쫓아내고 싶다만! 여기는 리테인이 아니니 제국에 고용된 시녀를 내 마음대로 내칠 수는 없는 게 한이구나!!”

내가 그나마 믿는 구석이 이거였다. 공주는 나에 대한 인사권이 없다.

하지만 얼마든지 벌을 내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설마 정말로 손가락을 부러트리면 어쩌지... 갑자기 공포가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나는 최대한 불쌍하고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용서를 빌었다. 정말로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저하. 제가 평생 갚겠사오니 부디 한 번만 용서를 해 주십시오.”

“............음...”

“저하, 부디...”

공주는 못마땅한 얼굴로 드레스를 내려다 보더니, 휙 집어던지며 말했다.

“좋다. 나는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으니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휴... 정말 다행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하.”

하지만 안도하기엔 일렀다. 막 마음을 놓으려는 찰나, 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한 대로 손가락을 전부 부러트려 놓아야 하나, 네가 그렇게 용서를 비니 약한 처벌을 내리겠다.”

공주는 어떤 벌을 내릴지 잠시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마치 개미를 어떻게 괴롭혀 죽일까 흥미진진하게 고민하는 듯, 섬뜩하게 악랄한 표정이었다.

엉망이 된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던 공주가, 문득 눈을 빛내며 시침핀을 하나 뽑아들었다.

“그래, 이게 좋겠구나.”

그리고 곧이어 끔찍한 말이 들려왔다.

“저년의 열손가락에 손톱마다 바늘을 하나씩 쑤셔 박아 주거라.”

“저, 저하!!”

미쳤어! 미쳤어!! 이 공주 미쳤어!!

“저하, 제...제발 살려주십시오!!”

“누가 죽인다 했더냐? 자비로운 처벌에 감사해 하지는 못할망정!!”

“저..저하. 부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자비를...”

“이미 자비를 베풀었거늘! 내가 손가락을 자르라 했더냐, 부러트리라 했더냐? 그도 아니면 손톱을 뽑으라 했더냐! 뭣들 하느냐! 어서 시행하지 않고!!”

미친 거 아냐? 저렇게 주장하니 앞의 세 개에 비하면 자비로운 것 같긴 한데... 보통 사람은 그런 짓 생각도 안 한다고!

“제발.... 잘못했어요!! 제발...”

끔찍한 공포에 난 정말 빌고 또 빌었다.

어떻게 같은 사람한테 이래...? 옷 한 벌 찢어먹었다고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어! 심지어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거짓말이지...!? 꿈이라고 해줘 제발!

하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말리기는커녕 양쪽에서 하녀들이 나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렇구나... 괜히 나섰다가 불똥 튀고 싶지 않은 거야...

“저하, 제...제발 살려주세요!!”

난 꿈이길 바라며 간절히 애원했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시끄럽구나!”

“잘못했어요...!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무리 뺨을 때려도 아니라고 우길걸...

“뭣들 하느냐! 어서 하지 못하고!!”

내가 하도 가만히 있질 않자,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난 눈물범벅으로 끝없이 저항하며 필사적으로 빌었다.

“저, 저하 사실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짝!

“건방지게!! 이제는 잡아떼기까지 하는 게냐! 여태 죄를 자백해 놓고, 이제 와 벌을 받기 싫어서 어디서 감히 거짓말을!”

“정말 아니에요... 무서워서 말을 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아앗!”

거의 난동 부리다 시피하며, 난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다 실수로 손을 여기저기 찔리고 긁혔다. 그것만 해도 눈물이 찔끔 나게 아팠다.

“저하... 정말, 정말 제가 안 그랬어요... 제발...!”

“닥치지 못하겠느냐!!”

짝, 짜악!!

내가 너무 시끄러워 짜증났는지, 공주는 내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뺨을 수차례 내리쳤다.

“저하..!!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정말 시끄럽구나! 됐으니 호되게 뺨이나 때려 밖으로 치워버려라!!”

천만 다행이도, 결국 난 그냥 쫓겨났다.

***

“으흐...흐흑...”

쫓겨난 나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쭈그려 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흐흑... 흑....아파....”

하녀들에게 붙들려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너무 아팠다.

서럽고 증오스럽고... 나에게 누명을 씌운 낸시가 죽도록 밉다. 무엇보다 저 또라이 같은 공주가 정말 싫었다.

“흐엉.... 집에 가고 싶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난 돌아갈 곳도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안겨 울고 싶었는데, 난 철저하게 혼자였다.

이 거지 같은 세상이 너무 싫었다.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난 이 세계에서 태어났는데도 말이다.

사실 이런 말하기 스스로 부끄럽긴 하다.

백작영애 시절에는 전혀 몰랐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이왕 상류층으로 태어날 거면 역시 신분제가 있는 세상이 좋다고 희희낙락 거렸는데...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신분을 빼앗기고 나니 이곳이 정말 진저리나게 싫었다.

그래도 여태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가족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고아가 되었지만 씩씩하게 잘 살아왔다.

거지같은 수녀원 시절의 고된 노동과 구박에도 꿋꿋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지며 먼 타국으로 팔려 와도 신분상승이니 뭐니 하면서 파이팅을 외쳤다.

사실 말로는 귀공자니 낚시니 해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발버둥 치며 위안을 가진 거였다.

원래의 난 이렇게 자뻑 가득한 병맛 캐릭터도 아니었다. 그냥... 너무 우울하고 비참해서, 현실을 잊기 위해 스스로 캔디형 성격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긍정적으로 버텨왔다. 그런데... 이젠 너무 힘들다.

“흐흑... 흑..흑... 더 이상 못 하겠어...”

더 슬픈 건, 못 버티겠다고 나가 떨어져봤자 달라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죽기라도 할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엄마가 보고 싶어... 흐어엉...”

유모한테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모든 걸 알게 되었을 때, 유모, 아니 엄마는 이미 끌려간 상태였다.

그리고 난 쫓겨날 때까지 엄마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했었다.

“흐엉.... 나도 엄마아빠가 있으면 좋겠어...”

나 정신연령 40대라며 왜 이렇게 어리지... 앞의 기억은 그냥 별 의미 없고 나 고작 15세 소녀인가?

전생의 부모님들은 기억도 희미하고, 현생에서는... 아빠는 있지도 않았고 엄마는 내 일로 죽었는데...

이 세상에 아무 의지할 곳도 없이 철저히 나 혼자구나.... 이튼 오라버니도 날 떠났으니...

“정말 혼자야... 완벽하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다 포기하고 싶어...”

하지만 누군가에게 울며 위로받기는커녕, 얼른 돌아가서 일하지 않으면 또 혼이나 나겠지... 치료도 못 받았는데...

“몰라...! 하녀 따위 정말 싫어!!”

난 혼자 울 곳을 찾으려 정처 없이 뛰쳐나갔다.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이제 일이고 뭐고 머릿속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

밖으로 나간 난 널따란 정원을 헤매며 여기저기 되는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데나 좋으니, 사람 없는 곳에서 혼자 펑펑 울고 싶었다.

“여기가 어디지...”

호기롭게 뛰쳐나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점점 인적이 드물어져, 아예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웠다. 갑자기 문득,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황궁 안에는 황제와 황후밖에 못 들어온다는 비원이 곳곳에 존재하는데, 황제는 그곳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걸 매우 싫어한다고 했다.

겁이 덜컥 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돌아가야겠다! 아무리 비참해도 살아남아야지...

부스럭

“웬 놈이냐!”

젠장, 왜 꼭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이럴 때 내게 되는 걸까...

목에 순식간에 칼날이 들이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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