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사고(5)
2017.01.15.
“리...엘? 예쁜 이름이구나. 사실 바깥상황이 조금 복잡하게 돌아가는지라... 리엘 너에게 상황을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아서 잠시 왔단다.”
“네.......”
“그런데 몸은 좀 괜찮은 거니? 마음고생도 많았을 텐데...”
지옥에서 구해준 데다가 걱정까지 해 주자,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았다. 자기가 다치게 한 황족이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괜, 괜찮습니다. 아무 일 없었습니다.”
“다행이구나. 그런데...”
드디어 본론을 말하려는 듯 아나이스는 입을 열었지만, 쉽게 말하지 못해 망설였다. 하지만 아까 간수에게 들은 말 덕분에, 리엘도 어느 정도 바깥 상황을 짐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그게...”
잠시 고민하던 아나이스는, 결국 상황을 다 이야기해 주었다.
“하아... 원래대로라면 고작 이 정도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는단다. 리테인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우리 그라츠에서는 안 그래. 하지만...”
황녀의 말은 꽤 희망적으로 시작했으나, 그 뒤에는 꽤 복잡한 사정이 흘러나왔다.
그 사건이 어떻게 외교적 문제로까지 격화되었는지, 셀리나 공주의 주장 때문에 현재 어떤 상황이 되었는지 등등...
그리고 아까의 고문 건은, 아마도 어느 머저리 귀족의 과잉 충성인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지시하는 자들은 상상조차 못하겠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정말 지옥에 다녀온 경험이었다.
설명을 들은 리엘은 일단 인사부터 했다.
“................일부러 찾아와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전하께 큰 실수를 했는데도 이렇게 친절을 베풀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긴긴 뒷이야기를 적어도 알려는 줘야 할 것 같아서, 황녀는 리엘은 직접 만나러 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최악의 소식을 전해준 셈이었다.
“........”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참 차분한 반응이었기에, 아나이스는 순간 멍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리엘 입장에서야,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에 떠느니 차라리 확실히 알게 된 게 마음 편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절망을 조롱하러 온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기에 섭섭하지도 않았다.
“전하... 전 이제 어떻게 되는지 여쭤도 될까요?”
어떤 방법으로 처형될 건지를 돌려 묻는 질문이었다. 아나이스도 알아듣고 대답했다.
“....... 최대한 배려해 주도록 얘기해 둘게. 그리고... 적어도 아까와 같은 일은 다시없을 거라고 약속하마.”
“감사합니다. 필요하시다면 원하시는 대로 다 자백할게요.”
“아니다. 일을 더 키우고 싶지 않구나.”
아나이스는 이 불쌍한 하녀 아이를 굳이 더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리엘의 심정은 달랐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셀리나 공주에게 엿이나 먹이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멍청한 공주가 친절히 자리까리 깔아줬는데, 물귀신처럼 잡고 늘어지지 않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그러려니,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내 일이 더 심화되면 이튼 오라버니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지 않을까? 복수보다는 오라버니를 지키는 게 중요하잖아...’
이리저리 고민하는 사이, 아나이스 역시 같은 점을 지적했다.
“배후까지 얽혀있는 걸로 되어버리면 그 파장이 엄청날 거란다. 없는 배후까지 만들어서 줄줄이 엮여 들어갈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처형에 관해... 배려해 주기 힘들어진단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아주아주 희박한 확률이지만, 혹시 살아날 수 있을 가능성마저 완전히 사라지는 거야.”
어떻게 죽든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일도 걸리고, 0.1퍼센트의 가능성이라도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다면 아직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어디서 난 용기인지, 불쑥 질문이 튀어나와버렸다.
“응?”
“고작 일개 하녀에 죄인인데, 너무 잘 대해 주셔서요...”
“그야... 죽을죄를 진 것도 아닌데 죽어서는 안 되잖아.”
아나이스는 어린 여자애의 목숨을 이용해가면서까지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서는 건, 비겁한 짓이라 생각했다.
공주 때문에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반대로 이런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황제 역시 아나이스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테니 말이다.
“제가 밉지 않으세요?”
“응? 왜?”
“제가 감히 전하의 귀한 옥체에 해를 입혔는데...”
“뭘 그런 걸 가지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좀 넘어진 것뿐인데. 사람 목숨이 훨씬 더 귀하지.”
그 말에 오히려 리엘이 멍해졌다. 셀리나 공주였으면, 당장 갈가리 찢어죽이라고 난리쳤을 텐데...
눈부시게 빛나는 듯한 눈앞의 황녀가 너무 부러워졌다. 그 금수저 신분도 그렇지만, 저렇게 꼬인 구석 하나 없을 만큼 사랑받고 바르게 자랐을 그녀의 환경이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황태자에게 왜 끌렸던 건지... 그 특유의 밝고 따스한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끌린 거였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진정 원했던 것은, 습관처럼 내뱉던 신분상승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을 아껴 줄 사람, 진심으로 사랑해 줄 가족이 필요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내쳐버렸다가 필요에 따라 데려온 백작 내외 같은 가짜 말고, 진짜 가족...
‘이제 깨달으면 뭐해... 곧 죽을 텐데...’
죽음을 앞두니 그저 허탈했다. 결국 저 발암물질 같은 셀리나 공주 때문에 죽게 되다니...
아직 살고 싶었다. 너무너무 살고 싶었다.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서 시야가 흐려졌다. 그 애처로운 모습에, 아나이스는 말없이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리일은... 황태자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볼까. 어차피 죽을 마당에 계속 신분을 모르는 척 해 봤자 무슨 소용이야. 리일은 내 상황을 알고 있을까? 제도에는 돌아 왔을까?’
살아나기 위해서는 리일에게 매달리는 방법밖에 없어 보였다.
‘그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 상황을 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고... 살려달라고 매달려 볼까?’
리엘이 고민하는 사이 공주는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리엘, 정말 유감이구나. 내가 가서 다시 한 번 어떻게 해 볼게.”
“저, 전하!! 잠시만요!”
“.........응?”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가 돌아보았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막상 우물쭈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가 만나던 사람이 황태자 전하라는 걸 알고 있어요. 저한테 진심일 수도 있으니 저 좀 구해달라고 좀 전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황태자임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래도 변함없이 자신을 좋아할지 확신이 없었다.
완전히 제 꾀에 제가 걸린 셈이었다. 진즉에 신분을 안다는 걸 터놓았으면, 지금 이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게... 그게... 저...”
아직 열렬히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다가, 심지어 자신을 속인 여자애였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뒤집어 엎어가면서까지 구해줄까 싶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어차피 죽을 마당이니, 얼굴에 철판 깔고 살려달라고 빌고 싶었다.
“저... 혹시...”
똑똑똑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가 들어와서 아나이스를 불렀다.
“황녀 전하, 황후 폐하께서 급히 찾아계시옵니다.”
“알았다. 곧 일어나마. 리엘... 그럼 이만 가봐야겠구나. 네 일은 정말... 정말 유감이야......”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아나이스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나중에 한 번 더 올게. 혹시 남길 말이라도 있는 거니?”
“..............”
지금 이 순간에도 말한다 만다 두 가지 마음이 빠르게 교차했다. 하지만 급하게 황태자의 이야기를 꺼내봤자 오히려 역효과일 것 같았다.
절실한 만큼, 단 하나의 동아줄을 신중히 붙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온다고 했으니, 어떻게 말해야 할지 궁리해서 나중에 말을 잘 골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전하, 폐하께서 아까부터 찾아계시옵니다.”
“리엘, 그럼 가봐야겠구나.”
리엘이 망설이는 사이 황녀는 떠났다.
***
‘눈... 부셔...!’
며칠 만에 햇빛을 보자, 눈이 찌르듯이 따갑고 아팠다.
‘이게 죽기 전에 볼 마지막 햇살이겠구나...’
지하감옥을 나서 손이 묶인 채 한참을 끌려가니 처형장이 보였다. 처형장은 감옥 뒤뜰에 초라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고문에 의한 강제 자백은 아나이스의 반대로 무산되었지만, 리엘의 처형은 결국 진행되었다.
광장에서 하는 공개처형이 아니었기에, 구경하는 관중들은 없었다. 마지막을 배웅 온 사람조차 없었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삐거덕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가자, 을씨년스러운 뒤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차라리 희망을 가지지 말 걸 그랬어...’
리테인에서였다면 볼 것도 없이 당연히 사형이기에,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 따위 애초에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라츠 제국의 관대한 처사에 기대하고 있다가, 셀리나 공주가 먹인 엿으로 처형이 결정되었다고 하니 더 비참했다.
‘그보다 이튼 오라버니는 괜찮은 걸까? 나 때문에 오라버니도 같이 죽는 건 아니겠지?’
이 와중에도 그게 걱정되었으나, 그 의문에 답해 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형 선고를 위해, 양쪽에서 간수들이 팔을 잡고 거칠게 꿇어앉혔다.
“죄인 리엘 반 레비넌은......... 시해.. ...... 혐의.......... 에 처한다.....”
집행인이 한참을 떠들어 댔지만,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은 채 귓가에서 흩어질 뿐이었다.
선고가 끝났는지, 이윽고 형틀에 꽁꽁 묶여지는 게 느껴졌다.
‘참수... 인가?’
번뜩이는 도끼날을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적어도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황녀가 해준 배려였다.
원래 황족시해혐의가 확정되면 온갖 지독한 형벌을 당한 끝에 거열형에 청해지는 게 원칙이었지만, 그녀의 재량으로 선처하고 또 선처해 준 것이었다. 어차피 시해혐의가 사실이 아니라는 걸 그녀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라 해야...겠지...?’
정말 이렇게 죽는 건가 싶어, 절망감이 밀려들어왔다.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을까봐 이튼 오라버니가 걱정되긴 하지만, 정작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은 건 리일이었다.
리일의 이야기는 끝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급작스레 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이 안 났었는데, 황녀가 돌아가고 나서야 적당한 말이 생각났다.
‘리일이라는 기사님에게 유언을 전해달라고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럼 무언가 눈치채주었을 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 후로 다시 보지 못했기에 말할 기회조차 없었다.
“마지막 유언을 남기도록.”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지만, 그렇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리일에게... 전해주세요. 그 동안 정말 고마웠다고요.”
이 사람은 리일이 누군지도 모를 텐데 제대로 전해질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남겼기에 후련했다.
눈 뜬 채 잘려진 자신의 목이 굴러다니는 건 생각만 해도 징그러웠기에, 아예 눈도 꾹 감아버렸다.
“집행하라!”
드디어 명령이 떨어졌다. 이제 몇 초 후면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환생은 싫어... 이런 죽음을 기억하며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은데...’
도끼날이 번쩍 치켜 올라갔다.
한껏 들어 올린 도끼날이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멈춰!!!!!!!”
누군가의 굵직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설마... 이 목소리는 설마....!’
하지만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도끼날은 관성과 중력에 의해 쉽게 멈춰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까강!! 콰득..!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