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인연의 시작(6)
2016.12.28.
“꺄아악!! 살려주세요!!!”
결국 난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무작정 내달렸다.
“리일!!! 리이이이일!!!!!!”
급한 순간 튀어나온 이름은, 이상하게도 이튼 오라버니가 아닌 리일의 이름이었다.
“살려줘요!!! 리일!!!!”
무서워... 무서워. 도망쳐야 해!!
하지만 불편한 구두에 드레스차림인 내 속도는 결코 빠를 수가 없었다.
“꺅!”
뒤에서 거칠게 당겨지는 걸 느끼며 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주세요! 이거 놔 주세요!”
내 손을 잡아챈 흉물스러운 남자에게선, 술 냄새가 후끈 풍겼다.
“이게 웬 꽃 같은 계집이지? 이 더러운 뒷골목에? 으헤헤헤.... 오늘 봉 잡았다.”
“놔,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으헤헤. 앙칼진 게 제법인데?”
남자는 소름끼치는 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 내 몸에 손대지 마! 나, 난 귀족이야! 함부로 손대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모면하고자, 난 허울뿐인 귀족 신분까지 내세워 보았다.
“흐에? 귀조옥? 그래서 뭐어? 귀족 아가씨가 시녀도 호위도 없이, 이 밤에 여기서 뭐 하는 겨? 그리고 내가 지금 뭔 짓을 한다 한들 나중에 뭘 어쩔 건데?”
어쩌지... 전혀 안 통해. 귀족이 아니라 황족이라 한들,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없으면 똑같구나. 솔직히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으니, 여기서 뭔 일을 당해도 범인을 찾을 수도 없을 거다.
방심한 내 잘못이야... 이 거지같은 세계에서 날 지켜주는 건 단순히 신분이 아니었어. 신분을 이용해 부리는 무력이 필요한 거지... 이곳은 야만과 폭력의 세상이니까.
그래 무력, 눈곱만큼도 없지만 살아나가기 위해선 허세라도 부려야 했다.
“그, 근처에 호위가 있다! 썩 꺼지지 못해!?”
이 말이 조금 먹힌 건지, 남자는 움찔 했다. 하지만 곧바로 비웃음을 날리며 다시 다가왔다.
“푸흐흡! 뻥 치네. 자, 그럼 이제 얌전히 있어라.”
“싫어... 싫어!! 놔!!! 리일!!!!!! 리일!!!!!!!! 어디 있어요!!!”
난 마구 발버둥 치며 저항했다.
“아니 이 계집이!!”
남자의 손이 번쩍 치켜 올라가는 게 보였다. 한 손이 단단히 잡혀있어서 도망갈 수도 없었다.
“꺄악!”
난 몸을 움츠리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곧 있을 일을 예상하며 눈을 꾹 감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었다.
눈을 살짝 떠 보니, 남자가 손을 치켜든 자세 그대로 넘어지고 있었다.
쿵
어, 어떻게 된 일이지? 리일이.. 리일이 구하러 온 건가?
“리엘!! 괜찮아?”
쓰러진 남자의 뒤로 정말 리일이 나타났다.
“리...리...리일!!!!!! 흐어어어엉.... 무서웠어요... 리일!!”
“리엘, 어디 다친 덴 없어?”
난 리일에게 와락 안겨들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댔다.
“고마워요, 리일... 흐으응... 흐흑... 진짜 몹쓸 짓 당하는 줄 알았어요. 이 남자가...”
난 눈물범벅으로 바닥에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다가 흠칫했다. 쓰러진 남자의 뒤통수에는 단검이 깊숙이 박혀있었다.
“다행이야, 늦지 않아서. 아무 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다른 의미로 몸이 덜덜 떨렸다. 이 남자가 범죄자인건 맞는데... 이렇게 그냥 픽하고 죽여 버리는 세상이라니... 여긴 너무 살벌한 곳이었다.
전생이랑 너무 달라서 그 괴리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15년간 저택에만 살 때는 세상 밖에 나오지 않아 전혀 몰랐다. 그냥 옛날이구나 싶었는데...
직접 겪어본 현실이 이럴 줄이야... 조금 전에 막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리일도 새삼 달라 보였다.
“리엘, 괜찮은 거야?”
“..........”
날 안고 있는 이 사람은 조금 전에 사람을 죽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리엘??"
"........"
"리엘!!"
"...네?"
"리엘, 정말 걱정했어. 얼마나 놀랐다고... 갑자기 그렇게 사라지면 어떻게 해!! 정말 큰일 날 뻔 했잖아!”
마구 흔들리고 있는 리일의 눈동자와 내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너머로 당혹스러워 하는 그의 감정이 뚜렷이 들려왔다.
그렇구나. 그 역시 처음 사람을 죽이게 되어 두려워하고 있구나. 게다가 전부 나 때문에 그런 거였는데... 미안해요. 그런 것도 모르고...
사실 죽이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지만, 리일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남자를 죽이게 된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멋대로 뛰쳐나간 것도... 저 때문에 리일이 손을 더럽히게 한 것도... 전부 다 미안해요...”
“아냐, 리엘.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게 되었음에도 리일은 날 원망하긴커녕, 검을 익히는 한 언젠가 한 번은 겪게 되었을 일이라며 스스로 되뇌이고 있었다.
생각이 들려오는 덕에 그를 오해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싶었다.
하지만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자니,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머릿속이 자꾸만 느껴져서 어지러웠다. 안 읽으려 해도 너무 강렬한 감정이라 절로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난 시선을 피하며 거듭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괜찮으니, 일단 밝은 데로 가자. 축제 거리로 다시 나가면 기분도 나아질 거야.”
“네.”
난 가만히 리일의 뒤를 따라 골목을 벗어났다.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난 차원이동녀 같은 게 아니라 환생녀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이니 돌아갈 곳 따위는 없다. 전생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이세상은 너무 무서워...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만드는 신분제도 무섭고, 한걸음만 벗어나면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두운 거리도 무섭고, 지키기 위해선 거침없이 적을 베어버려야 하는 것도 무섭다.
“리엘, 그런데 아까 누구를 찾느라 그렇게 갑자기 뛰쳐나갔던 거야?”
“아, 제 유일한... ”
가족이라고 말하려다 난 잠시 멈칫했다.
오라버니가 날 아직 날 가족으로 생각할까? 여전히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냥... 제 유일한... 음... 유일한 사람이에요.”
오라버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다. 난 적당히 얼버무려 말했다.
“...........그래?”
내 대답에 어쩐지 리일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음? 왜 그러지?
물어볼까 고민하는데, 곧 다시 왁자지껄한 거리가 시작되었다.
“리엘, 기분 괜찮아? 많이 놀랐을 텐데... 조금 쉴까? 아니면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서 기념품을 사러 가요!!”
놀라긴 했지만, 워낙 다이나믹한 굴곡진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난 정말 순식간에 괜찮아졌다.
그리고 황궁에 와서 공주에게 당했던 거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아무 일 없었으니까.
“정말 괜찮은 거야?”
“네! 우리 저쪽으로 가요!”
복작이는 가판대 지역을 벗어나 조금 한산한 거리로 나간 우리는, 기념품을 팔고 있는 상점을 샅샅이 훑었다.
귀족이 쓸 만한 고급품들은 아니었지만, 어두운 밤거리에서 보니 꽤 그럴듯했다. 특히 노르스름한 마법 조명을 받은 악세사리들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리일이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유난히 쳐다보고 있던 머리핀을 들어올렸다.
“이걸 다오.”
“리일, 괜찮은데...!”
말릴 새도 없이 값을 치른 리일은,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직접 머리에 꽂아 주었다.
두근...
리일, 이렇게 친절하지 마. 나 그렇게 좋은 사람 아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수한 소녀도 아니고...
“마음에 들어 했잖아. 안 좋은 일도 잊을 겸...”
“..........고마워요. 자꾸 받기만 해서 미안해서요. 몇 번이나 구해주고, 저녁도 사주고 선물까지... 아, 그리고 운하에서 빨래했을 때도 리일이 도와줬네요.”
그때를 생각하니 정말 픽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웃겨 보였을까. 그리고 그때 리일이 재빨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까다로운 귀족 나으리한테 걸려서 된통 혼났을지도 모르지...
“별 것도 아닌데 뭘.”
별 것도 아니라니... 리일에게는 지금의 이 모든 것도, 별 것 아닌 그냥 하룻밤 데이트인 걸까...?
내 복잡한 눈빛을 읽은 건지, 리일은 서둘러 변명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읽는 능력은 내가 아닌 리일에게 있는 듯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리엘.. 오해하지 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별로 해 준 것도 없으니 부담스러워하지 말라는...!”
......난 더 미안해졌다. 넌 왜 그렇게 속도 없이 좋은 녀석이야?
“네...”
내가 자꾸 침울하자 분위기는 점점 어색해졌다. 그 어색함을 환기시키기 위해 리일이 화제를 애써 돌렸다.
“리엘! 나도 기념품 사줘야지!”
“아, 그러네요. 미안해요, 받기만 하고 까맣게 잊어버릴 뻔 했어요. 뭐가 갖고 싶어요?”
“음... 글쎄? 리엘이 골라주는 거면 아무거나 다 좋아.”
-비싼 거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기념이 될 만한 거면 좋겠는데...
왠지 더 부담된다. 난 매의 눈으로 꼼꼼하게 가판대를 훑었다.
“.......이건...?”
“아가씨 눈이 높네! 그거 아주 크게 될 장인이 만든 거야. 지금은 유명하지 않지만, 안목과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내가 집어든 건, 별 모양의 자그마한 촛대 세트였다.
은색의 별은 아주 앙증맞고 귀여웠다. 가운데 동그랗게 홈이 파여 있는데, 이곳에 납작한 초를 끼워 넣으면 되는 것 같았다. 마침 두개가 한 세트라 딱 보기 좋았다.
“리일, 이거 어때요? 오늘 밤하늘에서 본 불꽃놀이도 생각나고... 그리고 저 원래 별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별이라... 예쁘다. 나도 좋아해!”
“그럼 이걸로 할까요?”
“응! 아주 마음에 들어! 방에 꼭 장식해 놓을게!!”
그 모습을 생각하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커다란 남자애가 앙증맞은 별 촛대 두 개를 들고 가서는 방에 소중히 놓아둔다니...
풉... 귀엽잖아!
“푸훗... 하하하. 리일,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으응? 정말? 내가 귀엽다고? 정말? 진짜로?”
“왜, 왜 그렇게 놀래요? 남자에게 그런 말 실례인가요? 혹시 나한테 처음 들어요?”
“아, 아냐! 실례긴! 그냥 조, 좋아서..!!”
-나도 드디어 나 귀엽다고 해 주는 여자가 생겼어!!!
뭐? 그게 그렇게 좋은가 싶었다. 다 큰 남자애가 참 순진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서로 나이도 모르는 구나?
“좋다니 다행...인데.... 하하하... 근데 리일 몇 살이에요?”
얘 알고 보니 키만 크지 엄청 어린 거 아냐? 왜 이렇게 순진하지?
“나? 내가 말 안했나? 16세인데?”
“어? 나랑 똑같네요?”
“우와! 정말? 역시 우린... 조심해!!!!”
리일은 말하다 말고 깜짝 놀라며 나를 확 끌어당겼다.
휘익
내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말 한 마리가 스쳐지나갔다.
“리엘! 괜찮아?”
“...............하아...하아... 네... 괜찮아요. 조금 놀란 것 빼고는요.”
어떤 미친놈이 길 한복판에서 쏜살같이 말을 몰고 지나갔다. 미처 보지 못한 난, 까딱 잘못하면 말에 치여 죽을 뻔한 것이었다.
이곳은 정말 무섭구나. 뭐 걸핏하면 죽을 위기야? 리일이 날 대체 몇 번이나 구해준 건지... 정말 평생 모시고 살아도 부족한 판이네.
내 무사함을 확인하자, 리일은 뒤늦게 분통을 터트렸다.
“감히 무엄...! 흠흠... 대체 누가 이렇게 위험하게 말을 모는 거야!!”
무언가 버럭 외치려던 리일은, 화급히 입을 다물고는 딴청을 피웠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도 급급했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전 괜찮아요. 리일 정말 고마워요. 매번 리일의 도움만 받네요.”
“도움이라니, 별 소리를...”
“저, 리일... 그런데... 저 좀...”
지금 난 리일에게 반쯤 안겨있는 자세였다. 리일이 내 허리에 팔을 감고 끌어당겼던 자세 그대로 말이다.
“...........”
이 정도 말하면, 아까 손 놓아 달라 했을 때처럼 화들짝 뗄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리일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리일... 이거 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