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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6화 (16/134)

16. 인연의 시작(7)

2016.12.28.

키, 키스 하려고...!?

다가오던 그는 망설이는 듯 주춤 멈춘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코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치자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댔다. 이러다 밖에까지 소리가 들리겠어!

난 당황해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아니, 키스할 거니까 눈을 감아야 하는 건가?

눈을 감자 내 허리를 받치고 있는 탄탄한 팔 근육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이렇게 허리를 끌어안아 구해주었지...

멧돼지에 치여 죽기 직전, 한 손으로 내 허리를 잡아채서 말 위로 훌쩍..! 팔 힘 진짜 센가 보다... 아, 내 로망인데...

“리엘...”

아차, 내가 눈앞에 실제를 두고 무슨 망상을...! 날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와, 난 다시 리일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너무나 선명한 그의 생각이 들려왔다.

-내 심장이 정말 왜 이러지...?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마음을.

“.............”

나 어쩌지.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내가 뭐라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에게 안겨서 꼼짝도 못하는 상태 그대로, 리일의 얼굴이 이제 정말 코앞에 위치하고 있었으니까.

난 그저 눈만 커다랗게 뜨고 굳어버렸다.

주변의 소리가 뿌옇게 변하고,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시간이 아주 느릿하게 흐르는 느낌이었다.

스칠 듯 닿아온 입술이 막 겹쳐지려는 순간...

“이것들이! 물건을 챙겼으면 돈을 내야지! 촛대 날름 가져간 주제에 돈도 안 내고 어디서 연애질이야!!”

분위기 와장창 깨는 상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그러고 보니 막 돈을 내려던 차에, 귀엽다고 꽁냥대다가 말에 치일 뻔 했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놈의 상점주인, 분위기 파악 못하나!!? 우리가 이대로 불붙어서 돈도 안내고 그대로 모텔로 슝 사라질까 걱정됐어?

어, 또 생소한데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아무튼! 산통 다 깨졌네!!

“흠흠, 얼마죠?”

리일도 못마땅한 듯 주인을 노려보았지만, 난 얼른 정신 차리고 지갑을 꺼냈다.

“하나에 5실버야! 두 개니까 10실버!”

10실버... 고가의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민인 내게 은근 부담되는 가격이었다.

몇 달 동안 하녀로 일하며 봉급을 받아보니, 이 세계 화폐가치가 대충 감이 잡혔다. 1실버는 대충 전생으로 따지면 만 원 정도랄까? 1골드는 100만 원 정도고.

전생의 기억이 뚜렷하진 않은데, 돈 개념은 왜 이렇게 잘 생각나는지... 나 엄청 돈에 벌벌 떨고 살았나 봐.

아무튼, 10만 원 정도면 사실 귀족에게 있어 정말 푼돈이다. 근데 난 서민이라고 흑...

하지만 목숨 값으론 정말정말 싼 거라서, 난 오히려 리일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아무리 가난하다지만, 최소 0을 하나는 더 붙인 걸로 선물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솔직히 아까 밥값만 해도 한 명당 1골드는 했을 텐데...

“리일, 정말 이런 걸로 괜찮겠어요?”

“응! 아주 마음에 들어! 정말 고마워!!”

그가 마음에 들어 한다니, 난 미안해하면서도 값을 치루고 그에게 촛대를 건네주었다.

“제가 더 고맙죠. 그럼 잘 간직해 주세요.”

다시 분위기 묘해질까봐, 나는 얼른 리일을 데리고 상점가를 벗어났다. 벌써 밤이 꽤 깊었는지, 거리는 아까보다 조금 한산해져 있었다.

“리일, 저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벌써 시간이...”

“번개처럼 흘렀네. 아쉽게도 벌써...”

리일도 상당히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나 역시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워서 영 발걸음이 미적대고 있었다.

오늘 하루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내 인생에 있어, 하룻밤 꿈처럼 달콤한 시간이었다. 아, 정말 돌아가기 싫다. 별궁이 꼭 지옥소굴처럼 느껴져...

가기 싫은 마음에 아주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잠깐!”

나 부른 건가?

“네? 저요?”

“그래, 아가씨. 점 한번 보고 가지 않겠어?”

“네?”

이런 건 십중팔구 사기가 분명했기에, 난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러나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들려오는 말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묘한 능력을 가졌네? 기억도 꽤 여럿 중첩되어 있고?”

“.....!!!!”

뭐, 뭐야, 설마 정말 뭐 아는 거야?

에이, 그냥 아무 말이나 던져본 거겠지? 그래, 별자리 생일 점처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도록 적당히 두루뭉술 하는 그런 말일 거야.

난 놀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무시하려 했다.

“아가씨가 원하는 인생, 결코 쉽지 않을 거야. 영 팔자가 순탄치 않아 보이는데, 액땜하는 셈 점이나 보고 가시우. 거기 옆에 있는 도련님도 같이 앉아 보소. 둘이 애인 맞제?”

........그래, 밑져야 본전. 얼마 하지도 않을 테니 그냥 재미삼아 보자.

“리엘, 재밌겠다. 한 번 해 보자.”

리일은 애인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입이 귀에 걸려 재빨리 의자에 앉았다.

“어허... 아가씨 팔자만 복잡한 줄 알았는데... 쯧쯧. 이 도련님, 부모 마음에 대못을 박겠구먼!? 둘이 쉽지 않을 거야.”

역시... 리일이 꽤나 있는 집 자식이라, 부모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뜻이겠지?

“집안의 반대가 심할 거라는... 뭐 그런 뜻인가요?”

“에잉..! 그렇게 고리타분한 전개면 내가 그런 말 하겠수? 단순히 그렇다기 보다는... 거참, 일이 복잡하구먼. 서로 좋아할 거면 각오 단단히 하게나!”

“...........”

밑져야 본전이 아니었어. 제길, 괜히 초치는 소리나 듣고!

옆을 보니 리일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리엘, 가자!”

리일은 대충 복채를 꺼내놓고는, 벌떡 일어나 나를 끌고 갔다.

그런 우리 뒤로 점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로 진심이라면 힘들지만 극복할 수 있을 걸세!”

그런 말 누가 못해! 아 괜히 기분만 잡쳤다.

순식간에 하루가 다 끝나버렸다. 중간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정말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법한 축제의 밤이었다.

“리일, 오늘 고마웠어요. 정말 다 너무 즐거웠어요.”

“나야말로! 너무너무 신나고 행복했어. 벌써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라니 아쉽다...”

황궁 쪽문 앞에서 우린 짧은 밤을 아쉬워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게요. 그래도 출입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이젠 정말 들어가 봐야죠.”

“그래... 얼른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갈게.”

리일은 나를 쪽문으로 들여보냈다.

어, 그러고 보니 리일은 같이 안 들어가는 건가? 황궁에서 살지는 않는 건가?

사실 난 기사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황궁 내 기사단 숙소에서 먹고 자고 하는 건지, 아니면 제도의 자택에서 출퇴근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른다.

“리일은요?”

“아, 난 방향이 달라서... 먼저 들어가. 배웅해줄게. 황궁 안쪽은 위험할 일 전혀 없을 거야. 별궁까지 가는 길은 알지?”

“네. 걱정 말아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다음에 또 만나요! 오늘 정말 좋았어요!!”

“나도!! 우리 또 볼 수 있을 거야!!”

***

그날의 하루는 정말 하룻밤의 꿈이었던 것처럼, 돌아온 나의 일상은 여전했다.

다시 보자던 리일은 그 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애초에 내가 리일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기에,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아...”

공주는 언제나 그렇듯이 늘 히스테리를 부리고, 간간히 그 불똥은 멀리 떨어진 나에게까지 튀었다.

모국출신 하녀들은 여전히 나를 미워하고 있다. 낸시 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건지 대놓고 날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그 은근한 따돌림은 정말 짜증났다. 그래도 그럭저럭 참을 만 했다.

“나쁜 놈! 또 볼 수 있을 거라며!!”

난 다림질거리에 분노를 팍팍 발산하며 화풀이를 했다.

“내 인생에 봄날은 대체 언제 와!?”

콰당

“리에엘!! 그 소식 들었어?”

"뭐?“

“검술대회 말이야!”

“뭐? 검술대회?”

“응응!!”

아아앗! 이거였어? 우리가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게!? 리일은 아마도 기사일 테니까, 대회에 나오겠지? 꺄아아악!!!

“언제? 언젠데?”

“다음 주!! 우리 꼭 가보자!! 예쁘게 옷 입고 구경 가서, 기사님들에게 레이디로 선택받아 꽃을 받는 거야!! 꺄아아악! 상상만 해도 설레!!”

“당연하지!!!! 으아아아아 너무 기대된다!!!”

저번에 못 다한 키스! 꼭 하는 거야! 내가 키스 한 방에 흐물흐물 녹여서, 이 몸만을 바라보는 사랑의 노예가 되게 해 주지!

기다려라 리일!!!

낚여라 리일!!!!!

***

난 검술대회 일주일 전부터 들떠서 신나게 데이트 갈 준비를 했다. 데이트... 맞지? 리일을 보러 가는 거니까!

“룰루... 꽃단장... 꽃단장!!”

노래를 흥얼거리며 장롱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장롱이 열린 속도만큼 급속도로 굳어버렸다.

“옷이... 한 벌 뿐이었지...”

어쩌지. 지난번과 똑같은 옷을 또 입고 만나긴 싫은데... 새로 사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난 금방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난 번 축제 때 상점 앞에서 본 옷 가격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네킹에 예쁘게 걸려있던 원피스는 무려 내 한 달 치 월급이었다. 그렇다고 그 옷이 귀족들의 옷도 아니었다.

귀족들을 상대로 하는 고급의상실이라면, 절대 그렇게 가격이 내걸려 있지 않을 테니까. 아마 그냥 부유한 평민들을 위한 옷이겠지...

이곳에서 옷은 대단한 사치품이다. 저렴하게 사도 괜찮은 원단과 색상이 보장되는 전생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서민들의 옷은 딱 봐도 옷감이 거칠고 색이 칙칙했다.

조금 괜찮은 옷도 저 정도 가격인데, 귀족 영애의 드레스를 사려면 대체 얼마가 들어갈지 짐작도 안 갔다.

제도의 물가가 어마어마하다는 것 까지 감안하면, 과연 내가 죽기 전에 사 볼 날이 있을지...

“헤유...”

“리엘, 왜 그래?”

“옷이 없어...”

“왜? 가문에서 왕궁으로 보내질 때 입었던 옷 없어?”

“그건 이미 한 번 입었거든... 진짜 귀족 영애라면, 한 번 입은 드레스를 절대 또 입지는 않을 텐데...”

사실 리일은 늘 대충 아무거나 입고 다니니까, 내 옷차림 따위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내가 안 괜찮아! 이건 자존심의 문제라고!

“근데 어차피 아무도 모를 거 아냐."

“그게... 사실 내가 지난 번 축제 때 어느 기사님과 만났었거든? 근데 이번 검술대회 때 또 마주칠 거 같아... 그래서 똑같은 옷을 입기 부끄러워서...”

“뭐어어? 정말? 기사님과 데이트으으으으? 왜 나한테 말 안했어!?”

줄리는 아주 방방 뛰었다. 저러다 머리로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데, 데이트 까진 아니고... 그냥 뭐...”

아니, 데이트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근사한 곳에서 저녁 먹고, 서로 선물도 주고 받고... 음 누가 봐도 데이트네. 으앗, 그러고 보니 키스도 할 뻔 하고! 으아아악! 연애점도 봤어! 결과는 좀... 그랬지만... 이거 지금 보니 빼박 데이트인데?

“우와, 리엘 빠르다. 언제 기사님을 낚은 거야?”

줄리는 그날 근무였던지라, 내 꿈결 같던 하루에 대해 전혀 몰랐다.

“아직 낚은 건 아냐!!”

“아무튼, 호호호 잘됐다! 아무튼, 그럼 이렇게 하자!”

“응? 어떻게?”

“나도 가문에서 나올 때 입고 온 옷이 한 벌 있잖아. 나랑 바꿔 입자!!”

“정말? 정말정말?”

“응, 우린 체형도 거의 비슷하니까 괜찮을 거야! 그리고 그 기사님이 널 쳐다보지 날 유심히 보겠어? 내가 입은 옷이 예전의 네 옷인 줄도 모를걸?”

“줄리!!!! 정말 고마워!! 정말정말 너무 고마워!! 꺅!!”

***

그렇게 만사가 다 잘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콰당!

“리엘, 리엘!! 큰일났어!”

“왜?”

“어떡해... 그 날 휴가 내겠다는 하녀들이 한 두 명이 아니래!!”

“뭐어어?”

으악, 나 바보!!! 왜 이 생각을 미리 못 했지? 하녀란 하녀들은 몽땅 그 날 휴가를 신청할 텐데, 무슨 수로 그 경쟁률을 뚫고 가!?

어떡하지? 무조건 나가야 하는데! 이럴 때가 아니면 내 쪽에서 리일을 만나러 갈 방법 없단 말이야!! 날 잊기 전에 콱 물어놔야 하는데!!

“어떡하지 리엘?”

으음........... 으으음... 어쩌지... 머리 굴려! 생각 좀 해 내!!

아!

“...........줄리!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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