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인연의 시작(4)
2016.12.27.
그리고 당연히도 우린 제지당했다. 쪽팔려서 그를 잡아끌고 얼른 사라지려는 나를, 리일이 잠깐 말렸다.
“괜찮아 리엘, 미리 예약해놨으니까.”
“네? 손님. 예약이라뇨? 저희는...”
“여기, 이걸 확인해 보도록.”
막 무언가를 말하려던 안내인의 말을 끊고, 리일은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뭐야, 예약증이라도 되나? 하긴 예약내역을 모바일로 받는 세상이 아니니까... 응? 모바일?
요상한 단어가 떠올라 내가 또 잡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실랑이는 순식간에 끝났다. 급격히 정중해진 안내인의 뒤를 따라 우리는 안으로 유유자적 들어갔다.
우리가 자리 잡은 맨 위층은 전부 별실로 이루어져 있어, 프라이버시가 잘 보장되었다. 리일은 실내에 들어오자 드디어 답답한 후드를 벗었다.
그 예쁘장한 얼굴은 언제 봐도 내 취향이었다. 근데 정말 어디서 본 것 같단 말이야...? 그냥 몇 번 봐서 익숙해져서 그런가?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끄러웠던지, 리일은 대놓고 말했다.
“리엘. 나 잘생긴 거 나도 아는데, 그만 쳐다보고 밖을 한 번 봐. 쿡쿡”
-어머니가 한 미모 물려주시긴 했지...!
아, 깬다... 얘 뭐래? 잘생긴 건 좋은데, 난 자기가 잘생겼다는 자각조차 없는 순진한 남자가 더 좋다고!
“아, 미안해요. 와! 경치가 정말 멋져요!! 여기 진짜 좋은 곳인데요?”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의 최상층이라 그런지, 제도 시내가 쫙 내려다보였다. 발 아래로 쫙 펼쳐진 제도에는 붉은 석양이 내리깔리고 있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짜식, 이런 델 미리 예약까지 해 놓고... 정말 신경 많이 썼는데?
아니, 아니지. 이거 내가 내는 거잖아! 생명의 은인이니 당연한 거긴 하지만... 왠지 환상이 파샥 깨져버리는 기분이었다.
“흠흠, 그럼 식사를 주문할까요? 메뉴는...”
“아, 예약할 때 미리 말해두었어. 곧 가져다 줄 거야.”
그의 말대로, 곧 식사가 줄줄 나왔다.
리테인 하녀들은 대부분 진짜 영애가 아니라는 내 말을 기억하는 모양인지, 리일은 요리가 하나씩 나올 때마다 일부러 먼저 눈에 띄게 식기를 집어 들었다.
혹시라도 모르겠으면 따라서 집어 들라는 표시인 것 같았다.
“예법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리테인과 이곳의 에티켓에 다른 점이 꽤 있을 테니까. 그냥 편안히 먹어.”
그러면서도 리일은 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적당한 변명거리를 미리 깔아주고 있었다.
이 남자, 진국이구나... 처음에 운하에서 봤을 땐 경박한 놈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괜찮았다.
젠장, 내 심장이 왜 자꾸 쿵덕거리지. 리엘, 정신 차려! 얜 그냥 꼬맹이잖아! 내 통합정신연령을 기준으로 하면 그냥 조카뻘이라고! 쓸데없이 심장 뛰지마!!
하지만 내 얼굴은 이미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볼에 올라온 열기가 스스로 느껴질 정도였다.
난 서둘러 말을 돌렸다.
“고마워요. 실수해도 귀엽게 봐주세요.”
리일의 배려심은 매우 고마웠지만, 난 가짜 중에 가짜이면서도 진짜 못지않게 예법에 통달했다. 양국 간 소소한 에티켓 차이는 있겠지만, 내 기본 태도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완벽한 자세와 예법으로 식사하는 내 모습을 보자, 리일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내가 운하에서 빨래나 하고 있어서 진짜 무수리과로 알았구나... 아, 무수리 맞긴 한데... 배울 만큼 배운데다 예쁘고 우아한 무수리랄까... 아 진짜 내 캐릭터 특이하네.
“리엘, 입에는 맞아?”
“네. 아주 맛있어요. 특히 화이트 트러플로 만든 전채요리가 훌륭하네요. 요리사의 솜씨를 칭찬하고 싶을 정도예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오늘의 식사가격에 대해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몇 달치 월급이 사라질 판인데 밥이 넘어가겠냐!
“맛있다니 다행이다. 나가면서 요리사에게 메시지를 남겨 줄게. 아주 기뻐할 거야.”
“네, 고마워요.”
어쨌든 이미 시작한 식사, 무를 수도 없었기에 난 속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사실 이게 얼마 만에 먹어보는 정찬인지, 오랜만에 호사를 누리는 입은 행복해 죽을 지경이었다.
잠시 후에 가보게 될 거리의 축제도 기대되지만, 고급스럽고 환상적인 저녁식사 역시 정말 좋았다.
어떻게 이렇게 내 마음을 쏙 알고 준비한 건지... 보면 볼수록 리일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리일. 리일은 황궁의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기사인가요?”
난 본격적으로 리일에 대해 호구조사를 시작했다. 솔직히 순식간에 지나간 첫 만남도, 숲에서의 두 번째 만남에서도 난 그에 대해 제대로 알 겨를이 없었다.
지금도 아는 거라곤 이름 두 글자뿐이었다. 심지어 성은 무엇인지, 있기는 한건지도 전혀 몰랐다. 물론 아까의 식사태도로 미루어 보면, 리일은 절대 평민이 아닐 것이다.
쿨럭, 쿨럭!
리일은 내 질문에, 잘 먹다가 갑자기 사레가 들른 듯 기침을 했다.
“아, 미안... 실례를 해 버렸네. 흠흠... 뭐라고 물어봤더라?”
“그게... 리일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서요. 처음엔 시종인 줄 알았는데, 그때 숲에서 절 구해준 걸 보니 평범한 시종 같진 않아서요. 기사님이었어요?”
“어 그게... 으응. 시종은 아니고, 기사라고 하기도 뭐한데... 어쨌든 검을 익히고 있어! 오러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말이야.”
-뭐라고 해야 하지... 그래 이건 거짓말이 아니니까...
그래 거짓말 아닌 건 나도 안다고! 그런데 여태껏 알려진 정보에서 나아진 게 하나도 없잖아! 어쩌지... 그렇다고 대놓고 어느 가문 사람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몰락귀족이거나 평민이라도 기사 서임만 받으면 꽤 괜찮을 텐데... 혹시 그 희귀하다는 오러나이트가 되는 건 아니겠지?
지금이야 그라츠 제국이 마나를 연구하며 대대적으로 오러나이트를 양성해서 예전보다는 흔해졌다지만, 그래도 오러나이트는 이 큰 제국에서도 열 몇 명밖에 안 되는 희귀한 존재들이었다.
심지어 그 전에는 한 시대에 한 두 명 정도 있을까 말까한 대단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한명이 지금의 황제였다.
황제님, 와 진짜 다 가진 남자네. 이 큰 제국의 황제에, 그 희귀했던 시절 역대 최연소로 오러나이트가 된 실력에, 얼굴도 끝내주게 잘 생겼다지? 게다가 직접 만나 본 부인은 겁나게 예뻐!
이왕 환생할거면 저런 사람으로 환생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 정도라면 성별 따위 좀 바뀌어도 되는데!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니 어릴 때부터 호의호식하며 자랐겠지? 휴... 부럽다...
아차차, 지금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황제든 황태자든 감히 내가 넘볼 존재들이 아니니 헛소리 하지 말자!
다행히 식사중인지라 대화의 흐름이 잠시 멈춰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정말 멋있어요! 오러나이트 지망이라니... 우와!!”
난 적당한 칭찬을 날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 너무 속물에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어! 난 정말 절박하단 말이야! 그 미친 공주 밑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다고!
“아하하. 멋있기는... 아직 오러나이트가 된 것도 아닌데 뭘. 어릴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맨날 검만 휘둘렀더니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을 뿐이야.”
-일찌감치 부모님이 포기하긴 했지...
푸하핫, 그랬니? 흠... 근데 리일이 정말 그 대단하다는 오러나이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그게 그렇게 개나 소나 되는 게 아닐 텐데... 그래도 마나를 사용하는 걸 보니 영 재능이 없는 것 같진 않아.
마나... 신전이 독점하고 있던 신성력이라는 힘이, 사실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마나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게 제국에 의해 밝혀졌었다. 그게 불과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전 대륙은 파란에 휩싸였다. 신전은 제국에게 등을 돌리고, 진실을 밝힌 제국은 보란 듯이 마나를 이용해 오러나이트와 마법사들을 양성해 냈다.
그리고 그 시류에 동참하기는커녕, 멍청하게도 정면으로 반박하며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게 바로 내 모국 리테인이다. 정말 한심하게도 신전의 주구가 되어 말이지...
“전 리테인 출신이라 아무래도 마나에 대해 생소하거든요. 정말 신기해 보여요!”
“그래? 그럼 리엘도 제국에 머무는 동안 마법을 배워보지 않을래?”
그게 내 맘대로 되냐? 내가 무슨 수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별궁 구석에 처박혀서 하루하루 공주의 눈치만 보면서 사는데!
“저도 정말 그러고 싶어요. 하지만 제 상황이... 그리고 재능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아, 미안. 난 별 생각 없이...”
“괜찮아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배울 수 있겠죠. 그런데 리일이 어릴 때부터 검만 팠듯이, 마법도 그때부터 배워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냐. 마법은 몸으로 하는 검과 달리, 어느 정도 발달한 머리가 필요해서 너무 어리면 오히려 할 수가 없어. 날 때부터 천재가 아닌 이상 말이야.”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리일이, 어릴 때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검만 휘둘렀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적어도 공부를 시키는 게 당연한 집안 출신이라는 거야. 역시 평민은 아니었어.
음훼훼훼훼!!
내 시커먼 속을 모르는 리일은 날 보고 생긋 웃었다. 아, 잘생겼다!!
식사를 마치자 디저트가 나왔다.
“레이디, 차는 어떤 걸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동방에서 수입해 온 차가 궁금하군요.”
“그럼 나도 같은 걸로.”
우리 둘 다 같은 차를 주문했다.
“그 차의 이름이 뭐예요?”
“음, 뭐였더라? 무카...였던가?”
“흐음, 기대되네요! 리테인에서는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요.”
사실 나는 차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게 밍숭맹숭 미적지근한 맛의 물보다는, 강렬한 향의 커피가 훨씬 좋았다.
물론 이 세상에는 없지만 말이다. 전생을 떠올리면 딱 두 가지 생각나는 음식이 커피와 치킨이었다.
아... 치느님... 여긴 왜 없을까. 나중에 귀부인이 되는데 성공하면, 가문의 요리사에게 꼭 시켜야지! 그래, 치느님을 위해서라도 꼭 성공할거야!!
하지만... 커피는 아무리 귀부인이 되어도 영원히 못 마시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꽤나 우울해졌다.
“차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절도있는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익숙한, 그리고 향긋한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이, 이건! 이건 커피였다.!!!
“이게 무카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레이디.”
커피다! 커피야! 더블샷으로 하루 두 잔씩 꼬박꼬박 마시던 그 커피!! 꺄아아아악!
반드시 귀족이 되어야겠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내 눈이 열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리엘, 마음에 들어?”
아차, 너무 정신 못 차리고 탐닉했어.
“음음, 향이 아주 일품이네요. 제가 무카향을 원래 좀 좋아하거든요.”
“어? 벌써 마셔본 적 있나봐?”
-이런, 내가 처음 알려주려 했는데... 아직 리테인에는 없는 차일 텐데...?
무카가 동방에서 수입되어 온 건 얼마 안 된 일이라 했으니, 내 반응이 의아했나 보다.
기특한 녀석. 그래도 마음만은 잘 받을게.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처음 맞아!
“네. 예전에... 아주 오래 전에 참 좋아했었어요.”
별 생각 없이 한 내 대답에, 리일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헉, 그러고 보니 나 아까 분명 마셔본 적 없다고 했는데... 커피향에 너무 신나 실수했어!
“아주... 오래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