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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38화 (38/134)

38. 재회(3)

2017.01.19.

“음... 복잡해 졌지만 어떻게든 잘 해 봐야지.”

“그 애가 미우시겠어요.”

황후의 생각이 궁금해 슬쩍 떠보는 아나이스였다.

“글쎄. 딱히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단다. 일을 망친 건 공주였지 그 아이가 아니잖니. 널 고의로 해하려 한 것도 아니고...”

“맞아요. 공주 때문에 우리 입장만 바보가 되어버렸잖아요. 안 그래도 선처할 생각이었는데 일을 꼬아놓는 바람에... 처음부터 좋게 좋게 넘어갔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말이에요.”

물론 공주 때문만은 아니고 엔릴의 막무가내 행동 덕분이기도 하지만, 화살은 당연하게도 전부 공주에게 돌아갔다.

“그러게 말이구나. 셀리나 공주는 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마음이 급해 앞뒤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겠죠. 리테인이었으면 했을 법한 짓을 지레짐작하고 겁먹었을 거고요.”

“휴... 덕분에 그 시녀 아이만 불쌍해졌지. 어떻게 해 주고 싶어도 리테인 측에서 사형선고를 내려버렸으니 이도 저도 못했었고...”

“그러게요...”

“결국 처형이 결정되긴 했었지만, 그래도 최악이 되지 않도록 너도 나름대로 애썼잖니.”

“네...”

“리일이 뒤집어 엎어놔서 복잡해지긴 했지만, 차라리 잘 된 것 같구나.”

“네?”

예상치 못한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딸을 바라보며, 황후는 속내를 이야기했다.

“그렇게 진심이라는데 큰일 날 뻔 했잖니. 어떤 아이인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누군지도 모른 채 처형했다면...”

“아...”

“그리고 셀리나 공주는 좀 자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경고를 줄 생각이야. 엘, 뒷수습 하려면 골치 아프겠지만 전 나쁘지 않은 결과인 것 같아요.”

황제는 자신을 돌아보는 황후의 말에 살짝 웃어보였다.

“디트가 좋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아바마마 어떻게 하실 생각인데요?”

황제는 이 일의 뒷수습을 위해 열심히 고민해서, 그나마 쓸 만한 명분을 만들어냈다.

어차피 정치는 명분싸움.

이렇게 된 이상, 공주 때문에 착오가 있었으나 제국이 자랑하는 마법의 힘을 이용해 진실을 밝혔다는 식으로 끌고 갈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마법에 대해 절로 홍보하는 효과도 있으니, 어느 정도 체면 방어가 되는 셈이었다.

그 설명을 들은 아나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어마마마, 그럼 그 아이는요?”

“괜히 일이 커졌다가 안 하는 것만도 못한 꼴이 되었으니, 황실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오히려 더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지 않겠니?”

이미 황실의 위엄을 훼손시킬 만큼 훼손시킨 이상, 너그러움이라도 보여주는 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런 정치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다.

“아...”

“무엇보다도, 공주의 실수를 공식적으로 사과 받아야지. 잘못된 증거로 황실에 파란을 일으켰으니까.”

리엘을 대신해 뭐라도 화살받이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애초에 일을 망친 게 셀리나 공주였으니, 그녀가 그것에 제격이었다.

신중하지 못한 주장으로 착오를 일으켜 황실의 위엄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공주에게는 1개월간의 근신 명령이 내려졌다.

“속이 다 시원하네요.”

공주가 실수를 인정하자 더욱 난처해진 리테인 왕실에서는, 리엘에 대한 처벌을 전적으로 제국에게 맡긴다며 몸을 수그렸다.

“아, 리테인 측에서 내려진 사형선고 역시 취하되었단다.”

“네. 다행이네요.”

겉보기에는 제국의 입김으로 인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엔릴의 부탁, 아니 땡깡 덕이었다. 사실 그 역시 뒷일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던 짓은 아니었다.

처형장에 난입했던 건 정말 앞뒤 재지 않고 급한 대로 뛰어든 게 맞지만, 공주를 족치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기에 황제를 찾아가 설득하고 일처리를 부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그였지만, 그래도 필요할 때는 머리를 가동시킬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그 시녀 아이는 더욱 선처해 주고.”

“엔릴이 아주 좋아하겠어요. 그리고...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너그러운 처사에 황실에 대한 칭송이 또 하늘을 찌르겠군요.”

“후훗. 그런데 그 아이는 어떤 아이니? 네가 만나 봤다면서?”

“잠깐 본 거라 저도 잘 몰라요. 아, 레비넌 백작가에서 왔다는데...”

이번 사건에서 리엘의 가문은 그녀를 구명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문에서 내치겠다며 재빨리 꼬리를 자르려 했다.

유일하게 리엘의 편을 들었던 건, 아카데미 유학생이라는 그녀의 오라버니가 전부였다. 그 점을 떠올리니 그녀가 더욱 가엾었다.

“음... 그러니?”

“게다가 지난번에 감옥에서 만났을 때는 엔릴과 아는 사이인 줄 모르는 상태로 만났거든요.”

“그렇구나... 우리 리일이 그렇게 좋아한다니, 어떤 아가씨일지 궁금하네?”

“그 애는 엔릴의 신분도 몰랐던 것 같던데, 이번 사건으로 여러모로 많이 놀랐을 거예요.”

엔릴의 신분을 알았으면 당연히 자신의 상황을 전해달라며 매달렸을 텐데, 그때 리엘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물론 아나이스의 착각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마음의 상처가 상당할 거야. 안정되려면 시간이 꽤 필요하니 당분간 힘들 텐데...”

“엔릴이 잘 다독여주겠죠. 그래도 험한 일 당하기 전에 천만다행히 막을 수 있었어요.”

“그나마 다행이구나. 실제로 다치기까지 했으면 정말 후유증이 오래 갔을 텐데 말이다.”

문득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찻잔을 든 황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너무 두렵고 아프고 끔찍했던 순간들... 그래서 더더욱 남일 같지 않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았다.

말없이 듣고 있던 황제가 그런 그녀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어마.. 마마?”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잠시 고개를 갸웃한 아나이스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맞다. 저 엔릴한테 갈 건데 궁금하시면 지금 같이 가실래요?”

“아냐. 조금 나중에 가 볼 게. 궁금하긴 하다만... 안정을 되찾느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텐데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구나. 앞으로 날은 많으니 곧 만나볼 수 있겠지.”

“네. 알겠어요.”

황후의 깊은 배려에 아나이스는 새삼 부족함을 깨달았다.

“엘, 우리 빽빽이 리일이 언제 저렇게 커서... 벌써 장가갈 때가 되었다니 신기하지 않아요? 이제 철 좀 들어야 할 텐데...”

“미안합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철딱서니 없는 건 다 저 때문입니다. 단호하게 혼냈어야 하는데 제가 그걸 못해서...”

적어도 황후가 따끔히 야단치려 했을 때 말리지나 말았어야 하는데... 반쯤은 제 탓임을 아는 황제는, 엔릴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휴, 장가가면 정신 차리겠죠.”

“그러겠지요...?”

“그런데 리일 장가보내고 나면 우리 섭섭해서 어쩌죠? 하나 더 낳을까요?”

사이가 너무 좋은 둘은, 눈빛을 뿅뿅 주고받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 아나이스는 슬그머니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아나이스, 넌 연애 안 하니?”

갑자기 왜 여기로 불똥이 튀는지...

“네? 저요?”

“그래. 이제 곧 17살인데...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없어요.”

“정말?”

“네. 하나도 없어요. 전 아바마마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요!”

매번 똑같은 저 대답에 황제와 황후는 한 마디씩 해 주었다.

“나나,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조를 나이는 지났는데...”

“우리 딸 노처녀로 독수공방하겠네. 어쩌면 좋아, 네 아빠 같은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다고...”

“..........몰라요!! 저 갈래욧!!!”

***

나머지 가족들이 골치가 아프건 말건 리엘을 구한 것으로 만족한 엔릴은, 그녀의 처우를 의논하기 위해 누나 아나이스를 만났다.

“이렇게 쉽게 해결되는 일인데...”

물론 황제가 묵인해 주었기에 엔릴이 손쉽게 처리할 수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목숨을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이 좌지우지 할 수 있다는 게 기분이 참 이상했다.

“휴... 어쨌든 수고했어.”

“응. 그런데 기분이 별로 안 좋아.”

“왜?”

“이렇게 금방 처리할 수 있는 일을... 고작 일개 시녀의 일이라고 아무도 구원의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다니... 그게 참 기분이 안 좋아.”

그리고 신분이 별 볼일 없다는 이유로, 귀족들이 리엘에게 멋대로 험한 짓을 하려 했다는 사실도 정말 화가 났다. 물론, 허락도 없이 멋대로 죄인의 고문을 명령한 이들은 엄벌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엔릴, 네가 막무가내였던 거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그리고 하찮게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알다시피 양국 간 민감한 일이었잖아.”

“.........”

“내가 어떻게 아바마마의 입장과 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공주를 다그쳐가면서까지 구했겠어... 너야 그 애를 소중히 여기니까, 그리고 네가 워낙 강경하니까 부모님께서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 거지...”

사실 황제 입장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시녀 하나 때문에 아들놈이 온갖 난리피우며 일을 뒤집어 엎어놓은 셈이었다. 아나이스는 저 짓거리를 다 참아주는 부모님이 참 성인군자다 싶었다.

“누나를 원망하는 게 아냐.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

아나이스가 최선을 다했다는 걸 엔릴 역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남들 입장에서는, 냉정하게 말하면 그렇게까지 해줄 이유는 없던 게 맞았다. 엔릴 역시 리엘이 생판 모르는 남이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테니까.

“휴...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아, 누나한테 의논하려고 왔어. 시해혐의는 벗었지만, 상해를 입힌 건 사라지지 않는 사실이니 처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잖아.”

“그렇구나.. 그럼 어떻게 하려고?”

“누나, 도와줘. 누나가 당사자니까 얼른 선처해.”

보자보자 하니까... 빚쟁이도 아니고 정말 뻔뻔한 동생놈이었다.

“으응.... 아, 그럼... 나한테 보내. 날 다치게 한 만큼, 내 시녀로 일하며 성심성의껏 수발을 들라고 말이야.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이건 리엘 입장에서 보면 로또였다. 황족의 시녀라니... 별궁의 하녀로 시작한 황궁 생활이 마탑의 시녀로 바뀐 것만 해도 대박이었는데, 이젠 황족의 시녀가 되는 것이다.

물론 상해죄에 대한 처벌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워낙 제멋대로인 엔릴이었기에, 뭔 짓을 해도 다들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였다. 뭐 이미 더 말도 안 되는 짓도 한 마당에, 이 정도가 대수겠는가 싶었다.

아나이스는 그저 아바마마가 안쓰러웠다. 이 상황을 처리하느라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리가 아플 텐데...

“에이, 누나 그게 끝이야?”

“응? 이걸 원하는 거 아니었어?”

“아 진짜... 나랑 평생 같이 커왔는데 왜 이렇게 몰라?”

“으응?”

그거야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저렇게 말하면 뭔 소리인지 알 리가 없었다.

“일단 그렇게 데려온 다음에, 생각해보니 시녀가 남아돈다고 나한테 바로 보내야지! 내 시녀로 말이야!!”

“.......아... 이 응큼한 녀석!”

“흐흐흐...”

사실 엔릴은, 리엘에게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당당한 지위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라츠 제국은 황제 외에는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 후궁을 둘 수가 없었다. 황제조차도 황후 외에 황비를 딱 한명 두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엔릴 역시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는 그녀에게 그 어떤 지위도 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일단, 눈에 보이는 근처에라도 데려다 놓고 리엘을 보호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이 어마어마하게 호사스러운 공간에서 무위도식하며 지내고 있으려니, 오히려 마음이 불편했다. 차라리 무슨 일이라도 시켜주면 좋으련만, 시중인들은 그저 지극정성이었다.

그 극진한 수발에 새삼 그가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수저라는 게 절실히 와 닿았다. 정작 본인은 태어날 때부터 이러고 살아서 아무 생각 없는 듯 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왠 정체모를 여자애가 아들내미 처소에 똬리를 틀고 있는데, 황제랑 황후는 뭐라고 할지도 걱정이었다.

리일이 바빠 자리를 내내 비웠기에, 난 더더욱 불안했다. 갑자기 두 분 중 누군가가 들이닥쳐서 나를 족칠까봐 말이다. 고용인들에게 친절한 것과, 아들을 후리는 하녀를 대하는 것은 별개일 테니까...

똑똑똑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들려온 노크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리일이라면 제 방에 노크를 하고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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