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사고(1)
2017.01.12.
왜 하필 뒤돌자마자 황제가 나타나는 건데!
막 코너를 돈 황제가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등장하는 바람에, 정면에서 마주쳐버렸다.
일단 무조건 허리를 숙였다. 비올레티도 깜짝 놀라서 인사와 함께 몸을 숙이는 게 보였다.
헉, 헉 놀래라... 여긴 중요한 발표가 있다는 대강당 근처도 아닌데... 정말 생각도 못한 곳에서 마주치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 이래서 아까 시녀장님이 말해준 거구나... 어디서 마주칠지 모르니 당황하지 말라고. 황제를 두 번이나 보다니, 여기가 확실히 별궁구석보다는 권력의 중추구나 싶었다.
저벅저벅
내가 놀라든 말든, 황제일행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냥 휙 지나가 버렸다.
휴... 다행이다. 십년 감수했네.
황제는 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비원에서 봤을 때는 그냥 지나가던 하녀1 이었고, 레스토랑에서 마주쳤을 때는 워낙 순식간에 리일에게 끌려 나갔다. 그러니 날 제대로 보지도 못했을 거다.
왠지 아쉬워서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역시 리일은 없었다. 아까 동행한 여성도 따로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사람이 이렇게 인상이 달라질 수 있구나... 황후와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비원에서는 정말 부드러운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냉혹한 무표정이 무서울 정도였다. 엔릴의 아버지라 보기엔 분위기가 영 딴판이었다. 역시 출생의 비밀!? 빠라바라밤!!
헛, 내가 또 무슨 개소리를...! 그나저나... 황제폐하... 끝내주게 잘 생겼다!!!
얼핏 본 거지만, 차가운 조각상처럼 진짜 완벽한 얼굴이었다. 기럭지도 훌륭하고 몸매와 비율도 최고였다.
젠장 황후 부러워! 저걸 매일 보고 산단 말이야? 그리고 저 얼굴에 키스하고... ...키... 키스하고 그리고... 음... 그러니까... 저 얼굴이랑 밤에... 꺄아아악!! 그래서 그렇게 잘 생긴 아들을 낳은 거야!
아, 내가 지금 또 무슨 헛소리를... 엔릴 탄생비화라니, 그딴 음흉한 상상을..! 감히 시아버지 얼굴을 보고 말이야. 앗, 아니 이게 아니라... 벌써 시아버지 운운하다니 이것도 개소리인데...
어쨌든 리일은 잘생겼다는 결론!
난 결국 손으로 머리를 팍팍 후려치며, 망상에서 벗어났다.
“휴...”
조금 전의 해프닝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돌아가려는데, 문득 멍하니 굳어있는 비올레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비올레티?”
얘가 눈 뜨고 서서 자나 싶어서 불러봤다. 눈빛이 영 몽롱한 게 정상 같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영 맛이 가 보였기에, 상종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난 무시하고 가려했다.
“저분이 황제 폐하.....? 너, 너무 멋있어.... 하아아...”
이게 드디어 미쳤나. 설마 한 눈에 뿅 간 거야? 넘볼 걸 넘봐라.
“풋, 어린 시절부터 오매불망 짝사랑하던 오라버니도 권력 앞에서는 소용없나 보구나?”
“뭐야?”
이튼 오라버니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기도 아니까 다른 데로 눈을 돌리려는 모양인데, 하필이면...
넌 왜 하나같이 골라도 그 모양이니. 근친에 유부남에...! 그것도 무려 무섭기로 악명이 자자한 제국의 황제라고!
난 비올레티에게 딱 잘라 경고했다.
“정신 차리고 꿈 깨.”
내 알 바 없는 못된 기집애이긴 하지만, 괜히 쟤가 미친 짓 해서 오라버니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튀면 곤란했다.
“뭐? 내가 잘 될까봐 벌써 배 아픈 거니?”
“뭐라는 거야. 잘되긴 뭘 어쩌겠다고. 저 옆에 자리 없다니까?”
“왜 없어? 황비의 자리가 비었잖아!”
“꿈도 야무지다. 퍽도 가능하겠어.”
황제는 황후밖에 모른다고 소문이 자자한 걸 모르냐?!
솔직히 나이차도 20살이나 나잖아! 황제가 비주얼은 20대지만 실제로는 30대라고!
사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세계에서 열 몇 살 나이차는 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고 저렇게 잘생겼으니, 비올레티가 맛이 갈 만 하긴 하다.
“뭐야!!?”
당연한 걸 말했건만 왜 이렇게 발끈하셔?
아니 근데, 보통 황태자를 노리는 게 상식 아닌가? 얘 연상 취향인가...?
솔직히 나야말로 합산나이를 생각하면 황제가 더 또래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전생을 전부 기억하는 성숙한 영혼은 아닌 건지, 정작 내 정신연령은 지금 나이인 16세보다 그다지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연상보다 또래를 선호하는 난, 당연히 황태자 쪽이 더 끌렸다.
황제가 조각처럼 잘생긴 차가운 미남이라면, 리일은 황후를 닮아 아주 예쁘장하게 잘생긴 따뜻한 분위기의 미소년이었다. 훨씬 내 취향에 잘 맞는.
에헤헤. 우리 리일... 헉, 나 미쳤나 봐.
어쨌든 얘가 나랑 연적이 될 일이 없어 다행이긴 한데... 잠깐! 우리 둘 다 목표를 이루면, 저게 내 둘째 시어머니가 되는 거야? 오 마이 갓! 반드시 방해해야겠어!!
“괜히 상처받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포기해라. 쯧쯧. 좋은 꼴 못 볼걸? 너만 불쌍해져.”
“야!!!”
어차피 비올레티의 저 꿈이 이뤄질 가능성이 0에 수렴한다. 내가 황족들 조사해보면서 좀 들은 소문이 있거든...
비어있는 황비 자리에 딸을 밀어 넣어 권력을 잡으려던 귀족가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이야.
권력은커녕 황제의 진노를 사서 멸문당할 뻔 했다지? 그 후로는 감히 누구도 황비라는 단어도 못 꺼낸다고 한다. 휴... 황제님 역시 무서워...
“으휴...”
“야!!!! 너 지금 나한테..!!”
발악하기 시작하는 비올레티를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녀를 무시하며 재빨리 방으로 돌아갔다.
***
비올레티고 뭐고, 일단 내 코가 석자다. 어떻게든 마법을 배워서 작위를 받고 이곳에 귀화해야 한다.
사실 전에는 이 정도 절실하지는 않았는데, 비올레티를 마주치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그녀를 본 순간, 리일과의 관계에 새까만 먹구름이 낀 기분이었다.
내가 잘되는 꼴을 절대 못 볼 비올레티는, 내가 황태자비가 되는 꼴을 보느니 같이 죽자는 생각으로 내 신분을 폭로하고도 남을 거다. 그럼 난 귀족사칭죄로 끝장나겠지.
그렇게 되기 전에 무조건 이곳 신분을 만들어 대비해 놔야 한다. 비올레티가 미친 짓 하기 전에 얼른 리테인 국적을 버려야지!
하지만 원한다고 아무나 제국에 귀화시켜 줄 리가 없었다. 특히 적국의 볼모인 내가 ‘저 여기 제국민 될래요!’ 한다고 해 줄 리가...
그러니 방법은 오직 마법사 서임을 통한 정식 절차밖에 없었다. 난 천만다행히 최소한의 재능, 감응력이 있으니까 이제 죽도록 노력만 하면 돼!
사실 오늘부터 마법연습을 하려고 아주 작정을 하고 벼르고 있었다. 원래는 파티에 다녀오자마자 진즉 하려 했는데, 황제 시찰 때문에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던 것이었다.
이제 황제맞이 행사도 치르고 왔으니, 혼자 뭔 짓을 해도 상관없었다.
마나 발현을 보여주자, 마탑에서는 적극 장려하며 실험실도 빌려주었다.
파앗
일단 워밍업으로 마나를 발현해 보았다.
“아, 난 역시 천잰가? 헙!”
마나 감응이 너무 잘되는 거 같아, 나도 모르게 으쓱하는 마음이 육성이 튀어나왔다.
“휴... 쪽팔릴 뻔 했네.”
다행히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제 다음 단계! 머릿속으로 수식을 계산해서 마나를 배열하며 변환시키라고?
와... 겁나 복잡해.
그나마 힐링마법이 마나의 본질과 거의 유사해서 변형과정이 적어 쉽다고는 한다. 하지만 난 힐링 따위 관심 없다.
좀 더 쓸모 있는 마법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변형이 아주 크지 않으면서도 활용도가 다양하다는, 바람 계열의 초급 마법을 하나 골라들었다.
물론 수식 따위, 계산은커녕 이해도 안 간다. 진짜 천재만 할 수 있거나, 아주 오래오래 차근차근 배워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방법이! 아니고 꼼수가 있다.
사실 마나를 못 느껴 전전긍긍 대는 동안, 난 내 기억력을 활용해서 수식을 하나 달달달 외워 놨다.
맨 처음 식부터 시작해서 십여단계에 이르는 풀이과정을 전부!
뭘 굳이 머리를 써서 한 단계 한 단계 풀려 들어! 완성된 계산식과 결과값을 통째로 외우면 되잖아!
비유하자면 이거 뭔가... 계산하지 않고 과정을 외워서 시험 보는 느낌이랄까...
우와, 천하에 무식한 나님이네!
문제는 식을 외워 놔도, 자신이 끌어온 마나의 입력량에 따라 결과값이 달라지기 때문에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하지만!!”
난 표를 보고 모든 경우의 과정과 결과를 몽땅 외웠다. 그러니까 내가 가장 익숙하게 끌어오는 마나량을 대충 파악해서, 그 근처 범위에 해당되는 값을 넣은 풀이과정들을 전부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머리가 고생해야지. 뭐, 좀 이상한 비유 같지만 어쨌든 그렇다.
“.............휴우... 그럼 이제 실전만 남은 거지? 긴장 풀고 자, 그럼 이제 시작!”
일단 눈을 감고 마나를 느꼈다. 옳지 역시 잘된다.
내가 달달 외운 수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잘 조절해서 끌어오고... 좋아! 그 다음에는 이거에 해당하는 계산과정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면서 단계별로 마나를 배열하며 변환!
“...............읭?”
시작부터 흐트러졌다. 채 두 단계도 변환 못한 마나가 맥없이 흐트러졌다.
“첫 술에 배부르랴!? 에잇 파이팅! 다시 한 번!!”
“...............?”
다, 다시!
“...............또 실패?”
그래도 두 단계까진 성공했는데...
“...............헐”
하아, 이게 식만 외운다고 되는 게 아니구나... 식의 결과에 따라 마나를 배열하고 변환시켜 유지하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니, 정말 어렵다.
젠장, 될 때까지 무한반복이다!!
“........”
“..............”
“......................”
미치겠네. 지금 몇 시야? 벌써 몇 번째 실패지?
그래도 그나마 고무적인 것은, 조금씩 많이 나아간 단계에서 실패하는 거라고 할까?
뒷 단계에서 실패할수록, 마나 그대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조금씩 바람의 느낌이 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구구! 죽겠다! 일단 좀 쉬어야겠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난 그냥 실험실 바닥에 벌렁 누워버렸다.
“하아......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구나.”
머리 아파. 이대로 그냥 자버리고 싶다. 눈이 막 감긴다...
벌떡
하지만 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그리고 얼마나 했다고 벌써 늘어지는 거야! 정신 차려!
창가에 다가가 찬바람을 좀 쐬니 머리가 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어?”
문득 창밖으로 마침 황제가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막 마차에 오르고 있는 황제는, 처음처럼 거창한 배웅 없이 그냥 조용히 혼자 돌아갔다.
번잡한 걸 싫어하나 보구나. 황제라고 해서 엄청 권위적이고 과시하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럼 아까 그 요란한 마중 행사는 역시 마탑장이 멋대로 난리피운 거네? 괜히 쓸데없이 우리들이나 닦달하고 쯧쯧.
탁
난 혀를 차며 창문을 닫아버렸다. 잘생기긴 했지만 감히 내가 넘볼 상대가 아니니 금세 관심을 껐다.
난 오직 리일, 그가 좋았다.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시작한 관계였지만, 어느새 진심이 되어버린 건지 그를 속이는 게 너무 미안했다.
나 정말 많이 좋아하나봐... 그러니 이젠 더 이상 속이고 싶지 않아.
얼른 당당한 신분이 되어, 리일이 황태자라는 걸 알아버렸다고 떳떳하게 말하고 싶었다. 물론 알게 된 시점은 조금 각색해야겠지만...
“난 할 수 있어! 마법소녀 리엘!!”
지쳤던 몸에 다시 활력이 돌았다. 황제가 떠나는 모습을 보니,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같은 공간 어딘가에 황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자 그럼 다시 파이팅!!”
진짜 열심히 사투한 결과 난 거어어어의 마지막 단계까지 왔다. 그 결과로 실험실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실패할 때마다 흩어져 날아가 버린 마나의 바람 때문이었다.
에휴, 이걸 언제 다 치우냐.
아무래도 오늘 내로 성공하긴 글러먹은 것 같아서, 딱 한 번만 더 해보기로 했다. 마지막이니 진짜 진짜 집중해서!!
하도 많이 실패해봐서 그런지, 앞부분은 참 순조로웠다. 뒷부분은 아직 익숙해질 만큼 실패해보지 않아 아주 조심스럽게 차근차근 집중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되.. 될 것 같아! 이번엔 정말!
지성이면 감천인 건지, 마지막 단계까지 난 마나배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제 딱 하나, 이대로 발현해 내면 된다.
헉, 그런데 어디에 강풍을 쏘지? 창밖으로 쏘아 보내야 하는데, 아까 별 생각 없이 창문을 닫아버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열어두었어야 하는데!
잠시 당황한 사이, 마나배열이 흐트러지는 게 느껴졌다. 중간단계에서면 모를까, 발현하려는 순간 엉클어지면 폭주할 수가 있어 매우 위험하다.
아, 안 돼!!
콰앙!!
안 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마나는 멋대로 폭주해 버렸다.
“으아악!!”
“꺄아악!”
퍽, 철푸덕
“아, 아윽... 아... 쿨럭 쿨럭...”
그런데 조금 전에 내 비명소리가 아닌 것 같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이었나?
그때 갑자기 귓가에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전하!!!!!”
“황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