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사고(3)
2017.01.13.
“음... 심문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지만, 일단 정황상으로 고의성은 없었다는 것 같구나.”
물론 심문 외에도 이미 따로 조사해 보았지만, 별 이상은 없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로, 배후 같은 것은커녕 누군가와 접촉한 흔적도 없었다.
“그렇군요... 리테인에서 온 제 또래 여자애라 들었어요. 고의가 아니었으니 선처해 줘도 괜찮지 않을까요? 원래 마법 수련을 하다보면 그런 일이 종종 생기잖아요.”
또래의 여자아이가 험한 감옥에 갇혀있다 생각하니, 아나이스는 왠지 마음이 짠해졌다.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그라츠 황실에서는, 고의성이 없는 단순 상해 사고를 굳이 극형에까지 처하며 엄벌하지 않는 편이었다.
물론 십여 년 전만 해도 가차 없이 처벌했지만, 마법 심문으로 고의성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게 된 후 매우 너그러이 선처해 주는 편이었다.
“그렇긴 하다만, 생각보다 외교적으로 복잡한 일이라... 아나이스 너도 알다시피, 리테인과 관계된 일이니 말이다.”
“네, 알아요. 그럼 이 일을 빌미로 외교적 압박을 하려는 건가요?”
“일단 대신들의 의견은 그 쪽이란다.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야...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지금 상황에 좋은 전환점이 되어 주긴 할 테지만...”
현재 제국의 상황은 리엘이 아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리엘은 그저 약소국인 리테인이 강대국에 개긴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상황은 복잡했다. 원래 크면 클수록 지켜야 할 곳이 많은 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전이 마녀사냥을 그만 두고 제국에서 완전히 철수한다면, 나도 더 이상 리테인을 건드릴 생각은 없다.”
신전이 리테인에만 기반을 둔 채 처박혀 있어만 준다면, 거기에서 자기들의 신성왕국을 세우든 말든 솔직히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꾸만 제국의 영토에서 거슬리는 짓을 하는 게 문제였다.
“같은 마나의 힘을 이용하면서도, 마법은 마녀의 것이라며 제국에서도 탄압을 일삼고 있는 게 문제지요...”
신전 입장에서는 마법의 영향력이 강해질수록 자신들의 입지가 약해지니, 어떻게 해서든 마법을 탄압하려 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은, 마법을 부활시켜 퍼트리려는 제국의 정책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짓이다. 당연히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래. 그걸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십 수 년간 싸워왔지만, 백성들 구석구석까지 파고 든 신전 세력은 역시 만만치 않구나. 그리고 그들뿐이라면 이왕 시작한 김에 끝을 보겠는데, 지금 주변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너도 알고 있겠지?”
“네. 북쪽의 야만족들도 심상치 않다죠? 왜 하필 이럴 때... 엔릴이 잘 정찰하고 와야 할 텐데...”
제국의 북쪽에 지붕처럼 드리워진 북부산맥 너머에는, 원래 수백 여 년 간 제대로 된 국가가 없었다. 띄엄띄엄 사람이 살고는 있었으나, 춥고 황량한 기후 탓인지 커 봐야 부족 정도의 규모만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달라지고 있었다. 엔릴이 그곳까지 시찰을 간 이유는, 북쪽 너머에서 통일된 왕국이 세워질 것 같은 조짐이 보여서였다.
“별 일 없이 잘 있다는 통신을 받았으니 곧 무사히 돌아올 거다. 하지만...”
문제는 북쪽만이 아니었다.
“실로엔이 제대로 못 버티고 있나요?”
리테인이 위치한 서쪽과 정 반대 동쪽에는 실로엔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너머 먼 동방의 물리스 왕국이 실로엔을 공격하며, 점차 세를 넓혀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실로엔이 멸망하여 동쪽 국경이 곧바로 물리스 제국과 맞닿으면, 그라츠 제국으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것 같구나. 그러니 더 이상 신전의 일에만 신경 쓸 수는 없어. 엔릴에겐 미안하지만 강화협정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체결한 것이고.”
주변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의 평화를 위해 제국은 리테인과 강화협정을 맺었다.
국력 상으로 제국이 협상에 유리한 입장인 건 맞았지만, 어쨌든 협정은 양측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었기에, 제국은 리테인의 요구들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여차저차해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지만, 황실의 그 누구도 셀리나 공주를 원하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약혼녀 후보 자리에서도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네, 알아요. 엔릴도 싫다고 난리를 치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네 어머니를 희생시킬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받아들인 거지만, 엔릴 입장에서는 정말 싫었겠지.”
그러던 중에 터진 이번 사건은,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에 아주 좋은 빌미였다.
리테인 하녀가 신전, 혹은 리테인의 사주를 받아 제국의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 이걸 트집 잡아 외교분쟁으로 심화시키면, 제국으로서는 당연히 유리한 입장이 된다.
“셀리나 공주를 치워주면, 엔릴이 돌아와서 정말 좋아하겠네요?”
“그렇겠지. 나 역시 이 결혼동맹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바마마, 그렇게 되면 그 애는 죽을 텐데요...? 사고로 상해를 입힌 정도가 아니라, 고의적인 시해 혐의로 몰아가면... 아무리 선처해 줘도 힘들 거예요.”
“그래, 그렇겠지. 네가 마음에 걸려할 줄 알았다. 네 어머니도 그런 것 같고...”
“네. 아무래도요...”
정말로 사고에 불과한 일을 사주 받은 시해혐의로 억지로 몰고 가려면, 자백을 받기 위해 온갖 지독한 짓이 가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억울하게 고문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일부러 거짓말 감지 마법진까지 설치해 둔 건데, 이렇게 없는 죄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건 영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네가 당사자니, 본인의 뜻을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나이스, 네 생각은 어떠니?”
“잘 모르겠어요. 셀리나 공주가 걸리긴 해요. 공주를 황궁에 보내려 했던 처음 목적을 생각해 보면, 어서 빨리 떼어놓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에요.”
엔릴이 리엘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던 리테인의 최초 협정안을 떠올리자, 아나이스는 소름이 끼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감히 어딜 넘보고 끼어드려 하는 건지!
그러느니 차라리 전쟁을 하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니, 황제는 정말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서겠다고 분노했었다.
“음...”
“하지만 역시 내키지 않네요. 실수로 낸 사고였을 뿐이고, 저도 무사한데 그렇게 까지 하기는 조금...”
사실 전쟁 한 번 벌어지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마당에, 고작 적국출신 하녀 한 명의 목숨쯤이야 별 것도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전시가 아닌 평시, 더더구나 상대는 아직 어린 여자아이였다.
황제는 딸이 썩 찬성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 역시 어쩔 수 없이 그런 결정을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구나. 아무튼 대신들의 의견도 들어볼 생각이니 진행 상황을 틈틈이 알려 주마. 심문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주겠다.”
“네, 아바마마”
***
리엘이 갇혀있는 사이,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심문 결과는 단순 사고인 것 같다는 쪽으로 나왔으나, 그 사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어떻게 대응할지 정하지 않은 황실이 아직 이렇다 할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리테인을 압박할 정치적 명분에 쌍수를 들며 이 일을 적극 몰아붙였다. 시해혐의를 명분으로 리테인을 압박하기 위해, 황녀가 우려했던 그대로 리엘을 이용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될 분위기였다.
그리고 리테인 쪽, 즉 셀리나 공주는 궁지에 몰러버렸다.
애초에 하녀 파견은 리테인 왕실의 요구였으니, 리테인은 굉장히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자국이 빡빡 우겨서 집어넣은 하녀가 상대 황족에게 상해를 입혔으니 말이다.
쨍그랑!
콰직!
와장창!!
“저,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짜악!!
“고정! 고정!? 지금 감히 내게 고정하라 한 게냐!?”
“저, 저하...”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어!!! 감히 그따위 하찮은 계집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냔 말이다!!”
입지가 확 불리해진 셀리나 공주는, 방안에 틀어박힌 채 온갖 난동을 피워대며 분노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자, 불안한 마음에 부랴부랴 자국에 상황을 알리고 자문을 구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답신을 기다릴 새도 없이 일은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애초에 리테인 측 주장으로 보내진 하녀들이었고, 또 그 중 공주가 딱 집어서 마탑에 보낸 하녀가 리엘이었다. 어떤 과정으로 차출되었든 간에 최종 결정은 공주가 내렸으니, 그녀 역시 엮여 들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이대로는 약혼녀 후보는커녕, 꼼짝없이 볼모의 신세로 전락된다... 어떻게든 손을 써야 해.’
원래 고문당하면 없는 죄도 스스로 만들어서 토설하게 되는 법이다.
그라츠의 신사적인 마법심문에 대해 모르는 공주는, 리엘이 고문에 못 견뎌 리테인의 사주를 받았다고 자백이라도 할 까봐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내가 가만히 있어도 제국은 분명 리테인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먼저 선수를 쳐서 꼬리를 잘라내야 해!’
지금 당장이라도 리엘이라는 하녀가 입을 열어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것 같았다.
‘사고였다고 아무리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 그럼 차라리 그년의 혐의를 인정하고, 어떻게든 나만 빠져나가는 게 나아.’
이런 계산으로 공주는, 더 불리해 지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리테인 왕실은 그 어떤 일도 관련이 없다. 하지만 죄인이 멋대로 복수심에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인정한다. 죄인이 머물던 별궁에서 그 증거를 찾았다.-
자국의 조언을 기다리지도 않고, 리테인을 대표해 제멋대로 발표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요상한 증거를 하나 들이밀었다.
물론 조작된 증거였다. 그 증거라는 것은 유서 비슷한 일기로,
‘......귀족인 나를 하녀 신세로 만든 제국에.... 원한이.....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겠다. ......특히 날 속여서 끌고 온 리테인과..... 공주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등등의 말이 쓰여 있었다.
공주는 이 일의 여파가 자신과 리테인 왕실에까지는 오지 않도록, 나름대로 돌덩어리 같은 머리를 굴렸다. 리엘과 그녀의 가문인 레비넌 백작가만을 버리는 패로 삼으려는 심산인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셀리나 공주의 일처리는 뇌가 없나 싶을 정도로 참 한심했다. 아니, 한심한 정도가 아니라 자승자박 꼴이었다.
하지만 그런 허접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주장은 여러 가지 상황과 맞물려 먹혀들어갔다.
사건은 오히려 셀리나 공주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제국 귀족들은 얼씨구나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일을 리테인의 사주로까지 몰고 가고 싶은 게 당연했다. 그러려면 감옥에 갇혀있는 죄인을 압박해 적당한 자백을 받아낼 필요가 있었다.
감옥에 갇힌 일개 하녀를 고문하는 건, 일일이 황제의 윤허를 받을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라고 귀족들은 생각했다.
그로 인해 리엘의 처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
끼이익
심문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이 없자, 불안해하면서도 내심 안도하고 있던 참이었다.
“끌고 와라.”
그런데 갑자기 나를 끌어내니, 무슨 일인가 싶어 덜컥 두려워졌다.
설마 처형하려는 건가...? 아니면 다시 심문? 이대로 풀어주려는 건 아닐 테고...
“자, 잠깐만요...!!”
내 다급한 외침에 간수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처.. 처.. 처형 당하는 건가요?”
“아직 자백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추가 심문이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전.. 전 이미 다 이야기했어요! 더 이상은 자백할 것도 없는데...”
“시끄럽다! 입 다물고 따라와라!”
양쪽에서 거칠게 당기자, 어쩔 수 없이 난 질질 끌려갔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지하로 한참을 내려가자, 음산하고 퀴퀴한 곳에 다다랐다.
여긴...! 한눈에 보기에도 살벌하고 끔찍한 곳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길 바랐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고문실이라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덜덜덜...
몸이 저절로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시작해라. 여자애니까 적당히만 해도 금방 불 거다. 자백을 시작하면 바로 기록마법으로 저장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