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재회(1)
2017.01.17.
고함과 함께 나타난 엔릴은 다자고짜 검을 내밀어 도끼날을 막아내었다. 그 덕에 방향이 틀어진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리엘을 빗겨나 바닥에 콰직 찍혔다.
하지만 팔의 각도며 무게중심이며 죄다 무시하고 육중한 도끼를 막아낸 덕에, 순식간에 팔목이 나가버렸다.
엔릴은 작게 신음을 삼키며 다급히 리엘을 살폈다. 그녀가 무사한지 걱정되어 손에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리엘!! 리엘, 괜찮은 거야!?? 하아...하아...”
얼마나 쉬지 않고 뛰어왔는지, 숨이 턱까지 차오른 엔릴이었다.
“......리...일...?”
“리엘, 다친 데는?”
엔릴은 리엘의 몸 여기저기를 확인하며 다친 곳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리...일? 정말 리일....? 흐흑... 으흐흑... 흐어엉... 리일... 리일... 저... 너무 무서워서... 흐으으윽...”
“리엘, 괜찮아. 이제 괜찮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뒤늦게 아나이스의 급보를 받고 미친 듯이 달려왔지만,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봐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던 엔릴이었다.
부랴부랴 본궁에도 전갈을 보내 형의 집행을 멈춰 달라 말해 두었지만, 느려터진 정식 절차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직접 달려온 것이었다.
“흐흑...흐흐흑... 리일... 나... 나....”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알아서...”
엔릴은 아직도 가늘게 떨고 있는 리엘을 꽈악 안아 주었다.
한참 그렇게 극적인 순간을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의 초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하셔도 집행명령을 이렇게 방해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 말에 리엘도 엔릴도 몸을 움찔 떨었다. 이제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수도, 모르는 척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황자라 하더라도 이미 결정된 처형을 마음대로 취소시킬 수는 없었기에, 집행인의 말은 당연한 것이었다.
“시끄럽다! 곧 본궁에서 정식으로 유예 명령이 내려올 것이다!”
“네? 전하 그게 갑자기 무슨...”
아나이스가 처리하고 있을 테지만, 아직 현장까지 명령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단은 유예지만, 이 아이가 다시 처형될 일은 없으니 더 이상 토 달지 말도록!!”
하지만 이 일을 완전히 해결하려면 리엘의 시해혐의를 전부 벗겨주어야 하는데, 상황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는 만큼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리일...”
리엘은 불안한 목소리로 엔릴을 불렀다. 그런 복잡한 상황보다는, 당장 눈앞에서 정체가 들통나버린 상황이 서로 더 곤란스러웠다.
리엘이 부르는 걸 무슨 뜻으로 오해했는지, 엔릴은 허겁지겁 변명을 시작했다.
“리엘... 그게 있잖아... 내가 다 설명할게... 속이려 한 게 아니...”
와락!
“괜찮아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리일은 리일이니까요.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무서웠어요... 흑... 흐윽...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리엘은 엔릴을 끌어안으며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자신 역시 모른 척 시치미 뗀 주제에 그의 사과를 듣기도 미안했고, 무엇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도 사실이었다.
너무 늦게 깨달은 감정이었지만, 그가 시종이든 종자든 기사든 간에 이미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처음 황태자인걸 알았을 때 놀라고 갈등하다 결국 꼬시기로 결심했었지만, 만약 그가 황태자가 아니었어도 똑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면서도 모른 척 하며 만났던 순간들은, 영원히 양심에 찔릴 일로 남을 것 같았다.
“리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혼자 많이 무서웠지...”
“흑... 리일..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는 매우 놀라고 혼란스러워하는 상황이므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싶었다.
“리엘, 일단 여기서 나가자. 당분간 내 처소에 머무는 게 좋겠어.”
“전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집행이 유예된 죄인은 다시 감옥으로...”
“시끄럽다! 죄인이라니! 내가 처음부터 다시 제대로 조사해서 혐의를 벗겨줄 것이거늘, 죄수 취급이라니!!”
“하지만 전하... 조사를 다시 하신다 하더라도 그동안 죄인의 신병은...”
“그만!! 내가 데려가겠다는데 날 막을 것이냐!?”
워낙에 똥고집, 막무가내, 생떼로 유명한 황자인지라, 집행인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어차피 황자의 행동을 자신이 막을 수는 없으므로, 그냥 윗선에 보고나 올려야겠다 싶었다. 보고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다 보면, 황제폐하께서 알아서 정리해 주시겠지 싶은 마음이었다.
***
뭐라 거절할 새도 없이, 난 리일의 품에 안겨 황태자 처소로 들어왔다.
리일의 거처는 공주의 처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호화로웠다. 하나같이 고급스러우면서도 너무 화려하지는 않은 것들로 잘 꾸며진 방은, 귀족 영애로 살아봤던 내 눈에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리일의 방에 내가 사 준 별 촛대가 앙증맞게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엄마미소가 흘러나왔다. 창가에 나란히 놓인 촛대는 방의 모습과 참 안 어울렸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눈에 띄었다.
그나저나 정말 넓다... 난 누가 숨어있어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그가 쓰는 공간의 넓이는, 예전에 살았던 저택 한 층을 다 합쳐놓은 크기 정도 되었다.
아무튼 이 겁나게 럭셔리한 곳에서 난 그야말로 지극정성으로 보살핌을 받았다. 리일이 불러온 주치의와 힐러가 꼼꼼히 날 치료해 주었고, 하녀들 역시 세심하게 돌봐 주어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나 일개 하녀인데, 아니 죄수인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근데 황제랑 황후는 알고 계신 거야? 아들이 이렇게 멋대로 행동하며 대형사고 친 거...?
한바탕 소동이 있은 후 고용인들이 전부 물러나자, 리일은 나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고생 많았지... 내가 하필 멀리 떠나있는 사이 이런 일이 생겨서...”
“리일... 아, 죄송합니다. 전하. 저도 모르게 입에 익어서...”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신분이 탄로 난 후에도 리일이라고 마구 불러댔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냐! 그냥, 그냥 리일이라고 불러줘!!”
“네? 하지만 어찌 감히 전하께...”
헉, 설마 이런 반응은 전혀 예상 못했는데... 너무 성큼 이름을 허락한 리일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그동안도 늘 그랬잖아.”
“그..그렇지만 그때는 몰랐을 때의 일이고...”
우와, 나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잘한다. 처음에는 정말 몰라서 그랬다지만, 나중에는 알면서도 그런 건데... 아 정말 너무 미안하네...
“괜찮아! 내가 그동안 속인 거 미안해서 그래. 갑자기 황자라니, 많이... 놀랐지?”
“...........미안하시다니요. 무례했던 제가 잘못이죠...”
질문에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서, 은근슬쩍 얼버무렸다.
착해빠진 녀석. 솔직히 말해 리일이 날 일부러 속인 적은 없다. 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니 먼저 말하기 민망해서 이리저리 둘러댔을 뿐... 그가 말해 준 이름도 진짜 애칭이니 완전한 거짓말도 아니었고.
물론 무도회 때 황태자가 아니라고 잡아떼긴 했지만... 뭐 그 자리에서 긍정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한 마디로 고의적인 거짓말은 하나도 없는 셈이었다.
오히려 속인 건 나였지...
“아냐, 무례하긴, 정말 괜찮아.”
“그런데 전하. 이렇게 마음대로 저를 빼오셔도 되나요? 황제 폐하께서 아시면...”
“어? 몰라. 화내시려나?”
“.............저.. 전하...”
앞뒤 생각도 않고 지르다니... 이러다 더 진노하셔서 나 오히려 더 끔찍한 극형에 처해지는 거 아냐?
“그보다, 정말 그렇게 갑자기 거리를 둘 거야...? 난 그때와 똑같은 사람인데, 황자라는 걸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그렇게 딱딱하게 대하면 왠지 섭섭하잖아.”
“.............섭섭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가 아니라 리일.”
“.........하지만...”
“우리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를 그냥 애칭으로 부르는 걸? 사석에서든 공석에서든 말이야.”
비원에서의 두 사람의 모습을 봤었는데도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다.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 황제의 애칭을 부르다니...
근데 그분들은 그래도 부부이고, 난 고작 시녀에 죄수인데... 이걸 어찌 말해야 하나...
“저, 그게... 그 분들은.... 그러니까... 어머니 되시는 분은.. 그... 황제폐하와 부부의 연을 맺으신데다가 지고하신 황후 폐하시고... 그러니까 그러실 수 있으시지만... 저는.. 그게...”
아, 내가 이렇게 말더듬이었는지 미처 몰랐네? 대체 뭐라고 지껄이고 있는 건지 나도 못 알아들어먹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리일은 내 개소리를 용케 알아들은 건지, 눈을 반짝 빛내며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그럼 우리도 부부지간이 되면 되는 건가?
으악, 그게 아니잖아!! 얘가 지금 뭐래? 미쳤어? 갑자기 왠 부부야!? 지금 내 처지 몰라? 이렇게 망하기 전에도 될까 말까 했는데, 죄수랑 결혼한다니 퍽도 허락해 주시겠다!! 미치겠다, 진짜...
리일은 그 개망상을 머릿속으로만 끝내지 않고, 급기야 입을 열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들었다.
“그럼 리엘, 우리...”
으아아악! 말하지마!!!!!!
쿠당!!
저 입을 어떻게 틀어막나 했는데, 다행히 때마침 누군가가 들어왔다.
“엔릴!”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아나이스 황녀였다. 휴우...
황제나 황후가 온 걸까봐 뜨끔했는데, 그래도 황녀라 다행이었다. 부담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시부모(?)보다는 또래의 시누이(?)가 좀 덜하니까? 아닌가?
앗, 내가 미쳤지!! 누구 맘대로 ‘시’ 자를 붙여대고 있는 거야!?
“너 또 사고 쳤다며?”
“응! 누나, 고마워! 덕분에 늦지 않게 구해왔어. 아바마마 화 많이 안 나셨지?”
“으휴, 뭘 믿고 그렇게 당당 뻔뻔해?”
“원래 화 안 내시잖아. 아무튼, 뭐라셔?”
“글쎄? 그냥 뭐, ‘엔릴이 그렇지 뭐....’ 라고 하시던데?”
“............아하하...”
신기하네. 왕실에서는 자식도 공식적으로는 다 왕의 신하고 그러던데... 개기면 가차 없이 죽이고 말이야. 여기는 황실이니 더 그럴 줄 알았는데...
게다가 황제가 하도 냉정하고 잔혹하기로 소문이 자자해서, 엄청 엄격한 아버지일줄 알았다. 근데 의외로 자식들한테 약한가 보네? 황후한테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보다, 너 나한테 빚졌다?”
“정말정말 고마워. 아, 리엘 이쪽은 누나야. 전에 한 번 만나 봤다며?”
둘이 티격대는 걸 지켜보느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난 이제야 부랴부랴 인사를 올렸다.
“황녀전하를 뵈옵니다.”
감옥에서 만났을 때는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보니 황녀는 황제를 쏙 빼닮은 굉장한 미녀였다. 차분한 느낌의 이지적인 미녀.
아... 꽃밭이 따로 없구나. 꽃미남 리일에, 꽃보다 예쁜 황녀까지... 물론 리일과 투닥거리는 모습은 좀 깨지만...
“다시 만나서 반가워. 그렇게 끝날 인연이 아니었나봐.”
“그러게! 누나가 웬일로 이렇게 내 맘에 쏙 드는 말을 해!?”
황녀는 드레스 밑으로 콰직하고 리일의 발을 밟았다.
“아야야!! 흠.. 흐흠...”
막 엄살을 부리려던 리일은, 내가 눈앞에 있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근엄한 척을 했다.
그런 동생을 흘겨보며 황녀가 말했다.
“아, 그때 다시 찾아간다고 했는데 못 가서 미안해. 급작스레 일을 해결하느라 너를 만나러 갈 시간이 없었어.”
“아닙니다. 황녀 전하께서 제게 사과를 하시다니요...”
“아무튼 리엘, 어떻게 된 일이냐면...”
리일은 사소한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손사래를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