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무도회(1)
2017.01.09.
웬 상자가 산더미처럼 놓여 있었는데, 겉보기에도 딱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였다.
“.....뭐야 이게?”
나에게 온 게 맞나 싶었지만, 상자 맨 위에 올려진 네임카드에는 깔끔한 글씨로 ‘리엘 반 레비넌’이라고 적혀 있었다.
난 다급히 상자를 풀어보았다.
“...........!”
말도 안 돼.
내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급품이 하나 가득 들어 있었다.
상자는 고작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일일이 열어보니, 열 개쯤 되는 상자에는 무도회에 필요한 모든 물품들이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
대체 누가 이걸...? 설마! 설마 황태자!?
맞아, 아닐 수가 없어. 이 재력은 황태자 정도가 되지 않으면 설명이 안 돼. 특히 번쩍 번쩍 빛나는 저 보석들...
젠장, 이거 다 팔면 남자 안 꼬셔도 팔자 펴겠다.
하지만 이 세상은 돈만 있다고 다 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보호받을 안전장치도 없이 세상에 나간 부유한 어린 여자란 범죄의 표적이 될 뿐이다. 특히 부모형제나 남편 등 지켜주는 남자 없이 혼자 사는 여자는, 모두가 쉽게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진짜 거지같은 세상! 치안도 개판이고!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전생의 헬조선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고 보니 까먹었던 전생의 나라 이름이 헬조선이었구나. 그곳도 시궁창인줄 알았는데, 여기에 비하면 천국이었구나...
아차,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보다 대체 황태자가 이걸 나한테 왜...? 내내 정체를 숨기더니 왜 갑자기?
혹시, 계속 숨기기엔 미안하고, 제 입으로 말하자니 머쓱해서 들켜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보낸 건가? 그럼 난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근데 어차피 난 본궁의 무도회에는 가지도 못하는데...
아, 혹시?
에라 모르겠다. 고민은 뒤로 하고 난 일단 허겁지겁 옷을 입었다. 이러다 무도회가 끝나면 말짱 꽝이었으니까.
줄리가 청소하러 가버려서, 나는 혼자 낑낑대며 옷을 입었다.
혼자 등 뒤로 리본을 묶느라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입어지긴 했다. 코르셋이 필요 없는 유디티안 스타일의 드레스라 다행이었다.
“예쁘다... 이게 정말 나야...?”
난 홀린 듯이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는 벌꿀색 리치블론드 머리를 풍성하게 내려트린, 오렌지 빛 눈동자의 소녀가 멍하니 서 있었다.
드레스는, 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다행히 내 머리카락은 따로 관리하지 않아도 알아서 탐스럽게 구불구불 웨이브졌다. 그래서 간단하게 보석핀만 꽂아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두어도 충분히 예뻤다.
마탑에 온 이래 햇빛을 쐴 일이 없어서인지, 내 피부바탕도 본래의 뽀얀 모습 그대로였다.
황태자가 보내준 상자에서 화장품을 골라서, 과하지 않게 얼굴에 살짝살짝 덧대 주었다.
목과 귀에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앙증맞은 장신구를 달아 주니, 번쩍이는 광채에 내가 두 배는 더 예뻐 보였다.
구두는 새하얀 실크새틴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푹신하고 깨끗한 카펫만 밟고 다녀야 할 것 같은 부담스러운 물건이었다. 구두를 신고, 같은 색으로 촘촘히 짜인 장갑도 살포시 껴 주었다.
피날레로 고급스러운 자수가 돋보이는 검은 색 부채를 들어주니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나가기 직전 몸에 향수를 칙칙 뿌려주고, 나는 들뜬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
문제는 방을 나선 직후였다.
“외궁까지... 어떻게 가지...?“
아... 이걸 정말 생각도 못 했다. 게다가 나 지금 새하얀 새틴 구두를 신고 있는데...
뭐 어쩌긴 어쩌겠는가. 걸어가야지. 다행히 마탑은 외성에 위치해 있어서 외궁과 아주 가까웠다.
난 서민근성이 발동되어, 비싼 구두를 이런 곳에서 신기가 아까워졌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었기에 구두를 벗어서 손에 들어버렸다.
지금 잠시 쪽팔려도, 무도회장에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중요해!!
“도, 도착했다...”
눈앞에 휘황찬란한 조명이 밝혀진 외성이 보였다. 저곳에서는 지금 무도회가 한창일 것이다.
난 재빨리 매무새를 다듬으며, 구두를 다시 신고 입구로 다가갔다.
입구의 시종은 나를 발견하더니, 정중하게 신분을 물었다. 딱 봐도 내 몸에 걸친 물건들이 범상치 않아 보여서인지, 태도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내 이름은 리엘 반 레비넌. 리테인의 레비넌 백작가에서 왔다. 사정이 있어 늦는 바람에 오라버니께서 먼저 들어가셨다.”
시종은 명단을 확인해보더니, 레비넌 백작가의 이름을 금세 찾아냈다.
초청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난 신분패를 보여주었다. 뭐 그게 아니라도, 귀족적 우아함이 철철 넘치는 내 모습 자체가 증명인 셈이었다.
시종은 자연스럽게 날 안내했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양쪽에서 열어주는 문으로 한 걸음 들어서자, 시종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외쳤다.
“레비넌 백작가의 리엘 반 레비넌 영애십니다!”
의도치 않게 난, 무도회의 주인공마냥 가장 늦게 등장했다. 그것도 이렇게 완벽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에스코트도 없이 혼자였지만, 난 당당히 걸음을 내딛었다.
삼삼오오 담소 중이었을 것 같은 무도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우와... 부담스럽네. 근데 이 장면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긴, 이런 연출도 고전 중의 고전이지.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난 떨리는 심장을 꾹 밀어 넣은 채, 우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어머... 저 영애는 누구...?”
“정말 기품 있어 보이네요.”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너무나 아름답군요.”
“자태도 흠잡을 데 없이 귀족적이에요.”
“타국의 왕녀라 해도 믿겠어요.”
귀부인들이 부채 뒤로 수군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눈빛만 봐도 뻔했다.
내가 좀 예쁘긴 하지! 그것도 귀족적이고 우아하게!!
풉. 한 시간 전까지 쭈그려 앉아 걸레질을 하다 왔을 거라고는 아무도 모르겠지.
“리.......엘?”
쫙 갈라진 인파 사이로, 이튼 오라버니가 걸어 나왔다. 그리고 그 뒤로는 귀부인들 무리에 끼여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비올레티가 보였다.
“오라버니”
난 활짝 웃으며 오라버니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오라버니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해주었다.
“리엘, 어떻게 된 거야?”
오라버니가 속삭이며 묻는 소리에, 난 얼굴을 기울이며 작게 답했다.
“사정이 있었어요. 옷이 망가져서... 요정의 도움을 받아 겨우 왔답니다.”
“...뭐?”
오라버니가 더 묻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나는 입모양으로 나중에 라고 말했다.
마침 다시 댄스타임이 된 건지, 음악이 막 연주되기 시작했다. 내 눈빛을 받은 오라버니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와 발을 맞출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나는 내밀어진 손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노동에 시달려 까칠해진 내 손이었지만, 다행히 장갑이 가려주었다.
우아한 음악에 맞춰, 난 날듯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오라버니와 호흡을 맞춰 나갔다.
짙은 남색을 입은 오라버니와 선명한 붉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는 내 모습은, 그 대비만큼이나 눈에 확 띌 것이다.
몸을 빙그르르 돌리는데, 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비올레티와 눈이 마주쳤다.
“훗”
난 보란 듯이 조소를 날려주었다.
분하겠지. 춤 실력이든 행동거지든 간에, 내가 뭐든지 너보다 더 귀족적으로 우아하다는 것도 열 받겠지.
보통 때였으면 이게 다 네 자리를 오래 뺏은 나 때문이라 생각해서, 너에게 미안해했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냐.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애교라고!
난 비올레티에게 시선을 떼고, 눈앞의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리엘...”
오라버니가 작게 속삭였다.
“이러고 있으니 꼭 예전으로 돌아온 것 같다.”
“오라버니...”
“리엘......”
-널 그렇게 쫓아내도록 두지 말았어야 하는데...
귓가에 들리는 오라버니의 생각을 느끼며, 난 잠시 추억에 잠겼다.
어머니였던 백작부인은 사교계의 일에밖에 관심이 없어, 나를 대부분 유모의 손에 맡겨두었다.
하지만 아버지였던 라스반 백작은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날 찾아와 무척 예뻐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그랬던 만큼 버려졌을 때 더 비참했다.
“그러네요. 벌써 까마득해요.”
이제는 그저 한때의 추억일 뿐...
“내가 정말 미안해.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해서... 널 지켜주지 못해서...”
“아니에요. 절 잊지 않아 준 것만으로도, 정말 너무 기뻐요.”
“리엘...”
할 말이 많았는데... 춤은 곧 끝나버렸다. 오라버니 역시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특히나 오늘 일에 대해서.
하지만 한 곡 더 추기엔, 저쪽에서 비올레티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어 힘들어 보였다.
“오라버니!! 리엘...! 너...”
“안녕, 네 덕에 내가 좀 늦었지?”
막 성질을 부리려던 비올레티는 내 말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분명 못 올 줄 알았는데... 대체 저 옷은 어디서 난 거지?
굳이 안 들려도 아는 사실이었기에, 난 충격 받지도 않았다.
“리엘? 그게 무슨 말이야? 비올레티 때문이라니?”
비올레티가 무서운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고개를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전 비올레티와 달리 몸단장해줄 시녀가 없어서 오래 걸렸다고요.”
뭔가 이상한 듯싶었지만, 내가 더 말하지 않자 오라버니는 갸우뚱 하면서도 넘어갔다.
“.....그런데 리엘, 옷은...?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자기가 보내준 옷이 아니니, 오라버니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그냥... 제가 그새 살이 좀 쪘는지 안 맞아서, 친구한테 급하게 빌려 입고 나왔어요. 죄송해요. 기껏 보내주셨는데...”
나한테 이런 걸 빌려줄 친구가 어디 있겠냐마는, 여자들의 사치품에 대해 까막눈인 오라버니는 대충 수긍하고 넘어갔다.
옆에서 비올레티가 한숨 쓸어내리는 게 보였다. 어휴... 보아하니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저질렀구먼. 한심하게...
“아냐 괜찮아, 리엘 아주 예뻐!! 내 옷은 다음에 입으면 되지. 아차, 이쪽으로 와. 내가 친구들을 소개시켜 줄게.”
올레! 올 것이 왔다!
비올레티는 내가 자기들 틈에 가족으로 끼워져 소개된다는 게 정말 못마땅한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여기선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잖아? 내가 완전 가짜라고 어떻게 말하겠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오라버니는 친구가 꽤 많은지, 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를 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리엘 반 레비넌이라고 해요.”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어쩌고 자작 영식은 얼굴이 벌게지더니 오라버니를 쿡 찔렀다.
“이튼, 네 녀석한테 이렇게 예쁜 여동생이 있는 줄 몰랐는 걸?”
“하하하. 내가 꼭꼭 숨겨뒀었지!”
그 오글거리는 분위기에, 비올레티의 얼굴은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하긴, 누가 봐도 내가 훨씬 더 예쁘고 진짜 귀족 영애처럼 우아해 보였다.
재치 있게 말도 잘하고 적당히 맞장구치며 꺄르르 웃어주니, 영식들이 입을 헤벌레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비올레티의 교양 수준은... 솔직히 말해서 아직 멀었다.
바보야, 너 부채 쓰는 법 틀렸어. 지금 상황에서는 입을 가리는 게 아니라 옆으로 비스듬히 꺾어서 두어 번 흔들어야지!
난 기분 좋게 여기저기 누비고 다녔다.
그러던 중... 한참 좋은 분위기 속에서, 비올레티가 내 옆에서 폭탄처럼 툭 내뱉었다.
“리엘, 황궁의 하녀노릇은 좀 어때? 많이 힘들겠다... 아, 원래 늘 하던 일이라 괜찮으려나?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마음이 참 너그러우셔서, 사생아도 저택의 하녀로 거두어주셨으니 참 다행이지 않니?”
“.........”
순간, 정적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