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사고(2)
2017.01.13.
처음엔 머리를 부딪쳐 헛것을 들었나 했다.
강한 풍압에 벽으로 튕겨나가며 꽤 세게 부딪쳤는지 온 몸이 다 아팠다. 하지만 눈앞에 별이 번쩍하지 않는 걸 보니 머리는 무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황녀라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전하...? 황녀전하...?
“아......”
그제야 눈을 들어 앞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험실은 문짝이 날아가 있었고, 그 너머엔 웬 여자가 - 황녀로 추정되지만 절대 아니길 바라는 젊은 레이디가 보였다.
호위기사가 날아오는 문짝으로부터 감싸며 밀친 건지, 황녀는 바닥에 넘어져 쓰러져 있는 상태였다.
안 돼... 안 돼! 황녀라니... 안 돼! 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무슨 일이냐고!!!
“...............”
안 돼...
“저쪽이다! 당장 체포하라!!”
너무 당황해서 변명이나 저항할 생각조차 나지 않고 그저 멍했다.
“................”
양쪽에서 나를 거칠게 포박하는 게 느껴졌다.
마법이 폭주해서 상당한 무리가 온 상태였던 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안 돼... 안 돼... 안 돼!!!!!”
무언가 악몽을 꾼 것 같은데...
“헉, 허억... 헉....”
비명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린 곳은, 어둡고 추운 지하감옥이었다.
“......역시 감옥... 이구나. 꿈이 아니었어...”
망연자실해서 눈물이 주르륵 나왔다. 난 그저 이 막막한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한 것뿐이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죽겠지? 황족에게 상해를 입혔으니, 아주 처참하게 처형당하겠지...?
“흐윽... 흑... 흐어엉... 엉엉... 흐흑... 흑흑...”
슬프게도 정말 변명의 여지도, 억울하다 말할 수도 없었다.
내가 제어하지 못해 폭주한 마법에 황녀가 다쳤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끝장일 게 뻔했다.
“흐엉엉... 나 어떡해... 흐윽... 죽기 싫은데...”
이렇게 되려고 그동안 그렇게 발버둥친 건가 싶었다. 인생이 이렇게 끝난다니...
낚시도 마법도 전부 실패하면, 볼모생활이 끝나 리테인으로 돌아가 백작가에서 곧바로 쫓겨나게 될 까봐 초조했었다. 살인멸구를 당할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마법사가 되면 리일 혹은 다른 누군가를 낚지 않아도 여기에 눌러앉을 수 있으니, 오직 마법에만 매달렸다.
만에 하나 리일과 잘된다 해도, 오히려 든든한 신분은 더 필요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될 줄이야...
차라리 그냥 운명에 순응하고 살 걸...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황태자고 마법이고, 그냥 시녀인지 하녀인지로 죽은 듯이 살걸...
얼른 속성으로 인정받아 팔자 펴고 싶다는 생각에 무리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실패하며 집중력이 많이 흐트러진 걸 스스로 알면서도 욕심을 낸 게 문제였다.
애초에 내가 자초한 짓이었지만, 하필 운 나쁘게도 그 근처를 황녀가 지나가고 있다가 말려든 게 미칠 일이었다.
왜 하필 그 때 거기를 지나가서...
잘못은 내가 해 놓고 남 탓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안 되는 거 아는데... 너무... 너무 두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흐흑... 흑흑...”
황녀가 마탑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황제랑 같이 왔던 사람이 황녀였던 거구나. 누구인줄도 몰랐는데, 사고 친 덕에 알게 되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창밖으로 봤을 때 황제가 분명 ‘혼자’ 돌아갔었어... 그러니 동행했던 황녀는 아직 마탑에 남아있던 거고...
그래도 왜 하필 운 나쁘게도 말려들어서...!! 그쪽 입장에서도 운 나쁜 일이겠지만, 난 그야말로 인생이 끝나버릴 일이라고... 흐흑.. 나 어떻게 해...
괜히 암담하고 막막하다 보니 죄 없는 황녀도 황제도 원망하고 싶어질 정도다. 그러니까 왜 두고 혼자 돌아가서... 아니, 왜 같이 안 돌아가고 마탑에 남아서...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남 탓하는 이 버릇 고쳐야 하는데... 하는데... 으어엉.... 몰라... 어차피 죽을 거 알 게 뭐야...
“으흑......”
그저 눈물만 끝없이 났다. 그리고 너무 춥다...
심문 당하겠지? 설마... 고문당하면 어떻게 하지?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울다가 잠들었다 깼다가를 반복하며, 시간이 얼마나 흐른 지도 모른 채 난 멍하니 갇혀 있었다.
끼이익
쇠가 마찰되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렸다.
“심문이 있을 예정이니 죄수를 데려 나와라.”
누군가의 명에 따라, 간수 두 명이 나를 일으키며 바닥과 연결된 족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목을 결박한 족쇄는 그대로였다. 게다가 쇠독이 올라서인지, 살에 닿은 부분이 퉁퉁 부어 너무 아팠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리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줄지도 모르는데... 하필이면 그가 멀리 떠나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난 그저 멍하니 끌려갔다. 도착한 곳에서 간수들이 나를 의자에 앉혔다. 몸을 묶기 시작하자,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불안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방 안의 풍경은 그다지 살풍경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고문도구와 피가 튄 음산한 벽이라도 상상했는데, 그냥 평범한 방에 의자가 몇 개 놓여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간수가 나가고, 이윽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들어왔다.
“지금부터 심문을 시작할 텐데, 묻는 대로 잘 대답하면 험한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게.”
“.......”
난 두려움에 대답도 못하고 얼굴만 미친 듯이 끄덕였다.
그렇게 말한 남자는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잠시 바닥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화악
잠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가 순식간에 스며들 듯 사라졌다.
뭐, 뭐였지? 그러고 보니 바닥에 무언가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마, 마법으로 고문당하는 건가...? 그래서 방에 아무것도 없는 건가...?
두려움에 몸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어느새 난 이빨도 딱딱 떨고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않거나, 자꾸 거짓말을 하려 들면 어쩔 수 없이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써야 할지도 모르네. 알았는가?”
덜덜 떠는 날 보며,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네, 네..!! 다, 다 말할게요.”
난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 곧 질문이 시작되었다.
“황녀 전하께 상해를 입힌 일에, 어떠한 고의적인 의도가 있었는가?”
“아, 아니에요! 절대, 절대 그렇지 않아요! 그건 그.. 그냥 사고였어요. 황녀 전하께 상해를 입히려 했다니요..! 정말 아니에요! 제발, 제발 믿어주세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말해봤자 과연 믿어줄까 의문이었다.
어차피 이런 옛날 시대라는 게, 답정너 스타일로 이미 죄를 확정지어 놓고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고문하는 거 아닌가...
언제 갑자기 마법이 발동되며 나에게 고문이 가해질지 몰라 너무 무서웠다.
“황녀 전하께서 마탑에 방문하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 계획한 게 아니라는 건가?”
“아, 아뇨... 전혀 몰랐어요..! 사고가 난 후에야 그 분이 황녀전하인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마탑에 오셨을 때, 모든 고용인들이 나와 영접했다고 들었다.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그건, 그건 알고 있었지만... 같이 오신 분이 황녀전하이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오시는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미리 알고 그런 짓을 계획했겠어요!”
“......그럼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가, 엉뚱하게 황녀 전하께 그런 짓을 하게 되었다는 건가?”
황녀에 대한 혐의를 부정했을 뿐인데, 어째서 갑자기 황제의 이야기가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걱정한 그대로 나에게 뭐라도 뒤집어씌우려는 건가...?
“폐, 폐하라니요!! 아니에요!!! 저, 저, 정말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정말 사고였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흐흑... 으흑....”
황제 시해라니...
갑자기, 어렸을 때 마녀들이 화형당하는 모습을 보았던 게 떠올랐다. 살이 타는 냄새도 지독했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온갖 고문을 당한 듯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던 그들의 모습이었다.
신전 세력이 강한 리테인은 마법을 탄압하며 대대적으로 마녀사냥을 했기에,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
나도 그런 꼴을 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것도 마법으로...
정말 헬조선이 그리워진다. 그래도 거긴 인권이란 게 있었는데... 여기서도 마녀사녕처럼 자백하지 않으면 고문, 억지로 자백하면 사형, 설마 이렇게 되는 걸까...?
“정말 단지 실수였을 뿐이라는 건가? 사고를 가장한 다른 의도가 없었나?”
“정말이에요... 의도라니요... 절대 그런 뜻 없었어요!!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제발 믿어주세요... 제발... 제발... 흑흑...”
엄습해오는 절망감에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난 정말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지금도 이미 망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만약 고의적으로 황족을 시해한 거라 판명되면 훨씬 더 끔찍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려면, 아니, 곱게 죽으려면 믿어달라고 빌고 또 빌어야 했다.
“사고라.. 하지만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배후가 있을 수도 있지.”
그래도 다행히 심문자는, 고의가 아니었다는 내 말을 완전히 개소리 취급하며 무시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나아진 건 별로 없어 보였다.
“아니에요! 사고였을 뿐인데 어떻게..!”
“때마침 그 사고를 유발하도록 조장한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우연이라고 보기엔 타이밍이 너무 공교롭군.”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떻게 하필이면 그 때 거기에서 딱 그렇게 된 건지...
“배후 같은 거 없어요! 정말이에요... 제 잘못은 맞지만, 정말 사고였어요... 으흐흑... 제발 살려주세요... 아니, 그냥 고통 없이 죽을 수 있게라도 해 주세요... 제발... 흐어엉.... 흑흑... 흐윽...”
어쩌다가 한 순간에 인생이 이렇게 된 건지... 너무 암담한 현실에 난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내가 펑펑 울어대자, 심문자는 잠시 기다려 주는 듯 가만히 있었다.
“......정말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사고를 가장하여 전하를 시해하려는 게 아니었는가?”
“아니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정말 아니에요...! 전하께 상해를 입힌 건 정말 죽을죄지만, 정말.. 정말 그런 게 아니에요!”
“.............”
피 토할 것 같은 내 절규에도 심문자는 내 대답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는 듯 담담히 있었다. 오직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같은 것만 간간히 확인할 뿐이었다.
이후에도 심문은 꼬치꼬치 계속되었다. 끝도 없는 비슷비슷한 질문들은 날 매우 지치게 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우려했던 험한 일은 전혀 없었다.
의아해하면서도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말하고 말하고 또 말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심문자는 간수들을 불러 나를 다시 감옥에 돌려보낼 것을 지시하며 의자에서 풀어 주었다.
나 살 수 있는 걸까...?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
똑똑똑, 벌컥
“아바마마!”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황제의 모습에, 황녀 아나이스는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나나, 다친 데는 괜찮니?”
다정하게 물은 황제는 딸에게 마나를 펑펑 부어 주며, 혹시라도 남아있을 다친 곳을 꼼꼼히 살펴봐 주었다.
이미 황궁 주치의과 힐러가 온갖 치료를 퍼붓고 갔음을 알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게 부모 마음이었다.
“네. 괜찮아요. 별로 큰일도 아니었는데 뭘요.”
그냥 손목을 삐고 군데군데 타박상을 입은 정도였다. 물론 황족에게 그 정도 상처면 황궁이 발칵 뒤집어질 큰일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내가 떠난 직후 네가 다쳤다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나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구나.”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 아바마마, 근데 저도 이제 성년인데... 아직도 그렇게 부르시면...”
“..........‘우리 나나공주님’이라고만 안 부르면 되는 거 아니었니?”
“아.나.이.스 라고 제대로 불러주세욧!”
“그래... 우리 딸이 벌써 다 컸나 보구나. 네가 정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싫은 건 아니지만...”
왠지 시무룩해 보이는 그 모습에 마음이 약해질 뻔해서, 아나이스는 말끝을 흐렸다.
“아니지만...?”
하지만 이러다 또 나나가 되어 버릴까봐, 아나이스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쌍둥이 동생도 아직까지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리일이라는 이름은 그래도 좀 사람 같은데, 나나는 뭔가 강아지 같은 간지러운 이름이었기에 더 민망했다.
“아무튼! 아바마마 그 애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