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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27화 (27/134)

27. 해후(3)

2017.01.09.

헉, 설마 이튼 오라버니가 이 꼴을 봐버리는 건 아니겠지?

“리엘..!? 어?”

다행히 줄리였다.

날 부르러 온 줄리는 엉망진창인 우리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

“........”

“리엘 너, 두고 보자!!”

비올레티는 쪽팔렸는지 급하게 후다닥 나가버렸다. 물론 한 마디 남기는 건 잊지 않았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제대로 복수하는 사람 없던데...

“리엘! 괜찮아? 무슨 일이야? 쟨 누구야?”

“괜찮아. 아무 일도 아냐. 그냥... 몰라도 돼.”

줄리는 나와 함께 이곳으로 와서 꿀 빨게 된 후, 내 일이라면 자기 일 만큼 열성적으로 편들어 주고 있었다.

“괜찮긴! 너 머리도 엉망이고, 얼굴도 많이 부었어! 얼른 힐링센터에 가자!”

***

전에는 몰랐었는데, 제국에는 일반인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힐링센터가 곳곳에 있다고 한다.

센터에는 힐링마법을 배운 견습 마법사들이 배치되는데, 일정기간 동안 의무봉사를 하는 거라 진료비도 아주 저렴했다. 게다가 힐링은 사제의 신성력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

그리고 황궁의 힐링센터는, 고용인들에게는 무려 공!짜! 였다. 올레, 좋은 나라 같으니...!!

리테인이었다면 왕족이나 고위 귀족 정도는 되어야 고위사제에게 치료받을 텐데, 여기는 공짜라니!!

아, 그러고 보니 이걸 미리 알았으면, 그때 손을 다쳤을 때 여기로 왔으면 되는 거였구나...? 하지만 헤맨 덕에 황후폐하도 만나고, 황태자에게 동정표도 사 여기로 왔으니 개이득이었다.

어쨌든 난 줄리와 함께 마탑의 1층에 위치한 힐링센터에 찾아갔다.

“감사합니다!!”

역시 마탑시녀로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이런 자잘한 상처는 마법 한 방에 순식간에 낫는다. 입술이 터져서 아팠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난 쌩쌩해져서 돌아갔다.

“줄리, 근데 나 왜 찾아왔어?”

“아, 리엘. 중요한 소식을 알려주려고. 다음 주에 마탑에 황제폐하께서 시찰을 나오신대.”

“정말?”

“응.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오늘부터 초 비상이 걸릴 거래.”

헉, 어쩌지. 난 당장 사흘 후에 무도회가 있는데...! 미리미리 휴가 신청 해놓으려 했는데, 왜 하필 이럴 때...

“하아...... 큰일 났네...”

“리엘 왜 그래?”

“휴가를 하루만 내려고 했는데... 안 되겠지?”

“어디 가려고?”

무도회에 못 가는 줄리 앞에서 이 얘기를 하기가 미안해서 조금 망설여졌다.

“그게 사실...”

하지만 줄리는 내 말을 듣더니, 흔쾌히 이렇게 제안했다.

“리엘! 걱정 말고 다녀와! 휴가 말하기 뭐하면, 그냥 몰래 갔다 와! 내가 네 몫까지 일하면 되잖아!”

“줄리..... 하지만 그건 너무 미안하잖아...”

“무슨 소리야,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그리고 난 네 덕에 그 지긋지긋한 별궁을 탈출한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고마워.”

줄리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줄리... 정말 고마워.”

그러고 보니, 그렇게 외로운 인생만도 아닌 것 같았다. 아직 나를 여동생처럼 챙겨주는 오라버니도 있고, 이런 친구도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

가슴이 두근거려, 며칠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난 정식 무도회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백작가에서 쫓겨났으니, 사교계에 데뷔도 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백작영애 시절 생일 때마다 연회가 열리긴 했지만, 진짜 사교계는 아니었다. 내 첫 사교계 데뷔가 이런 이역만리 타국의 황궁에서 있을 줄... 정말로 꿈에도 몰랐다.

아... 어릴 적 동화책에 본 것처럼, 첫 무도회에서 왕자님을 만나 춤을 추고 사랑에 빠...질 리가 없지!

그런 거 안 믿게 된 지 십년도 넘었다.

뭐, 왕자님, 아니 황태자를 만나긴 했다. 그 후 코빼기도 안 보여서 문제지.

난 이제 리일과의 희망적인 미래를 거의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그린라이트도 살포시 껐다.

정말 진심이었으면 진즉에 날 만나러 왔겠지. 아무리 신분을 숨기려고 그렇다지만, 그래도 몰래 보려면 얼마든지 만나러 올 수 있잖아!

그냥... 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던 거야.

“그러니 오늘 무도회에서 사활을 걸어야 해!!”

황태자는 아니더라도, 차라리 조금 더 현실적인 제국 귀족 영식을 노리는 거야!

그리고 만약 오늘 실패하더라도, 나에겐 이튼 오라버니가 있잖아. 일명 오빠 친구 소개받기! 음훼훼훼훼!

똑똑

“리엘. 소포가 왔어.”

소포!! 이튼 오라버니가 보낸 의상이 틀림없었다.

“앗! 고마워!!”

“치장을 도와줄게. 너 혼자서는 못하잖아. 우리 엄마가 아가씨의 몸종이었어서, 나도 몸단장을 도울 줄 알아.”

줄리는 오늘 나 때문에 더 바쁠 거다. 그래서 나 역시 며칠 전부터 미리미리 줄리의 일을 도맡아 해주었고, 오늘도 오전 내내 내 할 일을 서둘러 미리 해 두었다.

“바쁜데 괜찮아?”

“응! 잠깐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나도 구경해보고 싶기도 하고...”

이런, 내가 줄리의 마음을 너무 배려하지 못했구나.

그래도 백작영애로 살아본 나와 달리, 사생아출신 하녀로 눈칫밥 먹고 자란 줄리는 이런 세계는 정말 처음일 것이다.

“줄리 미안... 나만 가서...”

“아냐! 정말 괜찮아! 멋진 오라버니를 둔 건 부럽지만... 어쩔 수 없잖아.”

“줄리.....”

내 상황이 조금 특이해서 그런 거지, 보통 정실부인의 자식들은 사생아들을 형제로 대해주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러니 줄리는 배다른 형제자매들에게 한 번도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미안해하지 말고, 가서 내 몫까지 즐기고 와!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멋진 귀족 영식들도 만나고, 춤도 추고!! 리엘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

치장을 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난 줄리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얼른 열어봐. 궁금하다!”

“응!!”

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뜯어보았다. 리본을 조심스레 푸르고, 고급스러운 상자 뚜겅을 살포시 열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이런...!!!”

우리 둘은 동시에 경악에 찬 비명을 내뱉었다.

.....상자 안의 의상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오라버니가 함께 보내 준 새틴 구두도 온통 흙투성이였다.

“어, 어쩌면 이런... 리, 리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대체 누가!!?”

빠드득

이건 분명 비올레티의 짓일 거다. 중간에 상자를 빼돌려서 이렇게 만든 거겠지. 왜 비올레티가 오라버니가 준비한 상자에 미리 손을 댈 수 있을 거라 생각 못 했을까...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할 줄이야... 이런 고전적인 수법이라니...

그리고 이 수법이 왜 고전적으로 쓰이는 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심리적 대미지가 컸으니까.

투둑... 툭...

나도 모르게 상자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갈기갈기 찢긴 저 드레스만큼이나 마음이 아팠다.

가뜩이나 의지할 사람 몇 없는 세상에서, 누군가가 나를 이렇게 미워한다는 게 너무 슬펐다.

“리엘... 어떡해... 무도회 어떡해...”

줄리는 나와 함께 울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나보다도 더 슬퍼 보였다.

“.........못 가는 거지 뭐... 어쩌겠어. 입고 갈 드레스도 없잖아...”

사실 드레스와 구두는 오라버니가 보내줬지만, 그래도 무도회 구색에 맞추기엔 턱도 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일단 제대로 된 화장품도 없었고, 치장을 위함 소품들은 더더욱 없었다.

무도회에 가려면 옷과 구두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었다. 부채, 장갑, 귀걸이, 목걸이, 머리장식, 여벌의 드레스, 향수 등등...

여자들 세계를 잘 모르는 오라버니가, 그래도 구두까지 챙겨 보내준 것만 해도 대단한 센스였다.

난 나머지는 없으면 없는 대로, 아니면 대충 기존 걸 재탕해서 구색을 맞춰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드레스가 이 모양이니, 이미 무도회는 물 건너갔다.

이따가 오라버니가 날 에스코트하러 마탑에 마중 나오기로 했으니, 몸이 안 좋아 못 가게 되었다고 아카데미에 연락을 보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괜히 비올레티 얘기를 꺼내서 오라버니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진짜 동생과, 진짜인줄 알았던 동생 사이에 껴서 마음고생 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리엘, 이대로 포기하기는 너무 아깝잖아.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런 기회는 또 안 올 텐데...! 그래, 내가 수선해볼게! 나 바느질 진짜 잘해!”

“아냐, 줄리... 일도 바쁜데 이걸 어떻게 다 수선해. 그리고 지금 바로 준비해도 빠듯한데, 시간도 안 될 거야.”

시간이 많다고 해서, 저렇게 심하게 찢어진 옷을 꿰매 입을 수나 있을지 미지수였다. 분명 거적때기 걸친 것 같겠지...

이 비싼 걸 이대로 버릴 순 없으니, 잘라서 리본 끈이나 만들어야겠다. 이 와중에도 돈 한 푼이 아쉬운 내 궁상이 슬플 뿐이었다.

“리엘.... 흐흑. 너무 슬퍼... 이게 뭐야 정말... 대체 누가...”

“괜찮아... 그냥 일이나 해야겠다. 할 일도 산더미인데 잘 됐네!!”

난 억지로 씩씩하게 일어났다.

아... 어디서 요정이 나타나서 마법으로 짠 드레스 안 만들어 주나? 전생인지 현생인지 어디선가 읽은 동화에서 보면 그렇던데...

하지만 현실은 현실.

***

난 아카데미의 오라버니에게 후다닥 연락을 보내고,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다음 주에 황제폐하께서 시찰 오시니, 책잡히지 않게 마탑을 깨끗이 정돈해 놓으라는 윗선의 엄명이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신경 써야 했다.

“에구구 내 팔자야.”

한참을 청소하는데, 이튼 오라버니가 날 찾아왔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하지만 난 고개를 내저으며 바빠서 만날 수 없다고 전했다.

옆에 비올레티가 버티고 있을 테니, 무도회에 가지 않고 날 하염없이 기다릴 순 없을 테지. 이대로 안 나가고 있으면 돌아가겠지...

“우씨. 안 울 거야!”

왜 자꾸 주책없게 눈물이 나오는 건지... 나 40대 아줌마인데, 정말 15세, 아니 16세 소녀라고 착각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나도 잊고 있던 내 생일은 이곳에서 하녀 노릇하는 새 지나가 버렸다.

그러니 난 이제 16세, 법적으로 성년이다. 이제 울지 말아야지. 꿋꿋하게!

“허리 아프다...”

한참을 쭈그려 일했더니 삭신이 쑤셨다. 난 잠시 쉬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돌아온 내 방에는, 아까 못 보던 무언가가 있었다.

“........어? 이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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