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해후(2)
2017.01.07.
아, 또 전생인가?
음... 이런 걸 뭐라고 불렀더라? 엄청 익숙한데? 전생에서 이거 되게 오래 배웠던 것 같은데...
마법 수식은 그 익숙한 식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식을 풀면서 단계별로 변환시켜 놓은 마나배열은 마치... 아무튼 이것도 무슨 학에서 본 구조 같았다.
나, 왜 이렇게 익숙하지? 거긴 마법 같은 것도 없었는데... 이걸 배워서 대체 뭐에 써먹었더라? 일상에서 별 쓸모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럼 마나만 느낄 수 있으면 마법사는 식은 죽 먹기인 거야?
난 신나서 희희낙락 책을 들여다보았다.
"................."
근데... 이해가 안 가네?
익숙하긴 한데, 이해가 안 가.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젠장! 젠장!!!!!!”
역시 그렇게 쉬울 리가...
에잇, 일단은 패스. 다른 건 또 뭐가 있더라? 의지력이었나?
응? 감응력이 있는 사람이 간절한 의지로 원하면 마나를 끌어올 수 있다고?
이게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 소리야? 근데 왜 이렇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왠지 온 우주의 기운이 어쩌고 이런 말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이 나라 사이비 집단? 리테인처럼 왕 뒤에 무당, 아니 신전이 있는 게 아니라 황제 자체가 교주라던가...? 황후는 뭐 성녀고 뭐 이런 거?
오 마이 갓. 무서운데? 이거... 계속해도 되려나...? 마법이고, 황태자 낚시건 간에...?
아냐아냐, 그런 집단일수록 그 안에 들어가면 무소불위의 지위가 생기는 거 아냐? 으흐흐흐!
그럼 더더욱 파이팅이야! 그래, 첫 술에 배부르겠어? 하다보면 되겠지. 될 거야!
나는야 오늘부터 마법 입문생!!
***
난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감응력이 기본이 된다는 말에, 매일매일 마나를 느껴보려 집중했다. 그리고 의지가 중요하다는 말에,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또로 대박을 꿈꾸듯 잘 때도 소원을 빌고 잤다.
아자 또로 1등 기원! 마법사가 되는게 또로 당첨인 셈이야!
하.지.만...!
으아아악 나 재능이 없나봐...
역시 감응력이 전혀 없는 건가? 전생의 편견이 문제가 아니라, 그냥 재능이 없는 몸뚱아리야?
대체 내 인생에 봄날은 언제 와? 여기 들어온 이후 황태자도 못 보는데, 마법사마저 되지 못하면 평생 이 신세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어쨌든 세상은 내가 초조하든 말든 잘 굴러갔다. 내 일상도 마찬가지로 매일 잘만 흘러갔다.
한마디로 난 오늘도 청소와 잡일 중이다.
똑똑
“리엘”
“네?”
“널 찾아온 손님이 있어. 가족이라는데?”
“.....!”
이튼 오라버니다!
로비에 나가보니, 정말 오라버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내려오면서도 설마 비올레티가 행패 부리러 온 건 아닌가, 살짝 걱정이 되긴 했는데 다행이었다.
“오라버니!!”
“리엘!”
우린 무슨 이산가족마냥 상봉했다. 사실 지난번에도 무지 반가웠지만, 방해꾼(?)인 비올레티 때문에 제대로 해후를 나누지도 못했었다.
“다시 볼 수 있어 정말 기쁘구나. 그 때는 급하게 가버려서 미안했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비올레티 입장도 있으니까요...”
나 절대로 착한 척 하려는 게 아니다.
솔직히 그 애가 나한테 피해의식 가질 만 했으니 어쩌겠는가.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앤 내가 정말 밉겠지...
“리엘은 역시 착하구나...”
아니, 나 그렇게 착하지는 않은데... 남자 하나 물어서 팔자 고칠 생각밖에 없다고. 이 껍데기뿐인 귀족영애 신분마저 잃기 전에 말이야.
아, 오라버니가 다리 하나 놔 주면 안 되나... 아카데미에 귀족들 많을 텐데...
“리엘?”
“네! 네?”
망상에 빠져드는 내 귓가로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네? 뭐를요?”
“무도회 말이야. 황후폐하 탄신 무도회.”
“무도회요? 제가요?”
으잉? 난 시녀인데....? 아 일단 귀족이긴 하니깐 참석에 문제는 없지만, 초청장을 받았어야지...
"물론이지. 너도 우리 가족이잖아. 레비넌 백작가 이름으로 초청장이 왔으니 함께 가자.”
“네에에에?”
오라버니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급스러운 초청장을 한 장 보여주었다.
초청장에는 이름 대신, 레비넌 백작 영식 및 영애라고만 쓰여 있었다.
아마도 제국 측에서는, 먼 타국 귀족가의 자식들 이름까지 일일이 쓰기가 귀찮았던 모양이다.
아, 완전 땡큐인데? 그리고 이튼 오라버니... 생각보다 잔머리가 잘 돌아가네? 이 무성의한 초청장을 보고 날 끼워갈 생각을 딱 떠올렸다 이거지?
여기서 시녀노릇하고 있는 내 앞으로 초청장이 올 리는 절대 없겠지만, 이렇게 쓰여 있으면 나도 포함되는 거니까.
황태자! 황태자를 만날 수 있는 거야? 내 사랑스러운 타깃!
“리엘, 같이 갈 거지?”
“무, 물론이죠!! 그런데... 전 입고 갈 옷도 없는걸요...”
난 금세 시무룩해졌다. 내가 가진 외출복이라고는 딱 한 벌. 하지만 그것 마저도 무도회용 드레스가 아니었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해 줄게.”
“하지만 매우 비쌀 텐데...”
오라버니가 백작 영식이긴 하나, 후계자도 아니고 재산을 많이 떼어 받은 것도 아닐 테니 그런 고가의 드레스를 사기엔 부담스러울 게 뻔했다.
“괜찮아. 어차피 외궁의 무도회라 그렇게 비싸게 치장하진 않아도 될 거야.”
“아... 다행이... 네?”
다행이... 아니라, 지금 뭐라고?
“황제폐하, 황후폐하가 오시는 무도회는 본궁에서 따로 열려. 거긴 정말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고위귀족들만 참석하거든. 대신 우리 같은 외국 귀족이나 제국의 보통 귀족들을 위한 무도회는, 외궁에서 따로 열린대.”
“아.......”
좋다 말았다.
하긴... 그렇겠네. 고작 약소국의 일개 백작가 출신인 우리들이, 황궁의 핵심세력만 모이는 본궁의 무도회에 갈 수 있을 리가...
안녕, 황태자는 또 저 멀리...
하지만 그래도! 다른 귀족 영식들이 우글거릴 거야. 이건 가야 해! 반드시 가야 해!!
“그래도 좋아요! 오라버니 너무너무 감사해요!! 저 매일매일 똑같이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오라버니 덕에 너무 들뜨고 신나요!!”
“나도 리엘과 함께 갈 수 있어서 너무 기뻐! 그럼 네 앞으로 무도회에 필요한 것들을 보내 줄게.”
“꺄!! 오라버니 너무 고마워요!!”
오라버니가 돌아가고도 난 한동안 신이나 방방 뛰었다.
백작가에서 쫓겨난 후, 아주 가끔의 꿈같은 시간을 빼면 늘 바닥 인생이었는데... 이런 나에게도 희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고작 무도회 한 번뿐이긴 하지만, 적어도 잠깐이라도 예전의 생활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게 어디겠는가! 이 우울한 인생의 크나큰 활력소이다!
역시 사람은 잃어봐야 소중한 것을 아는 법이다. 저 속에 살 때는 몰랐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크게 다가온다.
그래,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 힘내자!! 얍얍!!
***
짜악!!
행복했던 기분은 하루 만에 시궁창으로 처박혔다.
“네가 감히 어디를 끼어들려 해!! 네 주제에!!”
오라버니가 나를 데려간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비올레티가 나에게 득달같이 달려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었다.
내 뺨이 무슨 공공기물도 아니고... 아무나 후려치냐.
“네가 오라버니에게 꼬리친 거지!!”
난 입가의 피를 스윽 닦으며, 비올레티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선명히 들려왔다.
-오라버니는 내 꺼야! 네까짓 게 꼬리치지 마! 어릴 때부터 쭉 짝사랑 해왔다고!!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근데 네가 아주 미쳤구나. 근친이냐? 너흰 법적으로도 핏줄로도 진짜 남매라고!
하지만 비올레티는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 그저 나를 견제하기에 바빴다.
“너! 무도회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어!”
휘익, 탁
비올레티가 또 손을 들어 올리는 걸, 내가 잽싸게 붙잡았다.
한 번은 너에게 미안해서 그냥 맞아 주었지만,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그리고 솔직히 내 탓이긴 하지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내가 아기때 기어가서 비올레티 자리에 드러누웠나?' 하는 것도 그냥 이유를 모르니 추측한 거지...
“이거 안 놔!!? 천민 주제에 감히!!”
“......그만 좀 해.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나도 이 집안 일원이야. 뭐가 문제라는 거야?”
“일원? 어디서 감히! 너!! 오라버니가 아직 너에게 정이 남아 여동생처럼 예뻐해 주니까 그걸 이용하고 있는 거잖아! 진짜 동생은 나인데! 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잖아!!”
휴... 진짜 동생인 거 알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면 안 되는거 모르겠어?
아니, 그보다...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아는데, 그런 말은 함부로 하고 다니지 않는 게 피차에 좋을 걸?”
내 신분 자체가 법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걸 얜 자꾸 까먹나? 사생아도 아닌 생판 평민을 입적시켜 딸로 위장한 것 자체가 위법이라고!
“왜 찔리니? 어차피 남이니까, 이참에 오라버니를 유혹해서 팔자라도 펴 보려는 거 아냐?”
짝
이번엔 내가 비올레티의 뺨을 내리쳤다.
“아악!!”
이번 건 진짜 화가 났다. 난 단 한 번도 이튼 오라버니를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핏줄만 아닐 뿐이지, 오라버니는 여전히 오라버니였다. 설령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는다 해도...
그런데 감히 뭐? 유혹? 내가 오라버니를 유혹하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그걸 다 받아주고 있는 오라버니 역시 내 유혹을 즐긴다고 모욕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더러운 입으로 오라버니를 모욕하지 마!!!”
“이게 미쳤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
비올레티가 내 머리를 쥐어뜯으려 달려들었다. 나도 참아줄 수는 없었기에, 같이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엎치락뒤치락
우당탕탕
“이거 안 놔!”
“너야 말로!”
찌이이익
“꺄악!!”
한참을 난리를 치다가, 둘 다 결국 힘이 빠져 씩씩거리면서 멈췄다.
비올레티의 몰골은 참... 볼만했다. 너덜거리는 옷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 꼴도 비슷하다는 거겠지?
덜컹
한참 난동을 부리는데 누군가가 벌컥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