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사고(4)
2017.01.15.
내 심정이 어떻든 간에, 간수들은 나를 무자비하게 형틀에 묶었다.
“....무...무슨 일을 당하는 건가요... 설마, 고, 고문하는 건 아니죠? 저, 전 정말 아는 게 없어요. 이러지 말아 주세요. 제발...”
“조언 하나 해 주지. 우리가 원하는 건 네 자백이다.”
“무, 무슨 자백이요? 다.. 다 말했어요. 지난 번 그 방에서... 전부 말했어요. 다 사실이에요!”
“아니, 그런 말을 원하는 게 아냐.”
“그..그럼..요?”
“리테인 왕실과 신전의 사주를 받아서,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다는 자백이 필요하다. 폐하를 노린 것이었지만 착오가 있어서 황녀전하를 다치게 했다고 말이다.”
“...........!!”
그렇게 되면 난 완전 끝장이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는데, 고문당하면 어차피 결국 말하게 되어 있어.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그냥 자백하는 게 좋을 거야.”
무서워서 그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제발 살려주세요... 전 정말 아니에요...”
“버텨 봐야 소용없어. 그리고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 봐야, 황녀전하에게 상해를 입힌 점은 변하지 않아. 상해죄로 어차피 처형될 거면 고문당할 필요 없지 않겠나? 원하는 자백만 하면 돼.”
아냐. 나 안 죽을 거야... 살고 싶다고!!
분명... 분명 그때, 마법사로 보이는 심문관이 날 풀어주며 조용히 말해줬어... 고의성이 없는 단순 상해죄라면 처형까지는 당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채찍형과 추방 정도로 선처 받을 거라고 들었다.
물론 그것도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리테인이었다면 고의든 아니든 황족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라도 입히면, 신전에 마녀로 끌려나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처참하게 죽을 텐데... 정말 깜짝 놀랄 만큼 너그러운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것만 믿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저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안다. 마법으로 검증한 지난 번 심문에서 확인했으니까.”
“네?? 그런데 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고문해야 하는 남자 역시 마음이 좋지는 않았는지, 불편한 얼굴로 대답해 주었다.
“이유 따위 알 필요 없다.”
“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 안 죽는다고 했잖아요! 다, 단순한 사고니까 저, 적당한 처벌...로 끝, 끝난다고...!”
“...........”
“제발요... 제발...”
난 눈물을 콸콸 쏟으며 애처롭게 빌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고통 끝에 자백하고 처형될 거라면, 차라리 그냥 바로 입을 열어서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고 처형되는 게 낫지 않겠나? 어차피 영원히 버틸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죽고 싶지 않다고요!! 제발... 제발 이러지 마세요... 흐흑... 흑....”
“...........”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눈짓으로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남자가 괴상한 도구를 들고 나에게 걸어왔다. 다가오는 그 모습이 사신처럼 두렵게 느껴졌다.
안 돼... 안 돼...!! 오지 마! 제발..!!!
“자, 잠깐만요!!!”
“뭐냐. 말할 생각이 든 거냐?”
“.............저, 전 정말,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제발 사, 사, 살려주세요. 제..제발... 으흐흑... 싫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혹시나 입을 열려는 것인가 기대했다가 내가 계속 똑같은 말만 반복하자,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다가왔다.
“제발.. 제발... 이러지 말세요... 흐흑... 흑흑... 제발... 싫어요... 살려주세요...”
하지만 간절함도 눈물도 아무 소용없었다. 내 절박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도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아아아악!!!!!!!”
“..............”
다짜고짜 터져 나온 내 비명소리에 남자는 황당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건드리지도 않았구나...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비명부터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냥 자백하는 게 좋지 않겠나?”
자기가 봐도 불쌍해 보였는지, 옆에 있던 간수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
너무너무 무서워... 어쩌지... 살아날 기회를 포기하고 그냥 자백해 버릴까?
남자가 다시 도구를 들어 올리자, 길게 고민할 여유 따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 말할게요! 다 말할게요!! 제.. 제발 고문만은 하지 말아 주세요... 흐흑...”
일단 급한 대로 난 말하겠다고 했다. 남자가 도구를 잠시 내려놓는 모습에 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자백하라.”
“그... 그러니까.. 제가 그게... 흐흑... 제가... 흑...”
그런데 막상 내가 하지도 않은 짓을 말하려니 서러워서 눈물이 펑펑 났다.
“어서!!”
“제가... 제가.... 폐하를....”
내가 내 입으로 사형을 결정지어야 한다니... 너무 억울하고 분했다.
“............”
왜 이렇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지...
“제가.... 흑... 제가...”
남자는 더 닦달하지 않고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 같아, 난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외쳐버렸다.
“저는 그런 짓 한 적 없어요!!!”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건가 싶은 내 외침에, 그들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사실 난 미친 게 아니라, 조금 전에 막 생각난 것 때문에 마음을 바꾼 거였다.
내 한 목숨이야 어떻게 되든 간에, 만약 내가 정말 대역죄인이 되면 이튼 오라버니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든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고 인정하면, 곱게 죽을 리가 없잖아. 오체분시 같은 극형에 처해질 거야.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어차피 편히 죽긴 틀렸는데, 없는 죄까지 뒤집어써서 오라버니의 앞날까지 망치면 안 되잖아.
“그만 버티고 자백해. 이건 너를 위해 해 주는 말이다. 사실... 이미 네가 고의적으로 황족을 시해하려 한 증거가 나와 있다.”
“네에?? 그, 그럴 리가요! 전 그런 적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심문은요, 지난번 심문내용은요!?”
“......네 심문 내용 따위 단번에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높으신 분께서 너의 죄를 인정했다.”
뭐?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야? 대체 누가...? 귓가에 소리가 웅웅 울리는 듯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지금 바깥에서는 이미 네 처형이 거의 결정되어 있어. 어차피 살아나갈 구석은 없어. 그러니 그냥 편하게 죽는 게 낫지 않겠어?”
“.............”
“우리가 원하는 건, 네 시해 혐의에 더해 그것을 지시한 배후가 신전과 리테인이라는 자백이다.”
“말도 안 돼요! 정말 전 아니라고요! 배후라니요! 일부러 한 짓도 아닌데 어떻게 배후가 있어요!? 그냥 실수였다는 걸 알잖아요!!”
“원래 진실과 사실은 다른 법이다. 괴로움 당하지 말고 그냥 입을 열어라.”
“흐흑... 흑....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싫어요... 죽기 싫다고요!!”
“..........”
내 태도를 본 간수는 한탄하듯 말하더니, 다시 아까의 남자에게 눈짓했다.
“후우... 화를 자초하다니... 후회할 거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어떻게 하지...? 너무 아플 텐데...
남자가 다시 내게 다가왔다. 곧 있을 일을 예감하며, 난 손을 움켜쥐고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럼에도 온 몸이 덜덜덜 떨렸다.
“흐으... 흐으윽... 흡... 흐흑...”
예의 그 도구가 다시 다가왔다.
내가 잠깐 미쳤었나 보다. 이제라도 그냥 자백해 버릴까?
날카로운 칼날이 막 발톱을 파고드려는 모습에, 도저히 볼 수가 없어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곧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겠지 싶은 찰나,
“멈춰라!!”
어디선가 하이톤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려왔다.
“하...하아...하아...”
잔뜩 긴장해 있다가 갑자기 풀리니, 격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난 고개를 들어 지옥을 막아 준 인물을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눈물 때문에 앞이 뿌옇게 변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이게 무슨 짓이냐!!”
나를 끌고 온 자들 역시 어둠 속에서 상대방을 알아보기 힘들었는지, 한참 후에야 고개를 조아렸다.
“화, 황녀 전하!!”
“이게 무슨 짓들이냐고 물었다!”
“그, 그게 전하...”
황녀라니...? 무슨 황녀? 설마 내가 다치게 했다는 그 황녀? 그런데 황녀가 왜...?
“감히!!! 마법 심문에 비협조적으로 응한 것이 아닌 한, 죄인을 함부로 고문할 수 없다는 걸 모른단 말이냐!!”
“저, 전하 그것이 아니라...”
“어마마마께서 친히 규정하신 일이건만, 네놈들이 감히!!”
난 멍하니 황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한참 들어보니 그제야 대충 상황파악이 조금 되었다.
그때 그 점잖았던 심문은 역시 마법으로 감별한 것이었고, 거기에서 이상이 없었으니 내게 별 일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황후폐하가 금지한 일이었구나. 몇 번이나 그 분 덕에... 뿐만 아니라 내가 다치게 한 황녀한테 도움을 받다니, 미안하고 고맙고 마음이 복잡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하,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저희도 지시를 받은지라...”
“닥쳐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나에게 지옥의 사신 같던 이들이, 황녀의 말 한마디에 연신 조아리는 모습이 참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내가 이 아이에게 할 말이 있으니, 치료해 준 후 나에게 바로 데리고 오거라.”
***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그리고 전하께 감히 상해를 입힌 일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초췌한 몰골로 인사를 올리는 모습이 퍽 안쓰러워 보였다.
“마법으로 이미 다 나았으니 개의치 말렴.”
“아닙니다.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리엘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아나이스는 현재 상황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며칠 전,
일단 아나이스는 심문 결과를 기다리며 잠시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뭘 어찌 해볼 새도 없이 상황이 확확 변해버렸다.
‘셀리나 공주는 대체 왜 그런 주장을...’
그 헛소리에 옳다구나 달려든 귀족들 때문에, 리엘의 시해혐의는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그녀가 뭔가 개입할 틈도 없어져 버렸다.
사실 마법심문은 전지전능하게 진실을 가리는 대단한 기능이 있는 게 아니었다. 단지 피심문자의 심리상태를 감지하여 거짓말 여부를 가리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이 허점을 이용하여 속여 넘기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죄인의 자백 내용이 다른 물증이나 누군가의 증언과 충돌되면, 얼마든지 무시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미 공주가 증거를 들이밀며 인정한 이상, 그걸 우리 제국 측에서 부정하기에도 모양새가 이상해져 버렸고...’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일에서 발을 빼고 싶었던 리테인 왕실은 리엘에게 재빨리 사형을 선고했다. 그들 입장에서야 리엘이 빨리 죽어주는 편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물론 리엘이 리테인 백성이라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녀에 대한 처벌권이 리테인에 있지는 않았다. 제국 황족에 대한 시해혐의이니, 처벌 역시 제국의 소관인 것이다.
‘휴우... 어쩐다. 리테인에서 사형을 언도한 죄수를 정작 제국 황실에서 살려주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운데다가... 무엇보다도, 선처를 해줘봤자 추방당해 리테인으로 돌아가면 어차피 처형당할 텐데... 리테인에서라면 아마도 화형이겠지...’
이 상황에서 제국이 내릴 선택지는 몇 가지 없었다. 귀족들이 원하는 것처럼 리엘의 자백을 받아 신전과 리테인까지 배후로 끌어들이는 것과, 그냥 깔끔히 처형하는 것.
리엘을 살려준다는 가장 훈훈한 선택지는, 공주 덕에 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결국 황제는 마지막 결정을 당사자인 아나이스에게 맡겼다.
그녀 역시 많은 고민이 있었다. 아무리 선처해봤자 결과는 뻔했다.
‘이곳에서 채찍질 당하고 추방된 후, 리테인으로 강제 송환되어 화형당하겠지...? 그건 괜히 고통만 가중시키는 꼴일 테고...’
그렇다고 시간을 계속 끌기도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귀족들은 리엘을 고문해 배후를 토설하게 하자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정리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으니 고개를 들어라. 고의도 아니고 별 일 아니었으니까...”
사실 태어나서 한 번도 다쳐본 적 없던 그녀였기에 깜짝 놀라긴 했었다. 하지만 힐링으로 순식간에 나아서 언제 다쳤었나 싶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아까의 일도 감사합니다.”
“그래, 그런데... 아참, 이름이 뭐니?”
“리엘이라고 합니다. 리엘 반 레비넌이요.”
아나이스는 리엘의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