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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8화 (18/134)

18. 정체(2)

2016.12.29.

“응? 황태자 전하?”

"그게..."

"황태자 전하 뭐?"

“아니다. 아냐 아무것도.”

흐음... 아무것도 아니라 하기엔 눈빛이 영 심상치 않은데...?

줄리의 생각을 읽어볼까 하다가, 미안한 짓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줄리만큼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도 또 없으니, 진짜 별 거 아니겠지 싶었다.

아! 혹시 그건가?

“왜? 줄리 너도 빠순이 하게?”

“뭐? 뭐야 그게?”

“팬클럽 말이야.”

“아냐 그런 거. 에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자자. 나 씻고 올게. 먼저 자!”

***

매일같이 반복되는 하루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잘 흘렀다. 오늘 역시 내 비슷비슷한 하루 중 하나였다.

“리엘, 공주저하 침실의 패브릭들을 교체해야겠구나. 이제 봄기운이 완연하니 밝은 색상으로 바꾸어 두거라.”

“네, 하녀장님.”

특별히 새로 맞추라는 명령이 없었기에, 난 작년 봄에 사용했다는 패브릭들을 찾아 정성스럽게 다렸다. 그리고 공주가 외출한 틈을 타 교체하러 들어갔다.

에구구 끝도 없이 많네...

쿠션, 커튼, 휘장, 침대 러그, 테이블매트 등등 색상 교체를 해야 하는 것들이 산더미였다.

성질 더러운 공주년 방을 봄 분위기 나도록 산뜻하게 꾸며주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힘없는 내가 뭘 어쩌겠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난 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일했다.

그러던 중 커버를 벗기기 위해 침대 위의 헤드쿠션을 집어 들다가, 무언가를 툭 떨어트렸다.

“헉”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작은 액자 하나가 뒤집힌 채 놓여 있었다.

자기 물건을 망가트리는 걸 어마어마하게 싫어하는 공주인지라, 난 화들짝 놀라 집어 들었다.

아씨, 왜 액자를 쿠션 밑에 두고 자는 거야! 프레임 나가진 않았겠지? 근데 베개 밑에 웬 액자야?

얼핏 뒷면에 쓰인 글자를 보건데, 황태자의 초상화인 것 같았다.

허이구, 오매불망 기다리다 못해 안고 자는가 보네? 너도 짠하다. 단단히 반했구나...

난 액자가 무사한지 살피려 앞쪽을 확인해 보려 했다.

막 뒤집어 보려던 차에,

벌컥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예서 뭐 하는 게냐!!”

공주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빠르게 걸어왔다.

타악

내 손에서 액자를 낚아챈 공주는, 반대편 손으로 내 얼굴을 있는 힘껏 후려쳤다.

짜악!!

난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대다니!!”

공주의 분노에, 난 허둥지둥 발치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아닙니다!! 공주저하. 침구류를 교체하다가 액자가 바닥에 떨어져 있기에 주워 놓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닥쳐라! 저 년을 당장 끌고나가 사정없이 쳐라!”

하녀 둘이 내 양팔을 붙들고 날 강제로 일으켰다.

“공주저하! 잘못했습니다! 정말 건드리려 한 게 아닙니다!!”

“시끄럽다!!”

짝!! 짜악!

고개가 좌우로 사정없이 꺾였다.

***

난 정말 아무 잘못한 게 없는데, 그냥 공주가 기분 안 좋던 차에 눈에 띄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정없이 맞았다.

하녀들한테 끌려 나가 뺨을 얼마나 맞았는지, 이제 얼굴이 아프다 못해 느낌도 없다.

내 예쁜 얼굴, 붕어처럼 부어있겠지? 입술도 다 터졌는지 피 맛이 비릿했다.

울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눈물이 자꾸만 나왔다. 난 베개에 얼굴을 묻고 구슬프게 울었다.

정말 벗어나고 싶다. 이 거지같은 신분.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지? 그런데도 이게 그래도 아주 괜찮은 처지라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리테인으로 돌아가 어딘가 귀족가에 하녀로 들어가면,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부려먹히겠지? 귀족 아가씨들 성질 지랄맞은 건 어디나 다 비슷할 테니, 그래도 복지라도 좋은 제국이 그 중 가장 나은 곳이다.

“흐흑...”

나도 귀족하고 싶어. 가짜 말고 진짜 귀족... 존중받고 싶고, 대우받고 싶어. 함부로 대해지는 비천한 존재인 거 지긋지긋 해.

이 넓은 세상에서 날 귀하게 대해준 건 오직 단 두 사람이었다. 이젠 연락도 끊긴 이튼 오라버니, 그리고 리일...

똑똑똑

“리엘, 나야. 약을 가져왔어!”

아, 서로 의지가 되어주는 줄리도 있었지. 그렇게 나쁜 인생만은 아닌가?

“줄리, 고마워!”

너무 생각에 빠져있었더니, 아픈 것도 잊고 있었다. 약을 보자 다시금 뺨이 후끈후끈 아파졌다.

“내가 발라줄게. 아유, 정말 심하게 맞았네. 공주저하는 정말이지... 다른 애들도 수도 없이 맞았다더라. 괜히 기분 나쁘신 날 눈에 띄면 어쩔 수 없어.”

“......그러게. 정말 비참하네. 우린 뭐 분풀이 대상인가...? 근데 공주저하가 요즘 왜 이렇게 유난히 기분이 안 좋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듣기로는 축제 때문인 것 같아. 사냥대회에서 황태자 전하를 만나겠다고 기껏 차려입고 들떠서 나갔는데, 그림자도 못 보고 돌아왔다지 뭐야?”

“벌써 한참이나 지났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안 좋아?”

“응. 게다가 며칠 전 검술대회에는 황태자 전하가 안 나온다기에 안 가봤을 텐데, 거기엔 떡 하니 전하가 오셨으니 더 화가 나셨나봐...”

에이씨. 황태자 놈 인생에 도움이 안 돼, 도움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 같으니라고!

“에휴... 팔자가 참 서럽다. 같은 인간인데 누군 시중이나 들며 화풀이 당하고...”

“리엘!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큰일 나!!”

“알아. 네 앞이니까 말하는 거지.”

공주년, 내가 언젠가 반드시 네년 위로 올라가서 전부 되갚아 줄 거야!

난 이를 빠드득 갈며 맹세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어떻게 올라가냐고!! 그나마 희망의 끈이었던 리일은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차라리 그 딜런인가 달러인가 하는 기사님을 잘 공략해볼까?

검술대회에서의 일이 있은 후, 난 딜런을 내 어장목록에 잽싸게 추가해 놨었다.

하지만 제국하녀들에게 이리저리 캐 본 결과, 딜런의 가문인 허드슨 백작가는 꽤나 유명한 집안이었다. 아... 쉽지 않겠구나.

장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백작가 정도면 후계랑 상관없는 막내아들이라 하더라도 허들이 꽤 높을 테니까...

그리고 허들과 상관없이, 어디서 어떻게 또 만나냐고!? 그 후 연락도 없는데..! 젠장, 역시 외국인 노동자 하녀는 별로라는 건가? 내가 리테인에서 유학 온 아카데미 학생만 되었어도 달랐을까?

휴... 의미 없는 가정이구나. 어차피 난 하녀니까.

답답한 마음에 밤새 이리저리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결론만 났다.

***

공주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든 간에, 불쌍하게도 난 그녀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다.

무엇보다 별궁은 가장 중요한 행사인 공주 탄신일 연회를 앞두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무리 이역만리 타국에 떨어져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공주라지만, 그래도 왕족인 이상 생일을 허투루 넘길 리가 없었다.

그리고 별궁에 딸린 우리들에게 있어 이보다 더한 악재는 없었다. 공주의 생일 준비로 난 몇 주 내내 분주해졌고, 매일같이 파김치가 되도록 시달렸다.

먼 놈의 생일파티 한 번 하는데, 온 궁의 인테리어를 싹 바꾸는지...

그리고 드디어 대망의 연회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드레스 다림질, 테이블보와 냅킨 세팅으로 바빴던 나는, 저녁이 되자 반쯤 실신해서 방에 처박혔다.

“휴.. 그나마 요리부가 아니라 다행이지... 그쪽이었으면 밤새 음식을 해 나르느라 반쯤 죽었겠지...? 에구구...”

피곤하니 일찍 자려고 난 서둘러 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연회는 밤늦게까지 계속될 테고, 다림질 및 린넨류 담당인 내가 할 일은 별로 없다. 물론 내일이 되면 산더미 같은 다림질거리가 쏟아져 나오겠지만 말이다.

피곤한 몸은 물먹은 솜처럼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리엘, 리엘. 어서 일어나서 나와 봐!”

“으응? 줄..리? 왜...?”

한참 꿀 같은 잠을 자는데, 줄리가 흔들어 깨웠다.

“공주저하가 난리가 났어!”

“....뭐?”

난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설마 뭐 나에 대해 트집잡을 게 생겼나 싶어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잘은 모르겠는데, 하녀들을 다 데리고 오라면서 화를 내고 계셔.”

후다닥 일어나서 하녀복을 갖춰 입고 1층의 홀로 내려갔다. 줄리의 말대로 모든 리테인 출신 하녀들이 일렬로 서 있었다.

잠시 후 공주가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뒤에는 제국에서 붙여준 시녀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어째서 안내하지 못하겠다는 게냐!!”

“저하, 죄송합니다만 예법 상 저하께서 먼저 황자 전하의 처소에 방문하실 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발로 찾아가겠다는데, 감히 네년들이 나를 막겠다는 것이냐!!”

공주는 막 파티장을 박차고 나온 건지, 화려한 드레스 차림이었다.

“저하, 제국의 법도상 안면을 처음 트기 전에는, 아랫 신분이 윗 신분을 먼저 찾아갈 수 없습니다. 황자 전하와 한 번이라도 얼굴을 마주하신 후에야...”

짝!!

“닥쳐라!! 여기 처박혀서는 얼굴을 뵐 수가 없지 않느냐!! 그러니 얼굴을 마주하러 내가 직접 가겠다는 게다!!”

“하지만 공주 저하, 예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하, 생일이라 꽤나 기대했을 텐데, 황태자는 여전히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으니 공주가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길길이 날뛰며 파티장을 뛰쳐나와 직접 찾아가겠다고 난동을 부리고 있는 거고...

하지만 제국의 시녀들이 공주를 황태자에게 안내할 리가 절대 없다.

“당장 앞장서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하.”

공주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었다. 아까 홧김에 시녀의 뺨을 후려쳤지만, 저 시녀는 무려 제국의 귀족이다. 그리고 말이 좋아 시녀지 사실상은 감시에 가까운 존재였다.

시녀에게 한 손찌검이 전부 다 보고 될 테니,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면 함부로 대하기도 쉽지 않을 거다. 그러니 맨날 죄 없는 우리들에게만 화풀이하는 거고...

“좋다. 안내해주지 않는다고 내가 못 갈 것 같으냐? 너희들! 전부 따라오너라!”

미친. 이래서 우릴 죄 불러 놓은 거야? 시녀들이 호락호락 따르지 않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우리들이라도 끌고 가려고?

공주 체면에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갈 수는 없으니까, 초라해 보이지 않으려고 우릴 싹 다 줄줄 긁어모은 거네.

에라이 미친년아. 성질머리가 그러니까 황태자가 싫어하지!!

“어서 따라오지 않고 무엇 하느냐!!”

어쩔 수 없이, 자다가 날벼락 맞은 기분으로 우리는 급작스레 공주의 뒤를 따라 황태자 처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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