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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20화 (20/134)

19. 정체(3)

2016.12.30.

"공주 저하!"

"가시면 안되옵니다!!"

하지만 시녀들은 공주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기에 발만 동동 구를 뿐, 그녀가 나가는 걸 말릴 수는 없었다.

***

시녀들이 완강히 버티며 마차도 준비해주지 않았기에 공주는 씩씩대며 걸어갔다. 뭐 어차피 마차가 있었어도 우리는 뒤따라 걸어갔을 테니 상관없었다.

자다 깨서 봉변을 당한 셈이지만, 난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공주가 저렇게 패악을 부린다는 사실이 이참에 본궁에 알려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이야 흥분한 나머지 제국의 시녀들에게 손을 대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성질만 부릴 뿐 차마 때리지는 못 했다.

우리 하녀들에게 화풀이를 할 때도 세가 강한 가문의 진짜 영애들은 절대 건드리지 않고, 나처럼 힘없고 빽없는 애들만 골라서 때렸으니까. 그것도 시녀들 안 보는 데서만!!

공주가 머리는 나쁘지만 갑질하는 노하우는 정말 타고 난 것 같네... 교묘하게 힘없는 자들만 골라 괴롭히고 말이야.

그러니 감시역인 시녀들은, 그저 공주의 성정이 불같이 사납다고만 보고했을 테고 당연히 본궁에서도 잘 모르겠지. 에휴...

그래! 그러니까 차라리 황태자 처소에 가서 우리들한테 성질부리고 때리다 들켜라!!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걸 보니 파티에서 마신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은데, 더 미친 짓을 해 버려!!

열심히 걷다 보니 어느새 황태자의 처소가 있는 본궁의 동관에 이르렀다.

동관은 본궁과 연결된 건물이지만, 별도의 정원과 출입구를 가진 반 독립적인 공간으로 황태자 혼자 사용한다고 들었다.

“멈추십시오. 이곳은 황자 전하의 처소입니다.”

공주가 동관에 들어서려는데, 입구를 지키던 임페리얼 가드들이 창을 교차하며 가로막았다.

“건방지다! 난 리테인 왕국의 공주다! 전하를 뵈러 왔다. 당장 비키지 못하겠느냐!!”

“죄송합니다. 공주 저하. 하지만 허가받지 않는 외부인을 전하의 허락 없이는 들일 수 없습니다.”

“외부인이라니!! 난 전하의 약혼녀 신분이다!!”

착각은 자유라더니, 약혼녀가 아니라 약혼녀 후보겠지.

“전하께서는 지금 처소에 안 계십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노골적인 문전박대에 공주는 부르르 떨었다.

“시종장을 불러 와라! 내가 왔다고 당장 전갈을 넣어라!!”

잠시 후 시종장이 불려 나왔지만, 역시 기사들과 똑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전하께서는 현재 처소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먼저 방문하시는 건 예법에...”

“이익...!! 네놈들이 감히 나를 기만하려 드는 게냐!!”

“아닙니다. 정말로 출타중이십니다.”

“이 밤중에 대체 어디를 가셨다는 게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 안으로 안내해라.”

우와, 자존심도 없나봐.

“공주 저하. 송구합니다만... 전하의 허락 없이는 안으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

분노로 부들부들 떠는 모습이, 멀리 떨어진 나에게까지 보일 정도였다.

황태자가 공주를 만나지 않겠다고 얼마나 신신당부해 두었으면, 시종들이 저렇게까지 완강히 버티는 걸까.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깨소금이었다. 물론 그 불똥이 나한테 튀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난 다른 하녀들과 함께 허리를 숙인 채 힐끔힐끔 상황을 지켜봤다.

이제 공주가 어떻게 나올지 매우 흥미진진해졌다. 설마 공주씩이나 되어 가지고 정원 한복판에서 서서 기다리지는 않을 테고...

“감히...감히 네놈들이 나를 능멸하느냐!!”

일단 공주의 선택은 지랄발광이었다.

한참 소리소리 지르며 난동을 부리던 공주는, 지가 생각해도 길바닥에서 기다리는 건 좀 모양새가 아니었는지, 휙 몸을 돌렸다.

“네놈들을 반드시 기억해 두겠다!”

우리들 역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뒤를 따랐다.

“너희들은 여기 남거라!”

으잉? 공주야,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런 거 아니지?

“여기 남아서, 전하가 오시면 내가 기다린다고 말하고 모시고 오거라. 반드시 모시고 와야 한다! 전하를 모셔오기 전까진, 거기서 단 한 발자국도 꼼짝도 해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느냐!!?”

“......”

우리는 차마 반문도 못한 채 모두 벙쪄 버렸다. 공주는 우리가 황당해하든 말든, 자신의 측근하녀 몇 명만 데리고 빠르게 떠나버렸다.

“저, 저하!”

시종장 역시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으로 뒤늦게 공주를 불렀다. 하지만 공주는 이미 쌩하고 가버렸다.

“..............”

시종장이 공주의 명을 마음대로 무시하고 우리를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주의 말을 무시하려면 공주보다 신분이 높은 누군가의 명령이 필요한데, 이 밤에 어디다 알리고 도움을 청하겠는가.

그렇다고 주인인 황태자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를 안으로 함부로 들일 수도 없으니 난감할 것이다.

“이 일을 어쩐다...”

시종장은 당혹스러운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뭐지 이거...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더러운 성질머리를 들키게 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이건 너무했잖아!!

어이가 없었지만, 이대로 무시하고 궁에 돌아갔다간 모두에게 날벼락이 떨어질 건 확실했다. 살려면 적어도 노력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는 공주의 명 그대로, 정원에서 하염없이 황태자를 기다렸다. 대기하는 하녀의 기본 자세인 허리를 살짝 30도 굽힌 자세로...

허리는 끊어질 것 같이 아팠고, 공기는 싸늘했다. 아무리 봄이라도 밤에는 추운 게 당연했다. 게다가 자다가 갑자기 불려나왔으니, 우리는 당연히 외투 하나 안 입고 나온 상태였다.

“이만 됐으니 그만 별궁으로 돌아가도록 하게나.”

우리가 너무 불쌍했는지, 시종장이 나와서 황태자가 정말로 여기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해주었다.

“...........”

하지만 선뜻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서로 눈치만 보았다.

“내가 공주저하께 잘 말해주겠네. 전하께서 새벽에 돌아오셔서, 이 모습에 역정을 내며 자네들을 쫓아냈다고 말이네.”

제 하녀를 어떻게 부리든 제 맘이긴 한데, 시종장이 보기에도 이건 진짜 너무하다 싶었나 보다.

“............”

“마음 같아서는 안에 들이고 싶으나, 그건 내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라네. 전하께서 설마하니 가엾은 하녀들에게 선처를 베풀었다고 역정을 내시진 않겠지만...”

- 하필이면 워낙 싫어하시는 공주의 일이니...

눈이 마주치자 그의 생각이 훅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황태자가 성격이 더럽진 않은 모양인데... 정말 공주를 어지간히도 싫어하나 보네? 근데 공주를 만난 적도 없고 실체를 알지도 못하는데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듣기로는 제국에 왔을 때부터 엄청 싫어했다는데...

아무튼 시종장은 이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를 들이기를 망설이는 것 같았다. 마음대로 들였다가 이걸 빌미로 한 번이 두 번 되고, 점점 그렇게 공주가 밀고 들어올 여지를 줄까봐...

“자, 그러니 그만 돌아들 가게나.”

“...........”

하지만 우리는 뒷일이 무섭다고! 우리는 모두 오도가도 못 하고 우물쭈물 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역시 공주 저하의 명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만히 기다리겠습니다.”

그나마 좀 강단 있는 캐럴이 대표로 말했다. 시종장이 그걸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듯이, 우리 역시 마음대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전하께서는 오늘 안 들어오실 거네.”

캐럴이 입을 열자, 나도 용기 있게 나섰다.

“시종장님, 전하께서 어디에 계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원래 멋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전하께서는 지금 연무장에서 홀로 수련 중이시네.”

“시종장님. 제발 이 상황 좀 전해주시면 안되나요?”

“..........절대 찾지 말라 하신지라... 중요한 수련에 방해가 되신다고...”

“.............”

이 이상은 시종장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인 듯했다.

결국 죄 없는 우리들은 밤새 덜덜 떨며 황태자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황태자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시종장도 덩달아 우리를 신경 쓰느라 내내 들락날락했다. 굳이 고개 숙이고 있을 필요 없으니 허리도 펴고 있으라며 배려해 주었다. 담요도 갖다 주고 최선을 다해 챙겨주는 모습이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다.

하지만 해 뜰 무렵, 결국 한 명이 쓰러져 버렸다. 밤새 추위에 떨며 서있느라, 체력을 전부 소모해 버린 것이었다.

“앨리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시종장과 동관의 하녀들이 부랴부랴 달려 나와, 쓰러진 하녀를 살펴봤다.

“이 아이를 안으로 들여라.”

도저히 안 되겠는지, 시종장이 결국 마음대로 결정을 내렸다.

“네? 하지만...”

“아무 잘못 없는 하녀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런 일로 전하께서 나무라실 리 없지 않느냐.”

“네, 알겠습니다.”

......차라리 저 쓰러진 애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난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지... 황태자는 언제 오는 건지...

그때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낭랑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였다. 시종장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달려 나갔다. 그리고 깜짝 놀란 우리들은 모두 재빠르게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였다.

“시종장,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이 아이들은 누구고?”

“폐하 그것이...”

시종장은 어쩌고 저쩌고 열심히 정황을 설명했다.

“뭐라고? 밤새 이러고 있었단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송구하옵니다. 폐하.”

“이런 일이 있으면 본궁에 알려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 분명 공주가 하녀들을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닌지 잘 살펴보라 했거늘! 어쩌자고 이 아이들을 밤새 이렇게 세워둔 겐가!”

“죄송합니다. 밤이 너무 깊어 두 분 모두 침수 드셨을 시간인지라... 지금도 아직 시간이 일러 두분 폐하께서 기침하실 시간이 아니기에, 전하가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일찍 깨더니 이런 일이 있을 줄이야.... 괜찮으니 어서 다들 고개를 들거라.”

으어어... 허리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는 기분을 느껴 본 적 있는가? 온 몸이 차갑게 굳어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다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애써 들었다. 난 고개를 든 김에 흘끗 시선을 돌려 황후를 훔쳐보았다.

근데 분명 누굴 굉장히 닮았는데? 그냥 두 번째 봐서 낯익어서 그런가?

막 떠오를 듯 말 듯 했지만, 너무 피곤해서 제대로 생각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고생 많았다. 이제 되었으니 그만 돌아가거라. 아니다, 시종장. 이 아이들이 안에서 잠시 쉬었다가 갈 수 있도록 도와주거라.”

“네. 폐하”

역시 천사님이야... 황후의 명령으로 돌려보내는 거니 공주도 감히 뭐라 못할 테지만,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쉬지도 못할 게 뻔했다. 그런데 정말 고마운 배려였다.

우리는 하인을 따라갔다. 등 뒤로 황후의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엔릴은 언제쯤 온다 했는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으셔서 잘 모르겠습니다. 폐하께서 오셨다고 전갈을 넣을까요?”

“아니다. 산책하는 길에 그냥 들러보았다. 방해하고 싶지는 않으니, 나중에 나에게 들르라고 전해주거라.”

황후의 목소리를 배경삼아, 난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었다

“어? 어마마마”

막 문 안쪽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맨 끝에 서있었기에 이제 막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리일!”

뭐? 지금 뭐라고? 리일? 내 발걸음은 못에라도 박힌 듯 우뚝 멈춰버렸다.

“어마마마, 여긴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설마... 이 목소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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