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무도회(3)
2017.01.11.
황태자는 당황한 듯 헛소리를 하며 얼버무렸다.
“그, 글쎄....? 동화 속 요정이 나타난 걸까?”
지금 설마 네가 요정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거야? 꾸엑. 고맙긴 한데 그건 좀...
“풉, 뭐예요 그게... 아무튼 정말 고맙더라고요. 아, 혹시!”
“호.. 혹시?”
내가 정체를 유추할 듯 말하자 리일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떨려왔다.
“혹시...! 검술대회에서 기사님?”
“뭐어어어?”
질투로 삐죽 튀어나오려는 리일의 입술이 귀여워 더 괴롭혀주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사실 질투를 유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리일이 안절부절 못하고 있기에 일부러 딴소리를 한 거였다. 내가 요정의 정체를 눈치 채면 그의 신분을 의심할 테니까.
“......일 리가 없죠. 아무튼 그 덕에 여기 올 수 있었어요. 누군지 알면 인사라도 할 텐데...”
물론 말과 달리, 아직 정체를 공식적으로 알고 싶은 마음 따위 없었다. 나한테 푹 빠져 신분차도 극복하고 사랑을 밀어붙일 때까지, 난 네가 황태자라는 걸 몰라야 하니까!
“음... 그 사람이 나중에 언젠가 짠 하고 밝히지 않을까?”
-리엘은 정말 눈치가 없나 보다... 하긴 이런 걸로 눈치 채긴 힘든가?
아냐, 나 눈치 겁나 빨라. 계속 시치미 떼서 진짜 미안... 머잖아 꼭 공식적으로 눈치 채 줄게! 그때까지 우리 좀만 더 친해지자.
“그렇겠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려고요.”
난 초롱초롱한 눈으로 리일에게 부담을 팍팍 주었다. 리일은 멋쩍은 듯 베시시 웃었다.
“아하하..”
이 귀여운 녀석을 좀 괴롭혀주고 싶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어, 난 불쑥 제의했다.
“아.. 추운데 우리 잠깐 들어갈래요?”
밤바람에 훤히 드러난 어깨 덕에, 사실 아까부터 싸늘해지고 있었다.
“아, 안에? 그게 그건 좀... 앗, 미안. 추울 텐데... 일단 이거라도...”
황태자는 망토를 벗어주려다가 멈칫했다.
분명 평범해 보이는 저 망토 안에는, 엄청난 예복이 가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분을 숨기려면 벗기 힘들겠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리일의 눈동자에는, 정체를 밝혀 말아 하는 고민이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괜찮아요!! 별로 안 추워요!”
하지만 잠시 갈등하던 리일은, 망토와 재킷을 한꺼번에 벗었다. 그리고 재킷은 겉이 안 보이게 재빨리 뒤집어서 자신의 팔에 걸고, 망토는 나에게 걸쳐주었다.
역시 이렇게 밝히기엔 모양새가 좀 안 나오지 결국 숨기려는 모양이었다.
“자, 여기 이거 입어”
안쪽에 받쳐 입는 셔츠는 재킷만큼 화려하지는 않았기에, 그나마 신분을 모른 척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엄청 고급스럽긴 하지만 말이다.
“고, 고마워요...”
괜히 춥다고 했어... 여기에 얼마나 서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싸늘해지는 날씨에 달랑 셔츠 하나라니 추울 텐데.... 얘 혹시 감기라도 들면 나 막 대역죄인으로 끌려가고... 그런 거 아니겠지?
“천만의 말씀.”
저렇게 쿨한 모습을 보니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될 것 같았다.
나 새디스트인가? 왜 이렇게 리일을 골려주고 싶지? 특히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저 모습을 보니, 자꾸만 충동이 일었다.
“근데 리일, 셔츠가 참 좋아 보이네요. 누가 보면 황태자 전하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케헥... 쿨럭.. 화, 황태자 전하라니... 그럴 리가. 절대 아냐. 그건 정말 아냐!”
큭큭큭 정색하는 모습이 귀엽네. 저렇게 어색한 표정에도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특히 웃을 때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는 모습이...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제 그만 괴롭혀야겠다. 근데 황태자님아, 너도 나한테 거짓말 하나 했다? 후후후...
“그보다 리엘, 요즘은 괴롭히는 사람 없어?”
나는 정작 그를 놀리고 괴롭히고 있는데, 황태자는 내게 다정히 물었다. 갑자기 양심이 콕콕 찔렸다.
“네? 아... 얼마 전에 근무처를 마탑으로 옮겼어요. 그 후로 아주 살만해요.”
정말 황태자가 해준 일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난 눈을 마주치며 집중했다.
“정말!? 진짜 잘 됐네!!”
-눈치 못 채고 안 떠날까봐 걱정했는데, 일이 잘 흘러가서 다행이야...
사실이었구나... 그가 무슨 마음으로 나에게 잘 대해주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다.
잠시 신세한탄 했을 뿐인데 날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다니... 난 지금 이 순간에도 널 속이고 있는데... 나 진짜 나쁜년이네. 이러다 나중에 벌 받을 거야...
솔직히 황태자가 잠깐의 흥미와 호기심으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라 해도 괜찮았다. 나 역시 떳떳한 입장은 아니니까.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아 점점 미안해졌다.
아무튼 별궁에서 빼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데... 모른 척 하려니 감사인사조차 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리엘?”
내가 한참 말이 없자, 황태자는 걱정스레 물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 하느라... 마탑으로 온 게 너무 기뻐서 조금 울컥 했어요. 그리고 저 마법도 배우고 있어요!”
“정말? 벌써 마법을 배우는 거야? 소질이 있나 보다!”
“네! 그런가 봐요! 이것 볼래요?”
나는 아까 무도회장에서 한 것처럼 마나를 이끌어내 보여줬다.
화아앗!
“와... 진짜 재능 있네? 마법사로 나가도 되겠어.”
황태자는 정말 반짝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기 부담스러워... 설마 지금 날 보고, 얼굴도 예쁘고 착한데 유능하기까지 한 여자애라고 홀딱 반한 거 아니지?
난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음... 그러기엔 이 다음 단계에 필요한 머리가 될지 모르겠네요. 일단 무도회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려고요!”
“응원할게! 잘되면 좋겠다!!”
그 말을 하는 황태자의 순수한 표정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고마워요.”
“아무튼, 만나서 참 반가웠어. 그리고 아까부터 말하려 했는데, 오늘 리엘....... 정말 예쁘다.”
화아악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안 돼! 어린애한테 반하지 말라고!
그에게 반해 사랑에 빠져버리면 이성을 잃고 헤매다가 비참한 끝을 볼 수도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마음이 내 마음대로 잘 조절되지가 않았다.
“고, 고, 고마워요... 리, 리일도 정말 멋져요.”
“나야 원래 늘 멋지고.”
“............”
이거이거, 왕자병과 내숭병의 만남인가? 아, 저건 진짜 황태자니까 병이라고 할 수도 없구나...
“그럼 다음에 또 봐! 난 정말 가봐야겠다!!”
내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황태자는 어둠속으로 휘적휘적 사라져갔다.
내가 신분을 알면서도 밀당하고 있는 걸 알면 정말 얼마나 실망할까... 그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
무도회는 그렇게 끝났다.
다음날의 일 때문에 밤새 놀 수 없었던 나는, 오라버니에게 인사를 하고 바로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바로 현실로 복귀했다. 마치 무도회도, 황태자와의 만남도 하룻밤 꿈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줄리... 힘들어 죽겠다.”
“응...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괜찮을 거야. 폐하의 시찰만 끝나면 한시름 놓겠지.”
“휴우, 높은 사람 한 번 오면 정말 난리도 아니네. 왠지, 정작 폐하는 이런 사소한 거 신경도 안 쓰실 것 같은데... 어설픈 중간 대가리들이 아랫사람 잡는 거지.”
“쉿, 리엘.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아무도 없는데 뭐.”
“그래도...”
“에구구 허리야. 이제 거의 끝나간다! 힘내자!”
청소 및 정리정돈, 마도구 및 마법서 관리, 서류정리 등등 할 일은 참 많았다. 그래도 하루 종일 바쁘게 뛰어다닌 덕인지, 오후 무렵에 일은 완벽히 끝났다.
나를 비롯한 마탑의 모든 인원들은, 황제를 맞이하기 위해 입구에 나와 일렬로 줄을 섰다.
헉, 왔다!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에서 누군가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모두 재빨리 허리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깊이깊이 허리를 숙였다.
황제의 그림자와, 함께 온 누군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모습이 발밑으로 보였다. 여자...? 그림자의 모양이 드레스 자락인 걸 보니, 동행은 여자였다. 그럼 황후려나?
리일은 같이 안 왔네? 들리는 소문으로는 일 때문에 북부에 시찰 나갔다던데 역시...
피이... 난 괜히 아쉬워졌다. 만나진 못해서 멀리서라도 보고 싶었는데... 헛, 내가 무슨 생각을..! 미쳤어. 나 진짜 리일한테 반한 거야? 안 돼 안 돼!!
머리를 탈탈 비워낸 나는, 다 지나갔겠지 싶어 고개를 살짝 들었다가 화들짝 놀랐다. 중간에 멈춰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는 황제의 얼굴이 비스듬히 보였다.
황급히 고개를 다시 숙이는데, 황제의 얼굴 역시 묘하게 낯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 저 얼굴...?
내가 안면인식장애 수준으로 사람 닮은꼴을 잘 못 찾아내긴 하지만, 동일 인물을 보면서 기억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는 그때 비원에서 황후 곁에 있던, 내가 호위로 착각했던 바로 사람이었다.
헐. 황제였어? 분명 20대 중반의 젊은 청년으로 보였는데... 둘 다 방부제라도 처먹었나? 그리고 황후를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당연히 호위기사인줄 알았는데.
남녀차별이 꽤 심한 이 세계에서, 부인에게 존대를 쓰는 남편은 절대 없다. 하나같이 남편은 부인에게 반말, 부인은 남편에게 공대하는 게 보통인 문화였다.
하긴, 어디 이 세계만의 일인가. 전생에서도 흔한 일이었지.
그런데 심지어 저 사람은 절대자인 황제니, 내가 오해할 만 했다. 아... 정말 황후를 떠받들고 사는구나... 황후 부럽다.
그런데 동행한 여성은 은발이 아닌 걸 보니, 황후는 아닌 모양인데... 누구지? 뒤통수밖에 안 보이니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를 포함한 시중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일행이 안으로 들어가기만을 기다렸다.
“자, 이제 모두 원위치로 돌아가 조용히 할 일을 해라. 폐하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실 테니,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 없도록 주의하도록. 만약 폐하를 마주치면, 놀라지 말고 예법에 어긋나지 않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거라.”
곧 영접 행사가 끝났고, 우리들은 바로 해산할 수 있었다.
“휴...”
십년감수했네. 고개 함부로 쳐들지 말아야지.
***
이제 방으로 돌아와 쉴 일만 남았다고 좋아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정말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딱 마주쳤다.
“여긴 또 왜 왔어? 나한테 시비 걸러 온 거야?”
복도에서 비올레티를 정면으로 만나버렸다.
“뭐? 내가 너처럼 할 일없는 줄 알아?”
“너 할 일 없잖아. 그러니 남의 드레스나 찢어놓은 거 아냐?”
“입 안 다물어? 이제 와서 그런 별 것도 아닌 걸로 협박하는 거야? 그렇게 억울하면 오라버니한테 이르던가! 뭐, 네까짓 게 일러봐야 날 어쩔 건데?”
“후... 됐다. 됐어. 내가 상대를 말아야지. 나한테 시비 걸러 온 거 아니면 이만 비켜줄래?”
“착각하지 마! 누가 너 같은 거에 관심이나 있대? 오늘은 마탑에서 마법발표회가 있다 해서, 아카데미에서 단체로 견학 왔을 뿐이야!”
아하. 아카데미생은 학부무관하게 마탑을 견학하는 코스가 있다더니, 오늘이 바로 그 마법발표회 겸 견학날인가 보다.
요즘 무도회에만 정신 팔려서 오늘이 무슨 날이기에 중요한 건지도 모르고 있었다. 아... 그래서 황제도 시찰 온 거구나? 마법 장려 제대로 하네...
“그래. 견학 잘 해라. 난 가보련다.”
내가 관종처럼 굴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고 등을 돌렸다. 설마 견학을 핑계로 날 괴롭히러 온 건 아닐 테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딱 등을 돌린 순간,
“.........!!!”
뜨허...!!!
“화, 황제폐하를 뵈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