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29화 (29/134)

29. 무도회(2)

2017.01.11.

“아차... 이거 비밀인가?”

나쁜 기집애! 아차는 무슨 아차! 나만 엿 먹으라고 일부러 말한 거면서...!

여기 온 하녀들이 대부분 사생아라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니 아무렴 상관없겠지. 하지만... 순식간에 난 사생아 주제에 진짜 영애인 척 하던 사기꾼이 되어버렸다.

“비올레티!! 그게 무슨 망발이냐! 당장 사과하지 못해!?”

“오라버니... 제가 틀린 말 했어요? 아버지께서 너그러우셔서 리엘을 입적시켜 주신 거잖아요.”

이마에 실핏줄이 빠직 돋는 기분이었다. 여기서 차마 출생에 얽힌 비밀을 밝힐 수는 없으니, 설정대로 사생아라고 밀어붙이다니...

드레스도 찢어놓았으면서 날 그렇게까지 깔아뭉개고 싶어...?

비올레티의 말에,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영식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난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러게요, 오라버니. 아버지께서 차별 없이 저도 교육시켜 주시고 정말 감사해요. 다른 가문처럼 하녀로 자랐으면 이렇게 귀족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을 거예요.”

난 사생아임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은근슬쩍 ‘저택 하녀설’을 부정했다. 좌우를 슬쩍 둘러보니, 다들 내가 하녀로 컸다는 비올레티의 주장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허드렛일이나 하던 하녀출신이라 보기엔, 내 몸에 밴 기품은 결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세로 부채를 흔들며 재빨리 덧붙였다.

“얼마나 공평히 잘 교육시켜 주셨으면, 정실출신인 너만큼이나 예법과 교양에 통달하게 되었는지... 정말 감사할 따름이야.”

말은 ‘너만큼’이라고 했지만, 실제 속뜻은 ‘너보다’ 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누가 봐도 비올레티보다 내가 훨씬 나으니까.

“뭐.. 뭐?”

제 무덤을 제가 판 비올레티의 얼굴은 순식간에 시퍼레졌다. ‘난 정실 자식인데 사생아보다도 못한 수준이요’ 라며 스스로 광고한 꼴이었다.

음... 내가 좀 너무했나? 쟤가 저렇게 된 거 내 탓도 꽤 클 텐데...? 아냐아냐, 이번 건 정말 화났다고!

비올레티가 버벅거리는 사이 나는 재빨리 이어 말했다.

“아, 너에게도 고마워 비올레티. 너 대신 제국에 오게 된 게 나에겐 참 행운이야. 덕분에 마탑의 마법보조로 지내게 되었으니까.”

그 한마디에 여론은 금세 바뀌었다. 나에게 우호적인 말들이 터져 나왔다.

“오, 리엘양 마탑에서 일하는 건가요? 마법보조로요?”

“네. 마법을 공부하고 있어요.”

일부러 하녀, 아니 시녀 겸이라는 말은 쏙 뺐다.

그리고 난 재빨리 마나를 이끌어내어 보여주었다.

화아악!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사그라졌다.

“다행히 재능이 있는지 금방 느껴지더라고요.”

“오오오!”

“대단합니다, 리엘양!”

그랬다. 꿈꾸는 소녀처럼 무도회날짜만 손꼽아 기다리기엔 난 그리 순진하지 않았다. 일하는 틈틈이 마나를 느끼려 열심히 노력했고, 재능이 없는 편은 아닌지 곧 깨우칠 수 있었다.

애초에 전생의 편견이 문제였으니까. 난 이 편견을 뒤집어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이전 세상의 대기와 이곳에 무언가 다른 차이가 있는지 비교하며 느낌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곧 느껴졌다. 전혀 다른 이질적인 에너지가.

그 결과, 짠!

“대단하긴요. 겨우 걸음마를 막 떼었는걸요. 이젠 수식을 공부하고 있답니다.”

“대단히 명석하신 모양입니다!!”

이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어, 호의적인 반응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후훗, 이럴 줄 알았지. 이곳은 마법의 중추 그라츠 제국이잖아. 마법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이 남다르다고!

애초에 마법적 재능이 있으면 평민도 작위를 받는 세상에서, 사생아 출신이건 뭐건 알게 뭔가?

솔직히 내세울 건 출생밖에 없는 비올레티보다, 이렇게 예쁘고 우아하고 유능하기까지 한 내가 낫지!!

“과찬이세요. 호호호”

난 비올레티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날렸다.

***

신나게 무도회장을 누볐더니 조금 지쳐,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테라스에 나왔다.

“아... 덥다.”

벌써 10월인데, 후끈 달아오른 파티장은 오히려 더웠다.

“흐음. 기분 좋다... 내 첫 사교계 데뷔, 정말 성공적인데?”

근데 다 좋은데... 대체 이 옷을 보내준 황태자는 무슨 의도야? 만나러 올 것도 아니면서, 왜 보낸 거지?

설마, 내가 본궁 무도회에 못 간다는 걸 몰랐나? 아냐, 그렇다고 보기엔... 일단 옷을 보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무도회에 간다는 걸 알았다는 뜻이잖아.

그럼 조금만 조사해보면, 레비넌 백작가에게 온 초청장이 어느 무도회에 해당되는 지 알 수 있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난 성공적으로 무도회에 참석했고,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룻밤 꿈으로 끝나는 일이라도, 이 예쁜 옷과 구두, 장신구들은 영원히 남을 테니까...

이제 슬슬 싸늘해지기에, 난 다시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막.

“리엘”

누군가가 나를 작게 불렀다.

응? 발코니엔 나밖에 없는데? 잘못 들었나?

“리엘!”

하지만 목소리는 또 다시 들려왔다. 어두운 정원 쪽에서.

게다가 이 목소리는... 설마?

“이쪽이야 이쪽!!”

-으아. 하도 안 나와서 추워죽는 줄 알았네.

“리....일?”

헉, 진짜 왔어? 나 만나러?

게다가 밖에서 계속 기다린 거야...? 안쪽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여기에서 내내, 언젠가는 한 번쯤 나오겠지 하면서?

내가 언제 발코니에 나올 줄 알고...

그 정도로... 나 좋아하는 거야? 나한테 대체 왜 이렇게 호감을 가진 거지?

정말로 ‘나에게 반말남이라고 한 건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유치한 이유인가? 그게 이 세계에선 아직 먹히는 거야?

아니면... 아! 설마..!!?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귀엽다고 해 줘서 너무 기뻤다던가, 그건 내가 생각해도 조금 말도 안 되네.

근데 그 말에 진짜 좋아하긴 했는데... 무려 '나도 드디어 나 귀엽다고 해 주는 여자가 생겼어!'라며 방방 뛰었다고!

그래도 이건 아닌가?

난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가출해서,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안녕, 리엘?”

“..........”

“리엘?”

“.......리일, 여긴 어쩐 일이에요?”

황태자는 휘황찬란한 예복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긴 망토를 입고 있었다.

“아, 그게... 지나가다가 발코니에 네가 보이기에...”

황태자는 속마음과 전혀 다른 소리를 내뱉었다.

“지나가다가요...? 아, 리일도 무도회에 초대받았나 보네요?”

난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시녀인 나도 가문의 일원으로 초대받아 왔으니, 기사인 리일도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평민이라도 전도유망한 기사라면 그럴 수도 있으니 영 말 안 되는 설정은 아니었다.

“응, 으응...”

“이상하다... 저 안쪽에서는 못 봤는데...?”

“아, 금방 나왔거든.”

그러셨겠지. 여기가 아닌 본궁무도회에서 재빨리 도망 나왔겠지. 하지만 이 누님이 계속 모른 척 해 줄 테니, 아무 걱정 말렴.

“리엘, 이리 내려와 볼래?”

내가 멍하니 있는 사이, 발코니 아래로 다가온 황태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잡고 발코니 너머로 폴짝 뛰어내렸다. 황태자가 가뿐하게 날 안아들었다.

“휘유, 리엘의 몸무게는...”

“으악! 그런 거 어림하지 말라고요!!”

“아니, 새털같이 가볍다고.”

“......흠흠. 아무튼, 우리 또 만났네요?”

“그러게. 신기하다!! 우리 역시 인연?”

우연은 개뿔! 첫 번째, 두 번째만 우연이었고, 나머지는 다... 네가 나 쫓아다녔잖아!

고맙게도 말이지 크크큭.

“아니죠!! 그런 건 인연이 아니라...”

“....아...니야?”

내 단호박 같은 대답에 리일은 시무룩 풀이 죽어 보였다. 난 너무 늦지 않은 타이밍으로 잽싸게 뒷말을 이었다.

“운명이라고 하는 거죠!”

“그치!? 맞아! 운명!! 어마, 아니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도 운명 같은 사랑을 하셨다는데, 나도 언젠간 그럴 날이 올 거라 생각했어!”

황제랑 황후가 정말 로맨티스트인가보다. 부럽다...

리일은 눈을 반짝이며 신나했다. 그의 바다빛 눈동자가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도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전생에서 본 남국의 투명한 바다 같았다.

“운명이란 거... 정말 있겠죠?”

“없으면 만들면 되지.”

우와, 나 지금 심장 쿵 할 뻔 했어. 얘 연애스킬이 장난 아니네? 영애들을 얼마나 후리고 다닌 거야?

날 꼬시려 한 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난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리일도 정략결혼을 거부하긴 힘들 텐데요... 집에서 정해준 짝 없어요?”

평민출신이라는 가정과 조금 안 맞는 말이지만, 기사들이라고 정략결혼 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난 대충 물어봤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몰라 묻지 마!”

-그런 끔찍한 여자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절규 다 들린다. 근데 있으면 있는 거지 이건 또 뭐야. 아, 셀리나 공주는 집에서 정해줬다고 보긴 힘들구나. 저쪽에서 멋대로 들이민 거지...

셀리나 공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역시 예상대로의 생각이군. 후후후훗. 좋아. 아주 좋아.

“왜요? 있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어떻기에 그래요?”

아... 내가 황태자와 공주의 뒷담을 깔 날이 올 줄이야. 으하하하, 그 동안 당했던 수모가 싹 잊혀지는 기분이야!

“그냥... 난 우리 어머니처럼 천사 같은 여자가 좋은데... 그 여자는 성격이 만만치 않은 것 같더라고.”

야, 너 마마보이였어? 아 미치겠네. 예상치 못한 장애물인데? 엄마처럼 착한여자라니.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런 소리 하니? 아, 여긴 좀 옛날 세상이라 그런가?

“아... 어머니께서 정말 순수하고 좋은 분이신가 봐요.”

속마음과는 180도 다른 이 작업멘트! 나의 연기력을 보라!!

“응!! 아무튼 그래서 난 정략결혼에 결사 반대중이야. 나도 직접 내 사랑을 찾겠다고 말이지!”

“집에서 뭐라 안 하세요?”

“글쎄 별로? 마음대로 하라는데? 나도 두 분처럼 서로밖에 안 보이는 그런 사람 찾고 싶다고 했더니 그냥 웃으시더라고.”

-나도 세상에서 내가 제일 귀엽다고 해줄 사람이 필요해!!

푸흐흡. 난 순간 들리는 그의 생각에 침을 한 사발 뿜어버릴 뻔 했다.

저건 또 무슨 괴소리야? 그러니까, 황제랑 황후는 서로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고 우쭈쭈하고 그래서, 얘가 지금 서럽다는 그런...거야?

“흐음... 그렇군요.”

제길, 산 넘어 산이네... 미치겠다. 이제부터 착한 척 내숭떨면서 황태자를 귀여워해야 하는 건가?

아.. 그래서 그때 축제 때 귀엽다고 말하니까 입이 귀에 걸렸던 거니? 에휴... 이놈 참 순진하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아니, 나름 오빠인데... 아! 내가 아줌마였지 참!

어라? 그런데, 너 대체 내 어디에 반한 거니? 내가 봐도 난 천사표랑은 거리가 좀 먼데...? 물론 셀리나 공주보다는 착한 건 맞지!

“그래서 겸사겸사, 무도회를 좀 열심히 돌아다니는 편이야. 그런데 우연히, 리엘을 또 만나다니 신기하네?”

에휴... 너나 나나, 참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잘한다. 내 쪽이 좀 더 나쁜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나도 볼 겸, 공주 꼴도 보기 싫고 해서 일찍 빠져나온 건가? 아! 그런데 황태자가 공주를 저 정도로 싫어하게 된 거... 내가 일러바친 덕분인가?

꺄르르르르. 깨소금이다.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아랫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래? 세상은 다 돌고 돌아 돌아오는 거야! 나한테 엿 먹을 줄 몰랐지?

속마음과 달리 난 수줍은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게요... 세상 참 좁은가 봐요. 자꾸 마주치네요. 사실 오늘 무도회도 못 올 뻔 했는데...”

“왜? 무슨 일 있었어?”

“네... 사실...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오라버니가 드레스를 보내 주셨는데, 누군가가 갈가리 찢어놓았어요.”

“뭐라고!!? 어떻게 그런...!”

그 사정은 몰랐던 건지, 리일은 깜짝 놀라며 분개했다.

“너무 속상한 나머지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일하고 돌아와 보니 제 방에 새 드레스가 놓여있는 거예요!”

하지만 발끈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새 드레스 얘기를 꺼내니 눈을 반짝이며 내 반응을 살피는 게 보였다.

“와, 정말?”

-역시 잘 어울리네.

그래. 너였구나. 짐작은 했다만 정말이라니!

“네! 정말 놀랐어요! 집에서 절 챙겨줄 리는 없는데... 오라버니가 알고 다시 보내주신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난 슬쩍 황태자의 표정을 살피며 모르는 척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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