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낚시(1)
2017.01.02.
나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정체를 안다는 내색은 하지 않기 위해, 아주 여상스러운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어?”
“너무 오랜만이어서 나 까먹었어?”
그럴 리가. 너 엄청 잘생긴데다가, 이제 황태자란 신분도 알았는데 기억 안 날 리가 있겠어?
하지만 너무 호락호락 넘어오면 재미없잖아?
그리고 리일, 너도 솔직히 속보여! 조금만 조사해보면 별궁에서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뻔히 알 수 있으면서, 일부터 빨래터에 찾아와놓고 ‘너 역시 세탁하녀였구나?’ 라니...
“리일! 오랜만이에요!”
뭐라고 반응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난 일단 활짝 웃었다. 내 미소는 백만 달러거든!
자, 내가 이렇게 말하면 넌 어떻게 나올까?
“와!! 이렇게 우연히 또 만나다니, 우리 운명인가 봐!”
푸흡! 진짜로 뿜을 뻔 했다. 너무 속보이잖아..!!
“아..하..하하하...”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우연 맞지만, 축제에 나간 건 약속하고 간 거였고, 오늘의 일 역시 보나마나 리일이 일부러 온 거다.
별궁으로 직접 오면 신분이 들통 나니 올 수가 없었겠지. 그런데 세탁 하녀도 아닌 내가 우연히 쫓겨난 날, 황태자씩이나 되는 놈이 빨래터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뻔해! 날 보려고 그 후에 자주 와봤던 걸 거야.
아니야. 아냐아냐아냐. 아직은 김칫국 마시면 안 돼. 황태자씩이나 되는 놈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겠어.
의중을 떠보기 위해 그를 빤히 바라봤지만, 황태자 머릿속엔 어처구니없는 생각만 가득했다.
-얜 안 꾸며도 예쁘네...?
헐. 내 추측 맞을지도...
아니면 뭐 설마 조작해서라도 우연히 세 번 만나면 운명의 상대가 된다던가, 그런 걸 굳게 믿고 있는 거야?
어색하게 웃으며 시간을 끌던 나는 뭐라고 반응할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음... 고전적인 수법을 써야 하나? 밀고 당기기?
“이런 걸로 운명은 무슨 운명이에요!?”
“.........”
황태자는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 못한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크, 너무 밀었다. 이제 살짝 당겨볼까? 너무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지.
난 입이 귀에 걸리려는 걸 필사적으로 막으면서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치.. 우연히 세 번 만나야 운명이죠. 일부러 왔으면서... 안 그래요?”
“어? 아, 아냐.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네가 보여서...”
거짓말! 네가 여길 왜 우연히 지나가냐고!
“아무튼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정말 나 보러 온 거 아니었어요??”
“사실... 맞아. 그냥 잘 지내나 궁금해서...”
-내 처소에 왔던 일이 걱정 돼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눈을 마주친 채 가벼운 대화를 나누어서인지, 생각이 술술 읽혀 들어왔다.
“사실, 그다지 잘 지내지는 못했어요. 얼마 전에 감기몸살로 끙끙 앓았거든요.”
원래 동정과 호감은 종이 한 장 차이랬다고... 공주년에 대한 복수도 할 겸 오늘 동정표 좀 많이 얻어놔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 많이 아팠겠다... 미안...”
“리일이 왜 미안해해요?”
“아니 그냥... 도움이 안 돼서 미안해서...”
난 그가 왜 미안해하는지 알면서도 시치미를 뚝 뗐다. 으아 나 조금, 아니 많이 못된 것 같아.
리일이 그날 나를 보러 왔었을까? 황후에게 이야기를 들었으면 내가 동관의 하녀 휴게실에 있다는 걸 알았을 텐데...
왔다 하더라도 내 앞에 대놓고 나타나지 못했을 테니,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에요. 이젠 다 나아서 괜찮아요.”
“그래도...”
그는 내가 그 날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는지를 걱정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미 알면 어떡하지..? 그냥 말해버릴까? 일부러 속인 건 아니지만 미안한데... 하지만 알면 놀랄텐데... 분위기를 보니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있을까?
그의 머릿속에는 정신없이 오만 가지 생각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
가만히 듣던 나는 뜬금없이 작별을 고했다.
“리일,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전 일이 많아서...”
밀당은 연애의 정석이고, 일단 지금은 잠시 밀어낼 타이밍이니까!
정말 바로 헤어질 생각은 없으니 이건 그냥 주가관리다. 물론 내가 이렇게 말해도 넌 날 붙잡아야 해!
내 말투와 표정, 돌아서는 속도와 등 돌리는 각도까지 내 몸의 모든 것이 날 붙잡으라고 말하고 있잖아!
내가 생각해도 나 진짜 못되처먹은 속물인 거 알겠는데, 난 지금 너무 절박하다고! 이 공주지옥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고 싶지는 않아! 리일, 진짜 미안한데 나한테 좀 낚여줘!!
“자, 잠깐만!”
역시! 너도 여자 꼬시는 스킬이 만만치 않구나? 얘가 타이밍을 좀 아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 놈이 여자를 모르는 순진한 녀석이긴커녕, 파티 때마다 열 여자 마다하지 않기로 유명하던데...
무슨 자유연애주의라나...? 제 여자는 제가 찾겠다는? 에휴, 뭐 그럼 적어도 밤에 실망시키지는 않... 으악! 내가 무슨 음흉한 상상을! 으악으악!
아무튼 그럼 꼬시기 어려우려나?? 아무래도 순진남을 꼬시는 게 더 쉬운 법이니까...
“왜요? 저 정말로 이거 안 해 놓으면 공주저하께 벌 받아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끝마친 난, 아주 살짝 뒤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주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사실이기도 했다.
오늘도 히스테리가 폭발한 공주는, 테이블 시트에 얼룩이 있다며 날 불러다 온갖 패악을 부린 것이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세탁은 내 업무가 아니라고! 난 그냥 세탁부에서 시트를 받아다가, 풀을 먹여 빳빳이 다려서 교체하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공주는 아랫것들의 업무분담 따위 관심 없겠지. 그냥 빡치니까 시트를 가져오는 나를 족친 거겠지.
그 결과 난 세탁하녀도 아닌데 직접 시트를 빨러 여기까지 온 거다. 그래도 많이 맞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 덕에 황태자를 또 만났으니 다 용서할 수 있다. 움하하하하하! 아니, 그래도 복수는 해야지.
“.....공주가, 아니 공주저하가 그렇게 무서워?”
저런, 신분을 속이려면 말투를 조심해야지. 공주를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척 하기 힘들잖아.
황태자야 조금만 더 조심해 줘. 너의 신분을 눈치 챈 게 들통 나면, 꼬시기가 더 힘들어 진단다.
“네... 정말 무서우세요... 화도 잘 내시고...”
난 두려운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자, 어서 눈치 채! 내 얼굴을 잘 보라고, 아까 공주한테 맞은 내 얼굴이 아직도 살짝 부었잖아. 입술도 살짝 터져 있고. 얼른 눈치 채 줘!
난 일부러 손등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아직도 화끈거린다는 듯이.
“설마, 하녀들한테 손찌검도 함부로 하고 그래?”
“....그래도 뺨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어쩔 땐.... 흐흑...”
나는 은근히 공주를 디스했다. 그리고 이건 결코 연기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미친 공주년이 바늘로 내 손톱을 후벼 파려 했던 걸 생각하자, 정말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정말 너무 끔찍했어...
드디어 공주한테 소소하게 복수도 하게 되는 구나. 너 소박맞는 데 내가 크게 보태주마!
“미, 미안. 울리려는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더 심한 짓도 한다고? 대체 어떤 짓을 했기에?”
황태자는 당황하며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주었다.
좋았어! 빌린 물건은 다음에 또 만날 좋은 핑계를 주는 법! 그나저나 손수건 오지게 고급스럽네... 그런데 옷은 왜 저따위로 입고 다니는 건데...?
“바늘로...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바느질을 잘 못했다고... ”
난 일부러 말끝을 흐렸다. 그래야 더 궁금해지는 법! 그러면서도 손을 바르르 떨며 생각만 해도 아프다는 듯이 손톱을 감싸 쥐었다.
자 어서 눈치 채! 바늘과 손톱이야! 차마 쉽게 상상되지 않는 일이지만 이 정도 힌트면 충분하잖아!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난 진짜로 당하지는 않았다는 말은 쏙 빼고, 아무런 말없이 고개만 푹 숙였다.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아쉽긴 했지만,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은 화룡점정이었다.
“...흐흑.. 으흐흑... 너무 너무 무서웠어요... 흑흑...”
나는 시트를 꾹 움켜쥐고 구슬프게 울었다.
“어,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 그런 짓을...!”
땡큐, 공주. 넌 참 쓸모 있는 공주였어. 나와 황태자 사이에 오작교를 놔 준 역할로서 말이야. 하지만 앞으론 그런 짓 할 생각 하지 마. 정말 끔찍하게 무서웠다고!
황태자는 정말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런데 황족이 저런 인간적인 말을 하니 참 신기하게 들린다. 하녀는 사람도 아닌 이 세상에서 말이야.
너 정말 괜찮은 애구나? 황후도 천사표더니 아들놈 잘 키우셨네...
난 황후폐하께 치료받았다는 말은 쏙 뺐다. 내가 황후를 이미 만난 걸 알면,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들통 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황후폐하 얼굴 보고 눈치챈 건 아니었지만...
“아, 아녜요. 누가 들으면 리일도 큰일 나요. 전 괜찮으니 화내지 말아요. 이젠 다 나았어요.”
자 얼른 황후한테 가서, 그런 못돼 처먹은 공주는 싫다고 말해!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그보다... 이젠 괜찮은 거야?”
황태자는 다정히 말하며 은근슬쩍 내 손을 쥐었다. 그리고는 꼼꼼히 살펴보았다.
이러지 마. 정분의 시작은 손잡기라고 하지만, 내 손은 내가 봐도 부끄럽단 말이야. 맨날 중노동에 시달리는 손이, 네 어머니처럼 하얗고 고울 리가 없잖아. 나 정말 부끄럽다고.
“괘, 괜찮으니 이...이것 좀...”
나는 매우 수줍은 기색으로 손을 슬그머니 빼려 했다. 그래, 빼려 했지 실제로 빼진 않았다. 꼼지락 거리며 여운을 줬을 뿐.
아... 기분 묘하다. 황태자의 손은 보기에는 하얗고 길어 섬세해 보였지만 막상 만져보니 거칠고 딱딱했다. 검을 쥐는 손이라서 그런 건지 굳은살도 군데군데 박혀 있어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들었다.
그러고 보니 맨날 저렇게 편하게 입고 다니는 이유가 검술훈련 때문인가...? 흙투성이가 되어 있던 것도 그래서? 그땐 검을 들고 있지 않아서 몰랐는데 아마도 그런가보다.
“앗, 미, 미안... 함부로 잡아서...”
“그, 그런 게 아니라... 부끄러워서요. 손이... 거칠어서...”
아니 정말 놓으라는 게 아닌데 왜 놓냐고! 얘 생각보다 연애고수가 아닌가 봐.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그럴 수도 있지...”
난 아쉬움에 애꿎은 손만 혼자 꼼지락댔다.
“휴... 부끄러운 모습 보여서 죄송해요. 요즘 너무 힘들어서 리일한테 신세한탄이나 하고...”
“많이 힘든가 보구나. 리엘... 저기 그게...”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으악, 말하지 마! 아직 안 돼! 나 불쌍하다고 정체 까발리고 도와주려 하지 마! 고작 이 정도 사이에서 정체를 알았다간 이도 저도 안 된다고!
하지만 리일은 꿋꿋이 입을 열었다.
“리엘, 내가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