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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43화 (43/134)

43. 무도회(2)

2017.01.25.

“공주. 난 이미 엔릴의 결정에 맡겼으니, 내가 나설 일이 아니라 생각하네.”

“황후 폐하!!”

“.....”

“폐하!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으셔야지요! 어디 감히 천한 사생아 출신 하녀가 전하의 옆자리를 넘본답니까! 리테인에서는 이런 분수도 모르는 계집은 엄히 매질하여 내쫓았습니다!”

“그만하게.”

“폐, 폐하... 하오나... 황실의 권위가...”

“그만하라 하지 않았는가! 내 말이 우스운가!? 공주, 설마하니 지금 내게 충고를 하고 있는 겐가?”

다시 팝콘이 되었다. 물론 매질해서 내쫓네 마네 하는 그 대상이 바로 나였지만, 왜 이렇게 강 건너 불구경 같지?

그리고 아무리 봐도 황후는 저 공주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지금 꽤 열 받은 것 같아 보였다. 내 착각 아니지? 솔직히 분수를 모르는 건 공주 너라고. 감히 어디다 대고 지적질이야!? 난 적어도 내 주제를 알고 가만히 있잖아.

“죄, 죄송합니다. 폐하... 제가 주제넘게...”

“알았으면 그만 되었다. 리일,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아 이만 가봐야겠구나. 다음에 다시 보자.”

“네, 어마마마.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참, 그리고... 리엘이라고 했니?”

“네? 네!! 폐하!!”

갑자기 날 부르는 황후의 목소리에, 난 정말 화들짝 놀랐다.

“면전에서 모욕을 듣게 해 유감이구나.”

나, 나를 위로해 주신 거야...? 정말...? 싫어해도 모자랄 판에...?

“.............”

난 너무 멍한 나머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내가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황후는 이미 떠나버렸다.

그 사이 리일은 줄을 당겨 재빨리 시종들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공주가 몸이 안 좋아 이만 돌아가겠다 하니, 배웅해 드려라.”

“전하!!”

“기사들에게 끌려서 나가겠소? 아니면 제 발로 나가겠소?”

“...............”

한차례 입술을 파르르 떤 공주는, 분을 삼키며 몸을 돌려 휙 나가버렸다.

“오늘 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는지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제 발로 떠났다.

아... 뭔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야...

“.........후......”

기운이 빠져버린 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리엘! 괜찮아?”

“죄, 죄송해요... 조금 긴장했더니...”

“미안, 그렇게 불편해 할 줄은 몰랐어...”

너 같으면 안 불편하겠냐! 까마득한 신분들 사이에서 숨도 못 쉬겠는데!!

“괜...찮아요... 휴...”

“아냐, 정말 미안... 공주한테 그런 말이나 듣게 하고.”

“사실인데요 뭐... 천한 신분인걸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사실보다 훨씬 나은 묘사였다. 사생아도 아닌 평민인 게 내 진실이니까.

“아냐. 그런 말 하지 마. 천하다니..."

“네?”

"신분이란 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게 무슨...?"

“부모님께서 늘 그러셨어. 보다 나은 신분과 지위라는 건, 그저 남을 돕기 위해 쓰여야 하는 것뿐이라고 말이야. 누군가를 업신여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

나조차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그 파격적인 생각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공주의 말 따위 마음에 담아두지도 말고. 그런 거 아무 상관없으니까.”

“..............하지만 제가 리일 옆에 설 수 없는 건 변함없어요.”

그 문제는 그 문제고, 결혼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

“리엘. 나랑 무도회 가는 게 그렇게 불편해?”

무도회만을 얘기한 게 아닌데...

“.........”

“정식으로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서 그래.”

“그래서 초대하신 거예요? 레비넌 가문을 본궁 무도회에 전부요?”

“응.. 알고 있었네.”

“방에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어떻게 몰라요.”

“벌써 도착했나 보구나.”

“그때 드레스, 전하였죠? 외궁의 무도회에서...”

“으응. 다 들통 났네? 근데 그땐 몰랐어?”

바보야. 처음부터 알았다. 순진해 빠져가지고는.. 네가 아무리 날고기어도 이 아줌마를 어떻게 이기니? 네가 보낸 것도, 네가 황태자인 것도 다...

그래, 차라리 다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 꼬셨던 거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을까? 그럼 실망해서 나에 대한 미련 접겠지?

하지만 막상 그러자니 두려웠다. 분노한 그가 나에게 싸늘하게 등을 돌리면 어쩌지...

이건 그냥 보통의 연인들이 싸우고 갈라지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의 문제였으니까.

지금 내 상황이라는 게, 오직 그의 절대적인 호의에 기대고 있는 모양새다. 그가 나를 버리면 난 다시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 상황에서 저 공주지옥으로 던져지면 내가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때문에 난 늘 애매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다. 그에게 진실을 고백하고 완전히 밀어낼 용기도 없고, 그렇다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나 진짜 이기적이구나. 내 한 몸 안위를 위해 그를 이용하고 있는 거 맞아. 하지만 도저히 그곳으로 돌아갈 자신은 없어. 너무 무섭단 말이야.

결국 이번에도 전부 말할 수 없어서, 난 반만 솔직하게 얘기했다.

“리일이 보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긴 했어요.”

황태자인걸 알았다는 얘기만 쏙 뺐다.

“그랬구나...”

“풋. 동화 속 요정이 나타난 거라면서요.”

“요정 맞지! 아냐? 솔직히 나 정도면 요정보다 예쁘다!”

-자 어서 귀엽다고 말해!

“아, 네.. 네..!! 귀여워요.”

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내 모습에 리일도 무안했는지 파하하 웃어버렸다. 결국 나도 웃음보가 터져서 같이 깔깔대며 한참을 웃었다.

신나게 웃었더니 아까의 긴장도 많이 풀리고, 울적했던 마음도 꽤 가셨다.

“우리 어마마마 봤잖아. 저 미모 내가 고대로 빼왔다니까?”

“정말 천사처럼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시지요.”

“맞아. 같은 공주 출신인데, 셀리나 공주는 왜 이렇게 못돼 먹었지?”

“그러게요... 공주의 어머니가 못돼 먹었나 보죠.”

“풋 그런가?”

“그렇겠죠? 그래도 부럽네요... 공주라니... 나도 공주하고 싶다.”

나도 공주였으면, 리일 곁에 당당히 설 수 있을 텐데...

“공주 같은 거 아니라도 난 리엘이 훨씬 좋아.”

리일이 내 눈을 또렷이 쳐다보며 말했다. 그 확고한 눈빛에 내 눈동자는 오히려 사정없이 흔들렸다.

“..........”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어. 흥미롭기도 했고.”

“........”

“나를 전혀 모르는 여자애... 다들 나만 보면 굽실대고 아양 떨기 바쁜데, 틱틱 대며 할 말 다 하는 여자애.”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리일은 내 대답을 들으려는 게 아닌지, 계속 혼자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시작한 호기심이 호감이 되고... 네 솔직한 모습에 점점 끌렸어.”

정체를 알고 나서, 나 너한테 한 번도 솔직했던 적 없는데...

“함께 축제를 즐겼던 시간도 정말 즐거웠어.”

그때도 정체를 몰랐을 뿐, 내가 얼마나 이리저리 쟀는데... 네 머릿속도 얼마나 들여다봤는지 몰라. 지금은 네 생각이 뻔히 다 보여서 별로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때 내가 얼마나 머리를 굴리며 너를 파악하려 노력했는데...

“네가 뒷골목에서 위험할 뻔 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를 거야.”

“.............”

“다른 녀석이 너에게 접근하니까 화도 나더라.”

-감히 우리 리엘에게 꽃을 바쳐!?

역시 검술대회의 딜런은 리일이 치워버렸나 보다.

“공주 밑에서 고생하는 널 보며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도 생기고...”

리일, 그것도 다 동정표 작전이었을 뿐이야...

“나 어느샌가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나봐.”

나처럼 못된 애를 왜...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나한테 네 처형소식을 들었을 때, 다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오직 널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

“대체 왜 이렇게 밀어내는 지 말해주면 안 돼?”

“..............이제 알 것 같아요.”

“뭐를?”

“그때 거리에서 점쟁이가 했던 말이요. 잊고 있었는데 생각났어요. 나 때문에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을 거라는 거요.”

“뭐?”

“리일, 솔직히 황제폐하, 황후폐하께서 저를 반기실 리 없잖아요.”

“설마, 그런 것 때문에 날 밀어낸 거였어? 우리의 일에 그런 걸 왜 신경 써!? 그리고 그 점쟁이는 돌팔이야!”

니가 동네 부자만 되도 부모님 허락은 중요한 건데, 너 황태자라고 황태자. 너랑 결혼하면 내가 미래의 황후가 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

“옛날부터 난 항상 내 여자는 내가 고를 거라고 말해 두었어. 그러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그 내 여자라는 게 그래도 제국의 번듯한 귀족영애에 한정된 거겠지. 너 왜 이렇게 순진하니!?

“아니요. 그럴 수는 없어요.”

“상관없다니까 왜 자꾸 그래!!”

“왜 상관이 없어요! 황태자씩이나 되어서, 어떻게 아무 여자나 골라요!?”

“리엘이 왜 아무 여자야? 내가, 내가 좋아한다고!!”

“이게 서로의 감정만으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 그럼 황태자 아니면 되는 거야?”

“네?”

“황태자 아니면 상관없는 거냐고.”

“네에? 그게 무슨...”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리일은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

그날의 얘기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꺼내지 않았다. 난 무도회 준비를 핑계로 리일을 열심히 피해 다녔고, 실제로 정말 바쁘기도 했던지라 우리는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리엘! 이쪽으로 와서 명단을 체크해!”

“네! 초청장의 이름과 대조해서 확인하면 되나요?”

“응, 외국의 사신 일행은 특히 꼼꼼히 확인해야 해.”

“네.”

“그리고 귀빈들이 머물 숙소 준비에 소홀함 없도록 하녀들에게 말해 두고.”

“네!”

“홀에 장식할 꽃은 알아봤어?”

“네?”

“꽃 말이야! 지난번에 얘기했잖니! 겨울이니 미리미리 알아보지 않으면 구하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고.”

“네, 네! 아, 알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참에 동관의 인테리어를 산뜻하게 바꾸는 게 좋겠어.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너무 칙칙하면 전하의 이미지가 어두워 보이잖아. 각국의 사신들도 많이 올 텐데...”

“네, 그것도 시종장님께 말씀드려 둘 게요!”

“리엘, 세르티아 홀 청소가 제대로 되었는지 확인하고 오렴. 먼지 하나 없이 청소하고 광을 내야 해!”

“네!”

“아! 그리고 전하께서는 진청색을 좋아하시니까, 전체적인 색감을 잘 고려해서 장식하라고 전해 두거라!”

“네, 네!!”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홀을 확인하고 다시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또 끝없이 일거리가 날아 들어왔다.

그렇게 매일매일 시간은 훌쩍 흘러 대망의 무도회날 아침이 되었다.

리일은 오늘은 생일이라 후작이 특별히 훈련도 빼줬다며, 아주아주 신나서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었다.

“리엘”

“네, 부르셨어요?”

“리엘 바빠?”

한가해지니 나랑 놀고 싶은 모양인지, 자꾸 이리저리 불러대는 게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다.

“네.”

“.........알았어...”

단호박 같은 내 대답에 리일은 푸스스스 바람 빠진 공처럼 쭈그러들었다.

“리엘. 근데 나, 무도회에 가려면 몸단장을 해야 하지 않아?”

지금 아직 오전이잖아! 무슨 귀족 영애도 아니고 사내놈이 벌써부터 치장이야!

“전하, 주인공이신 전하는 거의 마지막에 입장하시잖아요. 아직 멀었다고요! 무도회는 저녁때 열리고, 지금은 점심도 먹기 전이랍니다.”

날 어떻게든 옆에 붙잡아두고 싶은 심산인 거 모를 줄 알아!? 그리고 시녀가 나밖에 없냐! 널 십 수 년 수발들어온 베테랑 시녀들이 얼마나 섭섭하겠어!! 에휴... 내가 진짜 어딜 가나 악의 축이네.

“그래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게...”

“앗, 전하! 전 시녀장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어서...!!”

난 재빨리 꽁무니를 뺐다. 사실 시녀치고는 무지하게 건방진 행동이지만, 그래도 건방진 시녀인 게 감히 황태자를 넘보는 계집보다는 낫지 않겠어?

한참 정신없이 준비하다가,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방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또 딸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리일이 또 줄을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아, 진짜 이 인간이!!!

“전하, 부르셨습니까.”

“리엘, 이제 진짜 갈 준비를 해야 해서... 목욕물 좀 준비해 줄래?”

시계를 흘긋 보니 이젠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 준비할 때가 되긴 했다.

“네, 전하.”

난 하녀들에게 목욕물을 날라 올 것을 지시하고는, 리일의 옷을 벗겨 주었다.

근데 이거 묘하게 설레네... 한 꺼풀 한 꺼풀 벗길 때마다 드러나는 그의 몸이 너무 섹시해서 몸이 다 베베 꼬이는 기분이었다.

살짝 붉어진 내 얼굴을 눈치 챈 건지, 리일이 짓궂게 놀렸다.

“리엘, 얼굴 빨개. 내가 그렇게 멋있어?”

으이그 이걸 콱! 황태자만 아니면 한 대 쥐어박고 싶은데! 나도 니 등짝 좀 후려갈겨보고 싶다!

“바, 바쁘게 뛰어다녔더니 더워서 그래요!”

아 왜 오늘따라 하필 내가! 다른 시녀들도 많은데!! 리일이 다 어디로 쫓아 보낸 건지, 방 안에는 리일과 나 단둘뿐이었다.

드디어 옷이 다 벗겨지고, 리일은 헐렁한 얇은 반바지 한 장만 입은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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