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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24화 (24/134)

24. 탈출(2)

2017.01.05.

***

몇 시간 후.

모든 리테인 출신 하녀들이 1층의 홀에 불려가 일렬로 줄 세워졌다. 나 역시 몸을 제대로 추스를 새도 없이 재빨리 내려갔다.

곧 본궁에서 시종이 올 때를 맞춰, 미리 마탑으로 보낼 하녀를 선발하겠다는 것이었다.

“공주저하. 마탑으로 갈 하녀가 결정되었습니다.”

“누구로 결정되었느냐?”

“레비넌 백작가의 리엘이라는 하녀입니다.”

난 약속이라도 한 듯 하녀들에게 떠밀려 한 걸음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저, 저하 살려주세요! 제발 저를 보내지 말아 주세요!! 마, 마탑에 가면 마법으로 신종 고문방법을 실험당한다고 들었어요!!”

우와 나 진짜 연기상 받아도 될 것 같아.

“시끄럽다! 제국의 부름을 받았으면 영광인 줄 알 것이지 어디서 소란을 피우느냐!”

다른 하녀들도 그 소문을 들었는지, 다들 두려운 표정으로 날 외면했다.

그래 들었겠지. 내가 시켜서 줄리가 퍼트린 소문이니까. 그 소문 덕인지 다른 자원자는 하나도 없었다.

친하게 지내던 다른 하녀들이 있었으면 더 데려가려 했는데, 그렇게 해 줄 만큼 날 챙겨줬던 애는 줄리 말고는 없었다.

“제발... 제발... 저하!! 살려주세요...! 저 혼자 어떻게 그런 곳에...”

난 눈물까지 뚝뚝 흘리며 공주에게 빌었다. 어차피 떠날 거, 지금 좀 밉보여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한 손으로는 줄리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절대 놓을 수 없다는 듯이.

“닥치지 못하겠느냐?”

“저하... 제발...”

내 애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공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고 있었다.

“하녀장, 본궁에서 요구한 게 몇 명이라고 했지?”

“몇 명이라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많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녀장님은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헛소문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겠지만, 이왕이면 많이 빼내주고 싶었는지 모른 척 대답했다.

“흐음... 그럼 한 명은 너무 적은데... 최소한 구색은 맞춰야 할 게 아닌가!”

공주가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옳지! 역시 한 명으론 좀 부족해 할 거라 생각했어!

난 조금 더 티가 팍팍 나게 줄리의 손을 꼭 쥐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일부러 눈에 띄라고 한 짓이었다.

그런 내 모습이 하녀들을 슥 돌아보던 공주의 눈에 당연히 딱 띄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줄리가 지목되었다.

“너!”

공주가 줄리를 바라보자, 줄리는 사색이 되어 재빨리 내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물론 미리 짠 연기였다.

“리엘, 이거 놔!!”

“줄리...! 줄리!! 날 버리지 마!! 살려줘!!”

“나..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저리 가라고!”

난 줄리에게 매달리며 애절하게 외쳤다.

크크크. 원래 사람은 청개구리 심보지. 내가 ‘줄리도 같이 갈래요’ 하면 공주는 괜히 심통을 부리겠지? 하지만 줄리가 가기 싫어하면 오히려...?

그리고 이미 난 찍혀있으니, 나랑 손을 잡고 있는 내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줄리도 밉상일 게 뻔했다.

“저, 저하! 이곳에 남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려요!! 전 이곳이 좋아요! 흐흑.. 저하... 제발... 제가 성심으로 모시겠습니다!”

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신파극을 찍었다.

“시끄럽다! 닥치지 못하겠느냐!! 이 무슨 추태냐!!”

내가 줄리의 다리를 붙들고 떨어지지 않자, 공주는 정말 짜증나는 듯 강제로 우리 둘을 끌어내게 했다.

“저..저하! 왜 저..저까지..! 저하.. 살려주세요!”

줄리의 연기력도 꽤 쓸 만했다.

한참 그렇게 난동을 부리고 있는데, 시종장이 도착했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공주는 눈을 살벌하게 부라리며 섬뜩한 경고를 날렸다.

“둘 다 끽 소리도 내지 말거라. 본궁의 시종장 앞에서 이 같은 추태를 부리면 네년들을 시체로 실려 나가게 해 주겠다. 제 발로 마탑으로 갈 테냐, 죽어서 실험재료가 되어 갈 테냐!?”

“.........”

“.........”

어차피 더 이상 난동부릴 생각도 없었다.

괜히 시종장 앞에서 난리치다가, 마탑의 실상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시종장이 친절히 설명해 주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곧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들어왔다.

“공주저하, 이 하녀들입니까?”

우리의 이름을 들은 시종장이 내 얼굴을 특히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다. 이 정도면 되겠지? 너무 많이 데려가도 일손이 모자란다. 어서 데려가라.”

시종장은 다시 한 번 이름과 얼굴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필요하다더니 별 군말 없이 수긍하는 걸 보면, 명단에 나만 포함되어 있으면 되는 모양이었다. 역시 내 추측은 틀리지 않았어!

우린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궁을 나섰다. 배웅해 주는 사람이라고는 하녀장 한 명 뿐이었다.

제국 출신인 하녀장은, 당연히도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용히 축하해 주었다.

내 표정은 별궁을 벗어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바뀌었다. 난 줄리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거봐, 내 말 맞지? 이쪽이 동아줄이라니까.

또라이 공주 안녕!!

***

내 인생에도 드디어 비가 그쳤다. 아직 구름이 걷히고 볕드는 것 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센 소낙비가 그친 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리일을 더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만 빼면, 이곳 생활은 참 평화롭고 좋았다.

마탑에 오면 정체를 들킬 테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내가 빨래터로 나갈 일도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온 이후로 탑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말이 좋아 시녀이지 사실 거의 하녀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것만 해도 너무너무 좋았다.

이곳은 다들 자기 일로 바쁜지, 남한테 서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였다.

“개인플레이 만세!!”

"리엘 고마워! 다 네 덕이야! 여긴 정말 천국이야!!"

말 그대로 천국이다. 일도 딱히 힘들지 않았고, 남는 시간에는 마탑도서관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어차피 실험실은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기에, 내가 할 일은 강의실과 연구실 청소가 전부였다.

그리고 여기서 연차가 조금 더 쌓이면 실험 보조도 하고, 마법도 배울 수 있다고 들었다. 물론 그러려면 마법적 재능이 필요하겠지만.

"줄리, 일에 좀 적응되고 나면 우리 마법을 배우자!"

"난 머리가 나빠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리엘이라면 멋진 마법사가 될 것 같아!"

"같이 출세해야지!"

제국에서 마법을 배울 유학생을 원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거야말로 출세의 지름길이다. 깊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간단한 논리였다.

"알았어! 화이팅! 제국이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어.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소문이 안 좋았지?"

"그야... 역시 종교적 세뇌는 무서운 거야."

제국의 마법부흥운동은 결국 신전과의 싸움. 그리고 그 신전파의 선봉이 거지같은 내 나라 리테인이다.

애초에 국력이 비교도 안 되는데, 리테인이 무리하게 전쟁을 건 것도 전부 종교 때문이었다. 그라츠 제국은 사악한 마법의 힘으로 신전을 탄압하는 악의 제국이라고 주장하며 말이다.

"하긴... 그러지 않고서야 미쳤다고 이 거대 제국에 싸움을 걸어..."

"그러게."

리테인은 내가 태어났을 쯤에도, 제국의 분가인 세이라 공국에도 전쟁을 건 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대패했다.

제국도 아닌 공국에도 대패했다는데, 그 주제에 무슨 깜냥으로 참...

아무튼 제국이 원했던 건, 유학생을 받아 리테인 지배계층에게 마법을 퍼트리려는 것이었겠지. 리테인을 안에서부터 무너트려 신전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말이야.

리일 덕분에 중요한 거 알아냈으니, 기회가 되면 마법 쪽으로 무조건 줄 서는 거야!

자고로 성공하려면, 그 나라가 가장 중시하는 국가시책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

***

하지만 아직은 마법을 배울 상황이 아니었기에, 난 일단 리일을 공략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있으니 정보수집이라도 해야지 어쩌겠어? 별궁을 탈출하니 심적 여유도 생겨서 한가하게 이런 궁리나 하고 있고, 으흐흐흐 좋다!!

예전에 제국 출신 하녀들에게 황족들 신상털기를 했던 걸 떠올리며, 리일의 가족관계를 머릿속에 정리해 보았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이라는데, 사람을 낚으려면 더더욱 잘 알아야 하는 법! 근데 난 이 나라 황족들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는 게 문제다.

전에 기껏 조사해 놓고도, 사는 게 바빠서 제대로 분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선 우리 리일!!

엔릴 세이라 폰 그라츠. 16세로 나와 동갑인 줄 알았지만, 곧 12월이 되면 17세가 된다고 한다. 난 그 다음 해 5월이 되어야 17세가 되니까 오빠인 셈이네. 나중에 오빠신공을 한 번 써봐야 겠어!

"오빠아, 오빠앙? 오빠야... 이렇게 부르면 되나?"

혼자 거울보고 연습하는 내 모습이 공주 못지 않게 또라이 같아서, 난 재빨리 관뒀다.

다음으로 천사 황후님!

유디트 그라츠 폰 그라츠. 32세. 은발에 일명 그라첸 블루라고 불리는 바다빛 눈동자로, 황족의 상징 그 자체의 모습. 황제와는 원래 사촌지간.

한 마디로 외모를 보나 이름으로 보나 아주 순혈 중에 순혈 황족! 게다가 20대로 보이는 동안이라니!

제국은 어머니가 황족일 경우 미들네임에 모계의 성을 넣는다 하니, 황후의 어머니도 황녀였다는 뜻이겠지? 부럽다... 난 미들네임은커녕 성도 없는데...

황태자의 미들네임은 세이라인걸 보니, 황후는 세이라의 공주였군. 그곳 역시 황실에서 갈라져나간 나라이니, 한 마디로 다 지들끼리 해먹었다는 소리네. 쳇!

아, 금수저라고 욕 안하기로 했지! 근데, 황태자가 16세인데 황후가 32살이면... 대체 애를 몇 살에 낳은 거야? 16세인가? 그럼 15세에 임신? 오 마이 갓! 사고 친 거였어? 대박 대박!!

역시 정답은 육탄공격밖에 없는 것인가!!!

근데... 황제도 너무 젊은데, 내가 리일과 결혼하다고 해서 어느 세월에 황후가 되겠어!!?

황제. 엘리어트 린슬렛 폰 그라츠. 36세. 흑청색 머리카락. 바다빛 눈동자. 18세에 역대 최연소 오러나이트가 된 천재. 차갑고 냉정한 성격이지만 황후한정 팔불출.

리테인에서 피에 미친 살인광으로 악명 높은 황제가 내 미래의 시아버지인가... 휴...

나이를 보아하니 앞으로도 한 30년은 더 집권할 텐데... 나 시집살이 오지게 하는 거 아냐? 언제 엔릴이 엘리어트 2세가 된담?

어? 그런데 왜 황태자의 이름이 엔릴이지? 황제의 이름이 엘리어트인데... 뒤를 이어 엘리어트 2세가 되려면, 황태자의 이름이 ‘엘리어트 세이라 폰 그라츠’라야 하는 게 아닌가?

"아아아앗!!"

혹시 출비? 알고 보니 황제의 친자가 아니라 황후가 따로 낳아온 아이인데, 황제가 황후를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아이로 거두었다던가!!

맞아, 15세에 임신한 걸 보면 정말 그럴지도!? 앗, 그래서 얼굴도 황후만 빼박인건가? 그럼 막 무늬만 황태자고, 사실은 다른 황자에게 황위를 넘겨준다던가...

어, 그런데 이거 나한테 꼭 나쁜 일이 아니잖아? 난 어쨌든 황족이면 장땡이고, 오히려 허들이 더 낮아지면 좋은 거 아닌가?

황위에 못 오를 곁가지 황자라면, 사랑에 눈멀어 나랑 결혼한다 빡빡 우기면 허락해 줄 확률이 높을 지도?

"아악!! 몰라 몰라!!"

내가 계속 무슨 개소리인 거야! 혼자 아주 막장드라마를 쓰고 있네. 내 헛소리에 내가 다 쪽팔릴 지경이었다.

아몰랑. 나머지 형제들인 쌍둥이 누나 아나이스와 막내동생 로렌도 있다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 패스!

그런데 막상 이거 분석해 놓고 보니 너무 막막하다. 내 자신감은 푸스르르르 사라져갔다.

사실 그동안은 좀 이기적이면 어떻고, 좀 속물이면 어떠냐고 당당했다. 원래 무식하면 용감한 법.

며칠 전만 해도 의욕 충만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암담했다. 황태자를 잡는다는 건 미래의 황후가 된다는 건데... 갑자기 기가 푹 죽었다.

특히 지금의 황후랑 너무 비교되는 내 신분을 보니 영 의욕이 사라졌다.

"하아....."

황후가 셀리나 공주 따위 한방에 치워버릴 수 있다고 낄낄댔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 신세다. 아니,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을 거다.

내가 과연 저 금수저들 틈에 들어갈 수 있을까? 나 성공할 수 있을까?

으잇 기죽지 마! 내 인생 내가 쟁취해야지! 그리고 공주는 어차피 소박 플래그잖아. 황태자가 발걸음도 안 한 다는데 말 다했지 뭐.

***

성공이고 나발이고 간에, 리일의 얼굴도 못 본 지 한참이 흘렀다. 난 그냥 맨날맨날 평화롭지만 비슷비슷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은 다른 날과 별 다를 거 없는 하루였다. 우연히 아카데미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너..... 너!!”

마탑에서는 아카데미의 마법학부로 가끔 심부름을 보낸다.

그리고 심부름 차 들른 제도 아카데미에서 만난 얼굴에, 난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우뚝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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