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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0화 (10/134)

10. 인연의 시작(1)

2016.12.24.

뭐긴 뭐겠는가. 낸시가 바로 오물처리부로 쫓겨났다는 소식이었다. 더불어 쫓겨나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뺨따구도 신나게 맞았다고 한다. 꺄르르르!

야호! 복수라 하기엔 너무 약하지만 이 정도로 봐주지 뭐. 그리고 공주년아. 너도 기다려. 내가 꼭 저 위로 기어 올라가서 반드시 갚아 주겠어!

자, 그럼 그걸 위해서라도 이제 본업으로 돌아갈까? 내 본업. 순진한 귀족 소년 낚기! 이제 낸시년도 치워버렸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업 시작!

***

“뭐어? 즉위기념 축제? 정말?”

“응, 리엘. 정말 기대되지!?”

요즘 일이 정말 술술 잘 풀린다. 줄리가 물고 온 소식은, 마치 날 위해 일부러 준비된 무대 같았다.

그라츠 제국에서는 3월 초에 가장 큰 축제기간이 있다. 17년 전 이맘 때 쯤, 현 황제가 즉위했고, 열흘 쯤 후에 황제의 결혼식과 황후의 대관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 가장 중요한 두 날 사이의 열흘간이, 온 제국에 엄청난 축제가 열리는 기간인 것이었다.

“정확히 무슨 축제? 황궁에서도 뭔가 있어?”

“당연하지! 사냥대회와 무도회도 열리고 황궁대운하도 개방한대. 모든 귀족들에게! 그리고 그 기간만큼은 황궁에서 일하는 고용인들도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대!”

“정말?”

이거 완전 나를 위해 깔아주는 사교의 장이잖아! 귀족 소년들이 바글거릴 거라고!

“응 정말. 그리고 우리에게도 며칠간 휴가가 주어질 거래. 축제가 열리는 제도의 거리에 나가볼 수 있는 거야!”

오옷, 이것도 땡기는데? 황궁에서의 귀족낚시도 중요하지만, 솔직히 나라고 바깥이 궁금하지 않을 리 없다. 아, 이왕이면 남자 하나 잘 꼬셔서, 제도 곳곳의 명소를 함께 데이트 하면 되겠네...! 꺄아아악! 좋아라!!

잠깐 근데,

“사냥대회...?”

아, 어디서 일거리가 폭탄처럼 밀려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응. 공식 행사라서 공주저하도 참석하신다니, 우리 중에도 몇 명 차출해서 수발을 들어야 한다고 들었어...”

“...........”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제길, 이런 건 꼭 들어맞던데... 제발 나는 아니기를!

***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첫날의 사냥대회.

역시나... 린넨류 담당인 내가 빠질 리가 절대 없었다. 황족 및 귀족, 그리고 공주가 앉을 자리를 세팅하기 위해 난 새벽부터 바빴다.

본궁에서 하녀들이 대거 준비하러 나왔지만, 일손이 부족했기에 별궁에서도 나를 비롯해 몇몇이 끌려 나갔다. 난 빳빳하게 풀을 먹여 다려 놓은 시트를 산더미처럼 들고 낑낑거리고 사냥터로 걸어갔다.

“무거워 죽겠네. 이놈의 황궁 정원은 왜 이렇게 넓은 거야!!”

끝도 없이 수 킬로미터나 펼쳐진 운하를 따라 내려가자, 저 너머로 광활한 숲이 보였다.

한 번 짐을 들고 오는 것만 해도 일이 장난 아니었다.

“이거... 어디다 놓으면 되나요?”

“아, 별궁에서 왔군요. 이쪽에 내려놓고 도우면 돼요. 별궁에서 온 하녀죠?”

“네. 뭘 도울까요?”

나에게 존댓말을 하는 걸 보니, 평민출신 본궁 하녀인 것 같았다.

리테인에서 온 하녀들은 귀족신분이라는 게 알려져 있기에, 같은 하녀지만 저들은 쉽게 말을 놓지를 못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내 신분에도 불구하고, 거의 유일하게 나를 대우해 주는 이들인 셈이었다.

“린넨류 담당이니, 시트 까는 걸 하면 돼요.”

“알겠어요. 아, 그리고 같은 하녀인데 말 편하게 해요.”

“아, 하지만...”

내 말에 눈앞의 하녀는 매우 당황한 눈치였다.

리테인 출신 하녀들은 귀족신분이니 함부로 대했다가는 경을 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나도 놓을게.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서로 말 놓자. 난 리엘이야. 16살이고.”

“정말 그래도 돼..?”

사실 난 반쯤은 미래인(?), 아니 현대인(?) 이라서 신분의식이 거의 없었다. 오죽하면 마음속으로는 황족이든 왕족이든 간에 막 불러대겠는가.

“응!”

“난 제시야. 17살이고.”

“한 살 차이네? 제시, 만나서 반가워!!”

제시는 기쁜 듯 베시시 웃으며 작게 나도 라고 답했다.

제시도 나랑 같이 린넨 담당이었는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시종들이 차양을 설치하는 동안, 우리는 아래쪽으로 비스듬히 들어올 햇빛 차단을 위해 하늘하늘한 커튼을 열심히 달았다.

그리고는 놓여있는 야외용 의자와 테이블에 전부 새하얀 시트를 깔았다. 테이블 위에 냅킨도 일일이 예쁘게 접어 올려놓았다.

“에구구 허리야...”

왜 이렇게 의자와 테이블이 많은지... 본궁의 하녀들과 나눠 해도 일은 끝도 없이 많았다.

에휴... 나도 충실한 일꾼 말고 공주님 하고 싶어. 서럽다. 흑흑. 내가 뼈 빠지게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공주는 편안히 앉아 구경하겠지?

“리엘, 고생 많았어. 이제 곧 사람들이 올 테니 우리는 눈에 안 띄게 사라지는 게 좋겠어. 귀족분들은 평민하녀들이 얼쩡거리는 걸 싫어하니까.”

“그렇구나...”

“아차 미안. 리엘도 귀족인데...”

“아냐, 이름뿐인 귀족인걸.”

“그래도...”

“난 뭐 그런 거 신경 안 써. 하지만 리테인에서 온 하녀들 중에 뼛속까지 귀족인 싸가지 없는 애들도 꽤 많으니, 그 애들은 좀 조심해야 해.”

“고마워, 꼭 조심할게!”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본궁은 정말 까마득히 멀었다. 그나마 정원 중간에 아담하게 세워진 별궁은 가까운 편이었다.

“정말 멀다...”

“그래도 갈 때는 빈손이라 다행이지.”

“하지만 이따가 또 치우러 와야 하잖아. 휴... 힘들다.”

그렇게 투덜대며 걸어가는데, 문득 낯익은 곳의 풍경이 보였다.

예전에 정처 없이 뛰쳐나왔을 때 우연히 발길이 닿았던, 황제와 황후의 비원이었다.

“제시, 저 곳이 그곳이야?”

대충만 물어봤는데 제시는 곧바로 알아듣고 답했다

“응, 그럴 거야.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들었어.”

저곳을 보니 갑자기 그날 보았던 황후가 떠올랐다.

“제시, 본궁에서 일하면 황후폐하도 뵌 적 있겠네? 어떤 분이셔?”

“정말로 좋은 분이시지. 천사같이 아름답고 상냥하셔. 신분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잘 대해 주시고.”

제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머릿속에 들려오는 대답도 똑같았다.

우와 부럽다... 나도 미친 공주년 밑에서 말고, 본궁에서 일하고 싶다.

“정말 훌륭한 분이시구나...”

“제국 귀족들은 대부분 그래?”

“그럴 리가! 폐하께서 정말 너그러우신 거지, 다른 귀족들은 보통 안 그래.”

그러고 보니 멍청한 소릴 했다 싶었다. 아까 제시가 귀족들 눈에 띠지 말고 빨리 사라지자고 한 걸 보면 뻔 한데 말이다.

역시, 어느 나라나 귀족들은 별 다를 바 없구나. 이대로라면 순진한 귀족 하나 잘 낚아도 집안의 반대가 만만치 않겠는데?

황후폐하가 아무리 좋은 분이라지만, 나랑은 새털만큼도 상관없는 먼 존재였다. 감히 황태자를 넘볼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휴... 그렇구나. 고마워.”

“리엘은 이쪽이지? 난 본궁까지 가야 해서 여기서 헤어져야겠네.”

“응. 오늘 즐거웠어. 다음에 또 만나면 좋겠다...! 그럼 잘 가!”

제시와 헤어진 난 혼자 열심히 걸었다. 우거진 숲 사이를 걸으니 기분도 꽤 좋았다.

중간에 갈림길이 몇 번 나와 당황했지만, 아까 다른 하녀들과 함께 오면서 죽 직진했던 걸 기억해 냈다. 나는 그저 앞만 보고 걷고 또 걸었다.

“.......정말 많이 걸었는데, 여기 어디야? 설마 나 길을 잃은 거야?”

주위는 점점 수풀이 우거져 울창해지고 있었다. 이건 마치...

“마치 사냥터 같잖아?”

에이 설마...

잠깐 흠칫 놀랐지만,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그 정도로 헤맬 리가!

하지만 생각해보니, 난 지난번에도 길을 잃고 비원에 들어가 버린 적이 있었다.

정말 헤매다가 사냥터로 되돌아온 거야? 그것도 입구 부분이 아니라 한복판으로?

적어도 여기가 초입이라면, 아까 설치한 차양에 앉아있을 사람들이 분명 보여야 했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야 해!

사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지금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는 안다. 재수 없으면 동물로 오해받아 화살이 날아와 머리에 꽂힐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지? 도저히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모르겠어...”

그림자라도 보고 별궁 쪽 방향으로 쭉 걸으려 했는데, 하필이면 지금 정오 근처였다. 그림자로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빙빙 도는 것보다는 한쪽으로 쭉 걷는 게 날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이게 점점 더 깊은 방향이면 어떻게 하지?

난 어찌해야 할지 완전히 패닉에 빠져버렸다. 겁이 덜컥 나서인지 혼잣말이 주절주절 마구 나왔다.

“차라리 안전해 보이는 데서 조금 기다릴까? 해가 지기 시작하면 그림자를 보고 걸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러자니 또 사나운 짐승이 튀어나올까 걱정됐다.

아냐, 그동안 걸은 시간으로 짐작해보면, 여긴 아직 깊은 숲 안쪽이 아닐 거야. 괜히 헤매다 깊이 들어가면 더 위험해져.

역시 기다리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늦게 돌아가면 불호령이 떨어질까 걱정이었지만, 그래도 목숨이 더 소중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혹사당해 지쳐있던 나는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았다.

“배고파.... 목말라.....”

내가 이 개고생을 하는 동안, 공주년은 내가 만들어 놓은 자리에서 호호호 거리며 와인이나 홀짝거리고 있겠지? 재수 없어 죽겠네.

“졸립다.”

자리에 앉자, 순식간에 잠이 쏟아졌다. 여기서 잠들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밀려오는 졸음에 고개가 푹푹 꺾였다.

얼마나 졸았을까...

“크르릉...”

꾸벅 꾸벅 졸던 내 귓가에, 짐승의 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난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수풀 너머에 멧돼지 한 마리가 떡하니 서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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