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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9화 (9/134)

9. 그라츠 제국(5)

2016.12.23.

“하녀장님, 제가 오늘은 다림질 일은 못 할 것 같아요. 공주저하께서 별궁의 모든 시트교체를 명하셨어요.”

“전부 말이냐?”

“네. 날씨 때문에 눅눅하다고 전부 교체하라고 명하셨어요. 아, 그리고 저하께서 사용하시는 공간은 대청소도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저하의 방을 담당하는 시녀, 아니 하녀에게 직접 들은 말이에요.”

물론 시트교체도 대청소도 전혀 없는 얘기다. 낸시가 지어낸 거니까. 아, 대청소는 내가 지어냈지. 큭큭큭

하녀장 역시 이상한 루트로 전달된 명령에 갸우뚱 하는 듯 했으나, 애초에 명령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자격 같은 게 없었다.

“알겠다. 그럼 너는 시트를 교체하고, 대청소는... 보자 누가 청소담당이더라...?”

옳지. 당첨!

낸시는 공주 침실에 딱 붙어 시녀처럼 굴며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지만, 사실 공식적으로는 공주가 사용하는 공간의 청소를 담당하는 하녀다.

나름대로 빽 좀 썼기에 공주 처소 근처의 쉬운 일을 배정받은 걸 테지. 하지만 그게 네 발목을 잡을 거야.

물론 낸시는 시녀인 척 콧대 높게 구느라, 자기 일은 힘없는 우리들한테 떠맡겨 놓고 공주에게 아부나 떨어댄다.

웃겨 정말. 우리들 중 누구도 시녀의 지위는 없는데..! 무슨 황후마마의 측근 시녀 어쩌고 백작부인이라도 되는 듯 굴고 있어! 애초에 공주의 시녀들로는 제국출신 사람들밖에 없는 걸? 너도 결국은 하녀야!

“청소는 낸시와 릴리 담당이구나. 내가 따로 불러 명령할 테니 너는 시트부터 갈거라.”

“네, 알겠습니다.”

난 다소곳하게 대답하고 돌아섰다.

“아, 리엘. 손가락은 괜찮은 거니? 시트 갈 수 있겠어?”

말 뿐 아니라,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염려 또한 진짜였다. 우와, 하녀장님 마음씨 좋다... 내 걱정도 해 주시고...

“네, 다행히 적당히 혼나다 쫓겨나서 별 일 없었어요. 폐 끼치지 않게 열심히 할게요!”

후훗, 이게 바로 일명 씩씩하고 착한 소녀 컨셉이다. 내가 하녀장님한테 좀 잘 보여 놔야 하거든. 낸시랑 더욱 더 비교되도록 말이야. 후후후후후

“너무 무리하지는 말렴.”

“네. 고맙습니다.”

***

방마다 시트를 갈며 슬쩍 바깥을 살펴보니, 하녀장이 낸시와 릴리를 불러 공주가 사용하는 모든 곳을 청소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보였다.

낚였다!!

공주가 사용하는 공간은 아주 넓었다. 침실 및 드레스룸, 욕실, 서고, 별실, 내실, 응접실 등등... 다 청소하려면 허리가 휠 거다. 쌔빠지게 고생해봐라.

하지만 낸시가 순순히 할 리가 없었다. 그게 바로 내 계획이었다.

“야!”

나한테 올 줄 알았다.

“네가 시트 갈면서 청소도 해!”

옳다구나, 걸려들었다.

“으, 으응?”

낸시는 이 명령 자체가 자신이 지어낸 것이기에, 공주의 말을 무시한다는 것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을 거다.

그저 어쩌다 말이 잘못 옮겨지면서, 계획에도 없던 청소가 추가되어 자신에게 일이 생긴 게 짜증나겠지. 그러니 당연히 나한테 떠맡기려 할 테고.

“공주 저하가 너한테 명령하신 거잖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은! 있지도 않은 명령에 언제 청소까지 추가되었다니? 그거 내가 끼워 넣었는데?

“으...으응... 알았어...”

난 일부러 어수룩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낸시가 사라지자 시트를 갈며 슬며시 방을 더 어지럽혀 두었다.

소파 밑에 숨은 먼지도 일부러 끄집어내놓고, 스리슬쩍 카펫에 얼룩도 흘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머리카락도 좀 올려놓고 화병을 뒤집어 물도 좀 쏟아 두었다.

“끝!!”

아침부터 시달린 중노동 끝에, 난 내 일을 완벽하게 끝내 놓았다.

낸시년의 원래 계획은 나를 엉뚱한 일에 시달리게 만들어, 원래의 일을 제대로 못해 혼나게 만들려는 거였겠지? 아니면 시트교체를 빌미로 무언가 날 엿 먹일 계략을 꾸몄거나.

하지만 내가 바닥인생에서 어디 하루 이틀 굴렀는가? 이 정도 노동은 껌이었다.

어쨌든 난 낸시에게 낚이지 않도록 모든 일을 싹 처리했다. 시트 교체 뿐 아니라 공주의 옷 다림질까지 전부 말이다.

훗, 이제 난 책잡힐 게 하나도 없거든!? 랄랄라. 이제 구경할 시간! 팝콘 가져와!

***

아니나 다를까, 방에 가서 쉬고 있던 내게 하녀장의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하녀장님, 부르셨습니까.”

큭큭큭. 하녀장이 청소상태를 점검하러 왔다가, 개판이 되어 있는 방을 보고 당장 낸시를 호출했겠지.

그리고 낸시는 당연히 나를 물고 늘어졌을 테고.

“리엘, 이 아이가 이상한 말을 해서 너를 불렀다.”

옆을 보니 낸시가 울그락불그락하는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소는 네가 하기로 했잖아!”

“뭐? 내가? 그게 무슨 말이야? 청소 담당은 너잖아.”

“내가 아까 말했을 때 네가 분명....!!”

말하려다 아차 싶었는지 낸시는 말을 끊었다.

“하녀장님! 억울해요! 전 공주저하께서 따로 시키신 일이 있어서 그걸 하느라 바빴어요. 그래서 리엘이 자신이 대신 해 준다고 해놓고는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는 거예요!”

어랍쇼. 이제 공주까지 막 팔아 대냐?

“낸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난 하루 종일 바빴는데 내가 청소까지 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랬겠어... 시트를 가는 것만으로 힘들어서 시간이 부족했는데...”

난 정말 불쌍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말 들은 적도, 한 적도 없다는 듯이.

큭큭큭 너만 잡아떼니? 나도 할 수 있다고.

“낸시!! 공주저하의 명령을 멋대로 어기는 걸로도 모자라, 혼나기 싫어 다른 사람 핑계를 대느냐!”

낸시는 애초에 공주가 그런 명령 내린 적도 없다고 말하고 싶을 거다. 하지만 이미 자기가 파놓은 무덤인지라 말할 수가 없겠지.

“그, 그게 아니라 아까 정말 리엘이 대신 해 준다고...!! 그리고 전 저하께서 심부름을 시키셔서...”

낸시는 또다시 말끝을 흐렸다. 괜히 핑계 댔다가, 직접 가서 공주에게 확인해보자고라도 하면 큰일이었을 테니까.

하녀의 처벌에 대해 주인에게 물어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니, 괜히 가서 말을 꺼냈다가 전부 들통 날 수 있는 상황이다.

“시끄럽다!! 너에게 벌을 주어야겠구나!”

키득키득. 평민에게 혼나는 이런 자존심 상하는 상황은 처음이지?

근데 어쩌니? 내 진짜 복수는 이게 아냐. 네가 혼나는 걸론 부족하지.

낸시는 분명 하녀장에게 개길 거다. 왜냐고? 잘난 신분 때문이지. 신분이 더 높은데 그럼 뭐가 문제냐... 바로 시중인들의 서열이 문제지!

황궁의 여성 시중인들은 크게 두 라인이 있다. 시녀들과 하녀. 시녀를 통솔하는 시녀장 밑에 시녀들이 있고, 하녀를 통솔하는 하녀장 밑에 하녀들이 있다.

시녀장은 주로 귀부인. 시녀들은 귀족 영애들이다. 하녀장이나 하녀? 당연히 평민이다.

어쨌든 시녀장 밑에 시녀가 있는데, 이 시녀와 거의 비슷한 지위인 게 하녀장이다. 동급이거나 살짝 아래인 정도. 그리고 그 하녀장 밑에 하녀가 있는 그런 구조다.

진짜 귀족 영애인 낸시는, 지금은 어쩌다보니 제국에 끌려와 하녀로 전락했지만, 결코 하녀장에게 혼날 신분이 아닌 것이다.

아, 물론 여기가 리테인이라면 말이지.

문제는 낸시가 지금은 하녀라는 것. 즉 하녀장은 그녀의 상관. 하지만 상관은 평민. 그런데 하녀장은 평민이지만, 그 지위를 인정받아 나름대로 대접을 받는다.

과연 자존심 센 낸시가 호락호락 벌을 받을까?

오, 노. 그럴 리가!

개겨라. 개겨. 그리고 밑바닥으로 쫓겨나라. 이게 내 진짜 복수라고!

귀족 영애인 시녀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하녀장에게, 일개 외국인 노동자 하녀인 낸시가 개기면?

예! 팝콘이지! 팝콘이 뭔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팝콘이야! 자, 이제 즐겁게 관전해 볼까?

“따라오너라!”

낸시가 버티고 서 있자, 하녀장은 제국 출신 다른 하녀들에게 눈짓했다. 명령받은 하녀들이 낸시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낸시는 손을 들어 그들의 뺨을 내리쳤다.

짜악!

“감히 평민 주제에! 난 귀족이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잘한다! 재밌어, 재밌어!! 싸워라! 싸워라!!

“낸시!!”

하녀장이 버럭 외쳤지만 낸시는 이미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난 자작 영애야! 이 따위 하녀복 입고 있다고 어딜 감히 평민이 날 가르치려 들어!!”

좋아. 좋아. 계속 그렇게 해.

낸시는 지금 흥분해서 잊고 있나 본데, 황궁의 시중인들 서열은 매우 엄격했다. 그리고 볼모 공주의 하녀인 우리의 원래 신분 따위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원래도 늘 기고만장하게 굴던 낸시를 하녀장이 좋게 봤을 리가 없었다.

짝!

“.........!! 어, 어떻게 감히...!! 감히!!!”

하녀장에게 뺨을 맞은 낸시는 말도 잇지 못할 정도로 분노에 떨고 있었다.

낸시가 부들부들거리든 말든, 하녀장은 할 말을 했다.

“근신하고 있거라! 네 처벌은 시녀장님와 직접 의논하겠다!”

그제야 낸시는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하녀장에게 신분을 내세워 개겨 봤자, 그 위로 줄줄이 있는 제국 귀족 출신의 시녀들 앞에서는 끽 소리도 못한다.

하물며 별궁의 시녀장이라면, 우리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려 공주에게도 없는 인사권을 말이다.

공주가 하녀들 배치에 어느 정도 입김을 불어넣을 수는 있지만, 시녀장은 공주의 동의 없이도 낸시를 험한 일로 쫓아 보낼 수 있다.

아, 낸시는 아주 훌륭했습니다. 어쩜 그리 내 계략대로 행동해 주는지... 매우 훌륭한 배우였습니다. 그럼 안녕!

***

다음날 내 계획 그대로, 낸시에 대한 사이다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너희 그거 들었어? 그게..."

"어머머, 정말? 어쩌다가..."

"얘, 무슨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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