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41화 (41/134)

41. 재회(6)

2017.01.23.

***

어떻게 방까지 돌아왔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리일의 말을 들은 난, 예법이고 뭐고 무시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가 다급하게 부르며 붙잡으려 했지만, 난 손도 뿌리친 채 무작정 뛰었다.

어떻게 하지.. 어떡해... 내 마음이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아직도 그의 말이 귓가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끝없이 재생되며 온통 내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

-나, 너 안 놔.

이러지 마 제발... 이 끝은 결국 파국인 걸 모르겠어? 나에게는 너와의 그 어떤 미래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리일의 말에 덜컥 흔들려 버린 심장은 아직도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었다.

아니야. 아니야. 괜찮아 질 거야. 밀어내고 또 밀어내다 보면, 그도 지쳐서 포기할 거야. 어차피 잠깐의 흥미일 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마음껏 누군가를 좋아할 수도 없는 내 처지가 너무 비참해...

난 그렇게 울면서 잠이 들었다.

***

리일과의 나의 불편한 관계와 상관없이, 황궁의 일은 늘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지난번에 달달 외운 내용에 따르면, 곧 쌍둥이 황자황녀의 생일이 돌아온다. 즉, 리일의 생일이라는 것이다.

본궁의 모든 시중인들은 바빠졌다. 그 중 특히 황태자 처소의 시녀인 나는 어마어마하게 바빴다.

한참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나를 시녀장이 불러세웠다.

“리엘, 재단사와 보석상이 내일 오기로 했으니 전하의 훈련일정과 겹치지 않게 가서 말씀드려라.”

“네! 시녀장님! 지금 다녀올게요!”

“그리고 황녀전하의 일정도 알아오거라.”

“네?”

“아마도 전하께서는 이번에도 황녀전하와 함께 입장하실 거다. 그러니 두 분의 코드를 맞추려면 의상을 함께 맞춰야 해.”

“네!”

“아, 아니다. 셀리나 공주 저하와 입장하실 지도 모르겠구나. 이번에는 누구와 함께 입장하시려는지..”

“아.........”

“전하께 그것도 여쭤보고 오너라.”

측근시녀인건 참 좋은데... 리일에게 뭔가 곤란한 얘기를 해야 할 때, 왜 다들 나한테 떠넘기는지 모르겠다.

나도 불편하단 말이야!!

***

이 시간쯤이면 리일은 아마 연무장에서 구르고 있겠지? 원래는 쫓아가서 수발을 들어야 하지만, 내가 요즘 연회 준비로 너무 바쁜지라 리일은 제 몸을 알아서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리...! 전하!”

누가 있는 모습에 난 재빨리 호칭을 바꿨다.

“리, 리엘?”

요즘 가뜩이나 리일을 밀어내던 중에 마침 바빠진지라, 난 그 핑계로 한동안 그의 근처에 얼씬도 안 했었다.

내가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리일은 화들짝 놀랐다.

근데 왜 저렇게 놀라지? 아, 웃통 까고 있어서 그런가? 뭐,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새삼... 물론 봐도 봐도 좋긴 하다만... 크큭...!

그런데 리일 가까이에 가 보니, 반대쪽 어깨에서 피가 철철 나고 있는 게 보였다. 헉, 이거 왜 이래? 누가 이런 거야? 암살자라도 나타났던 거야?

“전하!!”

난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은 그저 평온했다. 다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뭐야, 자객의 습격이 일상이라는 건가? 왜 호들갑 떨며 난리치지 않지? 일국의 황태자가 습격당했는데!! 그럼 리일의 곁에 있으면 나도 시도 때도 없이 위험해지는 거야?

“저, 전하... 무슨 일이에요? 어..어쩌다 이렇게 다쳤어요?”

“에이 몰라... 하필이면 딱 쪽팔린 순간을 들켜버렸네...”

“네? 그게 무슨...”

“아... 아프잖아! 안 아프게 잘 좀 해봐!”

리일은 내 말을 은근슬쩍 무시한 채, 주치의에게 온갖 짜증을 다 냈다. 검에 베인 건지 어깨가 길게 찢어져 있었다.

“으휴... 엄살은. 리엘이 보고 있잖아, 가만히 좀 있어라. 대체 누굴 닮아 저렇게 엄살이 심한건지...”

“누구긴 누구겠어요. 울 아버지를 하나도 안 닮았으니, 경을 똑 닮은 거겠지요. 아바마마가 그러던데 이 엄살은 거기서 내려온 특징이라고...”

짝!

“아야! 아파요!“

헛소리 하다가 등짝을 한 대 후려 맞은 리일이었다.

난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갔으나, 어쨌든 별 거 아닌 일 같았기에 용건을 말했다.

“전하. 탄신일 무도회에 누구와 함께 입장하실지, 시녀장님께서 여쭙고 오라 하셨어요.”

“응? 입장?”

“네.”

“비밀인데?”

“............”

“비밀이라고 전해 줘.”

“.............전하... 그럼 의상은...”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

“네? 어쩌시려고요...”

“아, 내가 다 계획이 있다니까? 심모원려한 계획이!”

“...........아 네...”

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왠지 불안했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웃전이 저러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난 터덜터덜 돌아가 시녀장님께 토씨 하나 안 빠트리고 그대로 전했다.

***

“미친...”

앗, 육성으로 터져 나왔네.

그 심모원려한 계획이라는 게 이거였어? 너 설마, 나랑 입장하겠다는 소리 아니지? 그런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해줘...!!

난 황당한 표정으로, 내 방에 가득 쌓여있는 고급스러운 상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겪어봐서 열어보지 않아도 뭐가 들어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갈수록 첩첩산중이네.... 에이, 설마... 그냥 입고 가라고 보낸 거지, 설마 나랑 손잡고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지? 난 어차피 본궁 무도회에 가지도 못하잖아.

아닐 거야 하면서도,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난 벌떡 일어나 리일의 처소로 달려갔다. 책상 위에는 내가 아까 확인하다 팽개쳐 놓은 초대장 명단이 있었다.

“어디 보자... 레비넌... 레비넌 백작가...”

미쳤네, 미쳤어! 왜 우리 가문의 이름이 본궁 무도회 초대명단에 떡 하니 있는 거야!! 이름도 잘 모를 법한 머나먼 적국의 지방 백작가인데! 고작 아카데미에 유학중인 학생들을 본궁 무도회에 초대한다고?

이거 누가 봐도 나 때문이잖아!!!

“하아......“

심지어 시녀장님께 확인해보니, 내 반일휴가가 이미 무도회날에 맞추어 결재가 나 있었다. 난 신청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리일... 진짜 제정신이야?

달칵

마침 문이 열리고 리일이 들어왔다.

“전하!!”

“어? 리엘, 내 방에 있었네? 나 다친 거 보고 걱정돼서?”

꿈보다 해몽이라고, 순식간에 입이 귀에 걸리는 엔릴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팔은 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잠깐 한눈팔다가 베이는 바람에...”

“네? 어쩌다가요?”

“대련 중에 잠시 집중을 잃었더니 하하하... 부끄럽네... 하하하...”

아, 그런 거였구나. 난 또 자객이라도 든 줄 알고 호들갑 떨었네.. 그나저나 이 세계는 역시 살벌하구나... 진검이라니, 안 무섭나...? 진짜 적응 안 된다...

나로서는 상상도 안 가는 일이다. 저 상황을 현대, 그러니까 전생으로 가져와 상상해 보았다. 기다란 회칼 들고 서로 찌르고 베어대는 모습이겠지? 상상하니 갑자기 소름이 쫙 끼쳤다. 까딱하면 죽을 텐데 그게 고작 연습이라니...

“으으... 아팠겠다... 정말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 이미 힐링도 받았어. 그리고 사생결단 낸 것도 아니고 그냥 대련이었으니까, 어차피 급소는 다 피해서 공격하거든. 나 이래봬도 귀한 몸이라고!”

으으... 무서운 세상!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익숙해져야겠지? 새삼 남자로 안 태어나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야, 리엘이 이렇게 걱정해주니 되게 기분 좋다! 앞으로 또 다쳐와야겠다!”

“리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프니까!”

“정말? 그래도 되게 신난다. 쿡쿡..! 근데 여자들은 다 그런가? 어마마마랑 똑같은 말을 하네?”

“네?”

“어마마마도 내가 다치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프다고, 연무장에 아예 오지도 못하시더라고.”

“아......”

그래서 내가 황후를 생전 못 본 거였구나. 리일은 거의 하루 종일 연무장에 있으니까...

구르는 모습을 보는 것만 해도 안쓰러운데... 소중한 아들이 맨날 피 철철 흘리며 검에 찔리고 베이고 하는 모습이 얼마나 맴찢일까?

내가 직접 저렇게 되지는 않더라도, 이 험한 세상에서 누군가의 아내로 어머니로 산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어지간한 강철멘탈 아니고서야 정말 힘들겠어.

그렇게 생각하니, 황후가 보이는 것처럼 그저 곱고 여린 사람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강단이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서 맨 정신으로 살지도 못할 것 같다.

평화로운 일상도 이럴 진데, 만약 전쟁이라도 나면...... 연인이나 남편, 아들을 전장으로 떠나보낸다는 게 어떤 기분일지... 가면 거의 돌아오지도 못할 텐데...

안정되어있던 전생과 달리 워낙 사람이 픽픽 죽어나가는 세상이니까. 여기서는 그냥 늙어죽을 때까지 끝까지 살아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난 나중에 아들 낳으면 절대 검을 안 시켜야겠다. 하지만 스스로를 지킬 무력이 필요하긴 할 텐데... 차라리 공격마법을 배우게 할까? 근데 그건 더 특수한 재능이 필요한데..

아니, 일단 나부터 호신수단을 배워야지... 이러다 자식이고 뭐고 보기도 전에 내가 먼저 뒤지겠어. 근데 마법은 이제 물 건너 간 건가?

“리엘?”

“............”

“리엘??”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런 것 치곤 표정이 너무 심각한데?”

“아뇨, 그냥... 차라리 검보다 마법을 배우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쪽이 덜 무서우니까요.”

“마법? 그거 엄청 골치 아파. 난 그런 건 딱 질색이라... 누나는 꽤 흥미 있어 하는 것 같지만...”

“황녀전하요?”

“응. 그때 아바마마 따라 마탑에도 갔었잖아. 네가 사고 친 날.”

“아....”

“왜, 리엘도 배워보고 싶어? 그러고 보니 그 사고도 혼자 마법 연습하다가 난 거라며?”

“네? 아, 아뇨. 아니 그러니까 사고 친 건 그게 맞는데... 제가 어떻게 또 마법을 배워요. 그런 대형 사고를 쳐서 마탑에서도 쫓겨났는데...”

“마탑에서야 널 데리고 있기 불편하니까 그런 거고, 사고 한 번 냈다고 두 번 다시 못 배우면 세상에 마법사는 한 명도 없을 걸? 마법 계속 해 볼래?”

“네??? 정말요? 그럴 수 있어요?”

“물론이지. 원한다면 바로 시작하게 해 줄게. 안 그래도 요즘 누나가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거든. 누나 처소로 아카데미 교수가 와서 가르치고 있으니, 시간에 맞게 같이 가서 배워.”

“정말요? 정말요?? 정말요??”

“응. 바로 얘기해 둘게.”

“고마워요! 정말 고맙습니다!! 리일 너무너무 감사해요!!”

내가 너무 신나하자, 리일도 기분이 좋았는지 그 백만불 짜리 미소를 환하게 보여줬다. 나도 마주 웃으며 기쁜 얼굴로 화답했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 마음에 걸려 그저 좋아할 수만은 없어졌다.

“리엘...?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너무 미안해서요. 제가 항상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가 주는 안락한 생활과 온갖 편의는 다 받으면서, 정작 그의 마음은 이렇게 밀어내려 하다니... 나 너무 못된 것 같아.

“좀 받아도 돼.”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좋아하는 사람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은 건 당연한 거 아냐? 리엘, 내 기쁨을 빼앗지 말아줘.”

아... 안 되는데... 이 미친 심장이 멋대로 또 날뛴다...

“...........”

“널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해 주고 싶은 걸 다 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라고.”

“........”

“나도 항상 받고만 자란 이기적인 놈인데, 너에게는 뭐든지 주고만 싶어져.”

“........리일...”

“그러니까 제발 나 밀어내지만 마. 부탁이야.”

“..........”

이걸.. 이걸 어떻게 더 밀어내...

리일이 내 쪽으로 성큼 다가왔지만, 나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한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바싹 붙여왔다. 난 뒷걸음치며 물러나려 했지만, 소파에 걸려 얼결에 앉아버렸다. 푹신한 등받이에 몸이 푹 파묻히며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리엘...”

양 손으로 단단히 나를 소파에 가둔 상태로,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리일...”

난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의 코앞에서 숨결이 느껴지며 막 입술이 겹쳐지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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