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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1화 (11/134)

11. 인연의 시작(2)

2016.12.25.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정말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날 보면 먼저 공격할까? 저 송곳니에 받히면 바로 죽겠지? 설마, 나 잡아먹히는 거야?

그 와중에도, 일단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괜히 인기척을 냈다가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뒤돌아 도망가 봐야 100퍼센트 따라잡힐 거다.

다행히 멧돼지는 아직 날 보진 못한 것 같았다. 저 녀석 시력이 나쁘면 좋으련만... 나는 멧돼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무슨 수가 생길까!? 대체 내 인생은 대체 왜 이런 거야? 아니, 지금 그런 걸 탓할 때가 아니지.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시야각을 생각하면 충분히 내가 보일만한 각도였다. 그런데 멧돼지는 나를 못 보고 있다. 즉, 시력이 아주 나쁠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소리를 내지 않고 어딘가 나무나 바위, 수풀 뒤로 숨으면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시력이 안 좋은 동물은, 기척에 예민할 게 분명했다. 난 최대한 조심스레, 조용히 한 걸음씩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한걸음, 두 걸음... 제발...! 이제 거의 다 왔어!

“흐아악.. 헙!”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나무뿌리에 걸려 뒤로 휘청 넘어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내가 크게 소리치는 바람에 놀라서인지, 멧돼지가 나를 쳐다보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안 돼... 오지마!

하지만 멧돼지는 이쪽으로 쿵쿵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무력하게도 넘어진 채 소리만 지르는 내가 참 한심했지만, 정말 너무 무서워서 비명밖에 안 나왔다.

어떻게든 일어나서 숨으려 노력해 보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제 몇 초 후면, 나는 멧돼지에 받혀 죽겠구나... 차라리 미처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받히자마자 쇼크로 죽으면 좋겠다.

눈 뜬 시체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에, 난 마지막을 예감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쿵!!

아... 죽을 때가 됐는데... 아직인가? 무서워... 그냥 빨리 끝나면 좋겠어.

이건 마치 높은 놀이기구에서 떨어지기 직전 3초를 세는 기분의 100배 정도의 공포랄까...

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예상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함에 난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거대한 멧돼지가 이마에 화살이 박힌 채 넘어져, 달려오던 속도를 못 이기고 나에게 쓸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꺄아아악!”

어떻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눈앞에 미끄러져오고 있는 멧돼지도 무서웠다.

허둥지둥 정신없이 비명을 지르는데, 누군가 내 허리에 팔을 감아 강하게 잡아채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휙 돌았다.

“꺅!!!”

정신을 차려보니, 말 위에 태워져, 누군가를 마주한 채 안겨 있었다.

“하아...하아....”

쿠웅!!

그리고 나를 죽일 뻔한 멧돼지는, 옆을 아슬아슬 스쳐지나가 나무기둥에 처박혔다.

산... 산 건가?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겨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날 잡아챈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리엘, 괜찮아?”

그제야 난 안겨있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날 구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

“운하에서, 나 기억 안나?”

“어엇! 아... 그 반말!?”

“풉, 뭐? 하하하하 그래, 맞아. 그런데 그렇게 기억되다니 좀 충격인데?”

아, 충격이니? 날 그렇게 부른 건 네가 처음이야.. 뭐 그런 반응인가? 일부러 한 건 아니지만 이런 게 아직도 먹히다니... 아, 이 동네에서는 참신한 방법일지도?

“그나저나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어쩌다 여기에 들어오게 된 거야? 정말 위험했잖아!”

한참 웃던 반말남은 내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 구, 구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근데 그렇게 웃겨요? 이름을 모르니까... 달리 어떻게 부르겠어요?”

“그렇구나! 내가 이름을 안 가르쳐 줬던가?”

“네. 뭐 물어보지도 않았지만요.”

“.........”

상대방은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명의 은인인데 제가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이 뭔가요?”

“........그게...”

“맞다. 제 이름은...”

“리엘. 리엘이잖아. 기억하고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내 이름을 부르며 괜찮냐고 물었었지. 한번 만난 내 이름까지 기억하다니 머리가 좋은가 보다. 아니 내가 좀 예쁘지?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그래서 기억하나 보다.

앗 혹시 이거 그린라이트?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하녀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니...

또 자뻑이 시작되는 걸 보니 놀람이 많이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기억력이 참 좋은가 봐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인상 깊어서... 빨래... 푸흡...! 그리고 사실 내 이름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던 건데...

꽤 강렬한 생각이었는지, 별로 집중하지도 않았는데도 눈이 마주치자 생각이 술술 흘러들어왔다.

헐... 그러니까 쪽팔리게 운하에서 빨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뜻? 으아아.. 내 흑역사를! 그리고 뭐? 일부러 말 안 해놓고 아까 그렇게 시치메 뗀 거야?

난 왠지 얄밉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허둥지둥 말을 돌리며 일부러 툭 쏘아붙였다.

“저도 기억력 하나는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이름이 뭐냐고요!?”

이건 진짜다. 난 1살 때의 덜떨어진 뇌로 전생도 기억하는 여자야!

물론, 어릴 때 천재소리 듣다가 커서 평범해지면 비참해 질 것 같아서 최대한 티 안 내고 살았지만 말이다.

잠깐, 괜히 그랬나? 차라리 어릴 때부터 날고기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이렇게 초라하게 쫓겨나지는 않았으려나? 적어도 뭐 천재의 후원자 이런 거라도 되어 주지 않았을까?

에잇, 이미 지난 일...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내가 잡생각을 하는 사이, 상대방도 말이 없었다.

“............”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직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다 들리는 거 꿈에도 모르겠지?

답답함에 직접 생각을 읽으려 하는데, 반말남은 고개를 슥 돌려버리고는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름 안 알려 줄 거예요? 계속 반말남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생각을 읽으면 이름정도야 곧바로 알겠지만, 억지로 남의 얼굴을 잡아 돌려 눈을 마주쳐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반말남은 계속 머뭇거렸다.

진짜!! 이름을 말해! 내가 기억해 주겠다니까? 앗, 좀 전에 반말남이라고 대놓고 말해버려서 화난 건가?

“이름, 없어요?”

“..........음... 내 이름은........”

“......?”

이름 하나 말하는 데 왜 이렇게 버벅이지? 아, 혹시 내 얼굴 쳐다보느라 멍한 건가? 수줍어서?

“나, 난... 리일이라고 해!”

“리일? 제 이름이랑 비슷하네요?”

“그, 그러게? 신기하네?”

“그럼 앞으로 리일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응, 으응!”

뭐가 그리 기쁜지 리일은 헤실거렸다. 설마, 뭐 내 이름 불러 준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이런 건가? 설마...

그런데 성은 말해주지 않는 걸 보니 평민인가? 오늘 모습을 보아하니, 시종은 아니고 기사의 종자쯤 되는 것 같은데... 활도 제법 쏘고 말도 탈 줄 아니까. 그런데 검은 로브로 칭칭 감고 있는 옷차림이 참 특이하네?

“근데 리일, 여긴 어떻게...?”

“아, 마침 몰래 도망 나가는 길에... 비명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멧돼지가 사람을 덮치고 있잖아. 그래서 일단 급한 대로 화살을 날렸지. 정말 운이 좋았어.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짓밟혔을 거야.”

“하아... 휴... 정말 감사해요. 진짜로 은인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난 리일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예전에 수녀원 시절, 이튼 오라버니에게 주려고 내 이름을 새겨뒀던 손수건이었다.

“응?”

“피가 나잖아요. 살짝 긁혔나 봐요.”

“이 정도는 괜찮아. 아무튼 고마워.”

리일은 기쁜 듯이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사냥대회가 아직 안 끝났을 텐데, 마음대로 도망가도 돼요?”

“뭐, 그래서 이렇게 슬쩍 얼굴을 가리고 도망가고 있잖아. 꼴도 보기 싫은 여자애가 자꾸 내 쪽으로 오려 해서...”

“그렇구나. 정말 천운이었네요. 다시 한 번 고마워요. 정말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인사는 그쯤이면 됐고, 그보다 다친 데는 없어?”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휴, 아니다. 일단 여길 벗어나자.”

히극!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아직도 마주앉아서 말에 같이 타고 있었다. 민망해진 난 슬쩍 한쪽 다리를 반대쪽으로 빼서 옆으로 돌아앉았다.

일명 옆 안장 스타일 공주님 승마자세라고 해야 할까? 눈을 마주볼 수 없다는 게 불편했지만, 오늘은 더 이상 뇌를 혹사시키지 않고 쉴 계획이었으니 별 상관없었다.

물론 이 말은 옆 안장이 아니었기에 굉장히 불편하긴 했다. 하지만 말이 워낙 천천히 걷는데다가, 리일이 꽉 잡아주고 있어서 위험하진 않았다.

리일은 곧 익숙한 듯이 숲을 헤치며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래서... 길을 헤매고... 어쩌다 보니 숲에...”

나는 나오면서 내가 겪은 일을 설명해 주었다.

“길을 참 못 찾나 보구나. 정말 큰일 날 뻔 했네. 앞으론 절대 혼자 돌아다니지 말아야겠다.”

“그러게요.”

기억력과 방향감각은 별 상관없는지, 내가 생각해도 난 조금 심한 길치였다.

도란도란 말하며 나오다보니, 곧 쭉 뻗은 황궁 대운하가 보였다. 드디어 마음이 놓이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리고 그제야 가출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오 마이 갓.

“저, 리..리일. 저 좀 내려주세요...”

“응? 별궁까지 가는 거 아니었어?”

“하지만 누가 보면... 혼나요!! 고, 공주저하가 아시면...”

하녀장님께는 잘 설명하면 되겠지만, 괜히 공주의 측근하녀들이 봤다가는 앞뒤 사정 듣지도 않고 모함하려 들 수도 있었다. 땡땡이 친 주제에 남자랑 놀아나고 왔다고 말이다.

“응? 죽을 뻔한 게 혼날 일이야?”

“말하기 복잡한데 아무튼 그래요.”

“별궁 공주님이 엄청 무서운가봐.”

-어쩐지 공주 성질이 장난 아닐 것 같더라니... 싫다, 싫어!

앗, 오늘은 진짜 능력 안 쓰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읽어버렸다. 워낙 강렬하게 나오는 생각은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들린다는 게 문제였다.

“네...”

내 간곡한 청에 리일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말에서 내려주었다.

“아얏!”

그런데 내리면서 발을 딛자마자 찌릿하고 통증이 몰려왔다. 아깐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뒷걸음치며 넘어지느라 발목을 접질린 모양이었다.

“리엘! 괜찮아?”

리일이 풀썩 뛰어내리며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네.”

“아니, 아무래도 접질린 것 같은데? 걸을 수 있겠어? 데려다 주는 게 낫겠어.”

리일은 그렇게 말하며 로브를 푹 뒤집어쓰며 얼굴을 가렸다.

“괜찮아요! 정말 걸을 수 있어요.”

난 힘겹게 쩔뚝거리며 떠났다.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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