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무도회(3)
2017.01.26.
쓰읍... 저걸 벗기면...
꿀꺽
헉, 나도 모르게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났어!
“큭큭큭... 리엘, 무슨 생각 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냐. 너 덮치고 싶다는 생각했어. 그만 유혹하고 빨리 욕실로 꺼져버려!
난 냅다 리일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남성은 시녀들의 목욕시중을 받을 수 없기에, 내 일은 여기까지였다. 절대 저 안에 같이 들어가서 음란해 질 일이 없다는 것이다!
“자, 잠깐만! 물 온도를 확인해 줘야지!”
“아! 죄송해요.”
욕실 안에는 하녀들이 공손히 대기하고 있었다. 온도가 맞지 않으면 다시 물을 날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 정말 용 됐네. 원래라면 저런 게 내 일일 텐데... 이젠 하녀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쭈그려 앉아 불을 떼 물을 데우고, 낑낑거리며 아래층부터 옮겨다 나르고, 욕조에 끝없이 붓고... 생각만 해도 끔찍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별궁 하녀일 때, 산더미처럼 무거운 시트를 끙끙대며 나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역시 절대 다시 못 돌아가!! 안 돌아가!!
“적당하네요.”
머릿속 잡생각과 달리, 내 손은 물을 휘휘 저으며 온도를 가늠했다. 내 말에 하녀들은 안도한 듯 모두 물러났다.
“그럼 저도 이만.”
나 역시 재빨리 나왔다. 하지만 리일이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방으로 완전히 돌아가지는 못하고 그의 방에서 대기했다.
“리엘!!”
젠장. 그러면 그렇지... 왜 안 부르나 했다.
벌컥
빡친 나는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왜요!”
앗, 너무 건방졌나?
“아하하.. 전하, 뭐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뒤돌아 앉아있는 리일의 등근육이... 으어.. 조각 같았다. 젠장, 보지 말자. 보지 말아야해...
“리엘... 팔 때문에, 이쪽 등을 혼자 씻을 수가 없는데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될까?”
“제, 제가요? 차라리 시종을 불러드릴게요!”
“싫어! 시커먼 남자 놈 손에 주물럭 당하고 싶지는 않다고!”
“............”
“팔을 돌리기가 너무 아파서 그래...”
아 진짜! 마음 약해지게...!
얼핏 보니 무리해서 팔을 뒤로 돌리다가 상처가 다시 벌어졌는지, 붕대에 피가 배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또 다친 거야? 지난 번 건 이미 나았을 텐데... 얘 혹시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나한테 이렇게 작업 걸려고? 에이 설마... 귀한 몸을 담보로 그랬겠어?
그리고 나 없었을 땐 그동안 어떻게 했던 건데!? 보아하니 하루 이틀 이런 꼴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내가 오기 전에도 알아서 잘 했을 거 아냐!
니가 뭐 며느리 들어오고 나면 갑자기 혼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되는 시어머니냐!
“아야, 아파라...!”
내가 계속 머뭇거리자, 리일은 다섯 살 먹은 애처럼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
“리에엘...”
“하아... 알겠어요. 딱 한번만이에요!”
난 눈을 꾹 감고 리일의 등 뒤로 다가갔다. 다행히(?) 하체에 수건을 두르고 있어서, 기대했던(?) 무언가(?)를 볼 수는 없었다.
난 샤워오일을 손에 덜어 내어, 그의 등에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
손끝에 닿는 감촉이... 야릇했다. 단단하면서도 탄력 있고 매끄러웠다...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다... 솔직히 이런 조각상 같은 몸매를 눈앞에서 직접 보고 만져본 건, 두 생을 틀어 처음이었다. 대부분의 남자는 이렇지 않으니까....
하악, 숨 거칠어지면 안 되는데... 리일이 눈치 채면 왠 개쪽이야!
슬쩍 그의 눈치를 살펴보았지만, 리일은 석상처럼 가만히 있었다. 표정 역시 잔뜩 굳은 상태였다.
“리일? 불편해요?”
“......”
“리일?”
“.........?”
내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묻자, 리일은 감전이라도 된 듯 부르르 떨었다.
“불편하시면 그만 할까요?”
“으...으응.. 그만 하는 게.. 좋겠어... 이, 이젠 내가 할 테니 나가 줄래...?”
“그럼 밖에서 대기할게요.”
“아! 아냐, 방으로 돌아가 있어. 알아서 할게!”
.......시뻘게진 얼굴로 더듬거리며 당황하는 모습, 움찔거리는 몸... 눈치 백단인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그러게 애초에 왜 부탁했니... 내 손길이 이 정도로 자극적일 줄 몰랐니?
에휴, 그래 이 누나가 다 이해 해. 내손이 좀 꿀손이지.
“알겠어요.”
리일은 지금 나를 내보내지 않고는, 차마 몸을 돌릴 수도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푸훗..! 조금 더 괴롭혀주고 싶지만, 불쌍하니까 봐 준다.
***
방으로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났건만, 리일은 나를 호출하지 않았다.
이제 몸단장 하느라 바쁠 시간인데, 날 보면 괜히 또 분신이 예민하게 반응해 버릴까봐 못 부르는 모양이었다.
자식, 의외로 순진한데? 많이들 만나보고 다녔다면서, 왜 이렇게 순수해?
어쨌든 널널해진 난, 드디어 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휴..."
그동안 내내 구석에 밀어놓고는 애써 외면하려 들었던 상자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쩌지...? 나 오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사실 무도회에 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내가 어떻게 뻔뻔하게 이걸 입고, 리일의 손을 잡고 거길 들어가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과연 리일이 호락호락 날 놔 줄 것인가 이다.
이미 휴가도 나 있는데, 잠시 어디로 피해있을까? 근데 어디로 사라지지? 궁 밖은 혼자 돌아다니 무섭고, 황궁 대운하는 시녀인 내가 마음대로 나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고...
이 넓은 황궁에서 내 한 몸 갈 데가 없다니 참 슬프네.
그렇다고 시녀용 식당이나 휴게실에 숨어있긴 애매한데... 리일이 찾으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곳이니...
똑똑
“리엘, 전하께서 찾으셔.”
줄을 당겨 호출하는 대신 시녀를 보내 직접 부르는 걸 보니, 아마도 무도회 얘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부름을 받은 이상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난 무거운 발을 떼며 일어났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방 안에는 리일 외에 아무도 없었다.
“리엘, 왔어?”
리일이 나를 향해 뒤돌아보며 웃어보였다. 이미 준비를 다 마친 듯, 눈부시게 멋진 모습이었다.
“............!!”
황족의 정식 예복을 갖춰 입은 리일은,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왕자님 그 자체였다.
벗은 모습도 좋지만, 이런 근사한 모습도 너무 좋았다. 진짜 눈 돌아가게 멋있네... 아니, 리일은 거적때기를 입고 흙먼지 위에 뒹굴어도 멋있어. 늘 보던 얼굴이지만, 새삼 심장이 날뛰었다.
이런 애가 날 좋아한다고 끝없이 다가오는데, 그걸 밀어내야 하는 내 마음이 얼마나 미치겠는가... 아 정말 끝없는 시련이다.
그냥... 그냥 조금만 욕심을 내 볼까...? 이제 전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이용하려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 리일의 말대로 부모님이, 그러니까 황제폐하랑 황후폐하가 상관 안하신다면... 어쩌면 조금 욕심 부려도 되지 않을까...?
아냐아냐아냐 지금 내가 무슨 개소리를! 그게 말이 돼?
“리엘?”
“.............네?”
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멍 하니 리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엘도 준비해야지.”
“네?”
똑똑똑, 벌컥
곧바로 문이 열리고, 내 방에서 나왔을 법한 상자들이 하인들의 손에 들려 줄줄이 방으로 들여졌다.
“리일, 이건...?”
“리엘의 방은 좁아서 단장하기에 불편할 테니 여기서 준비해. 내가 잠깐 비켜줄게.”
“리일...”
“욕실도 준비해 놨어.”
리일의 손짓에 고개를 돌려보니, 반쯤 열린 욕실 문틈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조가 보였다.
“리일, 정말... 정말 저랑 같이 갈 생각이세요?”
“응.”
-널 모두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어.
“......”
“제가 싫다고 하면요?”
“정말... 싫...어?”
리일은 상처받은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간절히 물었다.
“......하지만...”
“싫다면 강요할 수는 없지만, 동행을 부탁하고 싶어. 리엘, 내 에스코트를 받아 나와 함께 무도회에 가 주지 않겠어?”
오늘의 리일은 평소처럼, ‘내가 너무 멋있어?’ 같은 가벼운 농담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말 왕자님 같은 모습으로 내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
난 홀린 듯이 팔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아버렸다. 손끝이 살짝 닿자마자, 리일이 덥석 내 손을 붙잡고는 나를 끌어당겼다.
“리엘, 고마워. 정말 기뻐! 고마워!!”
헉! 내가 미쳤지!! 나도 모르게...
“......저야말로요. 리일.”
“그럼 응접실에서 기다릴게!”
탁, 달칵
리일이 나가자 곧바로 누군가가 들어오는지 문소리가 들렸다. 수발을 들 하녀를 보내준 건가 싶어 돌아봤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서 있었다.
“줄리?”
“리엘!! 오늘도 공주님처럼 꾸미고 무도회에 가는 거야? 정말 좋겠다!! 내가 도와줄게!!”
“줄리, 어떻게 여기에? 황녀 전하의 시중을 들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황태자전하께서 부르셨어. 너를 도와달라며.”
“아, 리일이... 아니, 전하가...?“
이렇게 꼼꼼한 배려라니... 혼자 준비하긴 쉽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처소의 시녀들한테 도움을 받자니 내 입장이 곤란해질 테니 줄리를 불러온 모양이었다.
받고만 자란 이기적인 놈이라며, 정말 왜 이렇게 배려심이 넘쳐...?
“응, 정말 잘됐다. 사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아하하...”
“생각해 보니 검술대회 때 옷이랑 모자를 서로 바꾼 게 신의 한 수였어. 뒷모습을 보고 너로 착각하지 않았다면, 나에게 정체를 들키지도 않았을 거 아냐.”
그것도 그거지만... 만약 줄리가 아니라 진짜 나였더라면, 내가 그때 정체를 알아버렸을 테니 지금과는 달라졌겠지? 리일과 이만큼 가까워지지 못했을지도 몰라. 줄리의 말대로 정말 신의 한 수였네.
“그러게... 줄리. 정말 다시 한 번 고마워. 너무너무 고마워서 차마 말로 다 표현이 안 되네...”
“아냐. 나야말로 미리 알면서도 말 못해서 미안해.”
“미안하긴!”
“아무튼 이젠 마음껏 물어봐도 되는 거 맞지?”
“응, 괜찮아.”
오랜만에 만난 줄리와 나는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무도회에 갈 준비를 꼼꼼히 했다. 황녀의 시중을 들며 솜씨가 더 좋아졌는지, 줄리는 순식간에 나를 변신시켜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만났냐 하면...”
“......는데? 어머! 그리고는?”
“운하 다음에... 멧돼지가...”
줄리는 내가 황태자와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면서도 믿기지 않는지 연신 이것저것 물어보며 신기해했다.
“정말? 어머머!”
“그리고.....에서...했고..”
“와! 정말 운명 같아!”
그렇지. 처음 두 번은 우연이었어. 그런데 우연 3회 운명설이 사실이라면, 우린 아직 운명이 되지 않았는데... 내가 찔리는 게 많아서 그런가, 괜히 자꾸만 불안해졌다.
정말 확실히 밀어낼 거 아니면, 내 태도도 똑바로 정해야 하는데... 난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아니,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내 마음대로 조절되지를 않는달까...
일단 무도회는 이미 가게 되었으니, 그래.. 오늘 밤 까지만...
“자, 리엘. 다 됐어. 어때?"
거울 속에는 금빛 찬란한 공주님이 홀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게 정말... 나?”
새하얀 피부는 마치 빛이 나는 듯 광채가 돌았고, 복잡한 기교 없이 깔끔이 틀어 올린 머리는 길고 우아한 내 목선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연한 브론즈 톤으로 세련되게 화장한 얼굴은, 안 그래도 오밀조밀한 내 얼굴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리일이 보내준 드레스와 소품들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다. 베이지 색에 가까운 연한 골드톤의 쉬폰 드레스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유디티안 스타일의 하이웨이스트 디자인이었다. 살짝 흩뿌려진 펄 덕분에, 움직일 때마다 별빛이 쏟아지는 듯이 아름다웠다.
리일의 안목이 꽤나 높은지, 이번에도 완벽하게 어울리는 세트로 구두와 장갑, 부채 장신구 등등 모든 소품을 함께 보내 주었다.
“리엘 진짜 예뻐!!”
응. 나도 인정... 나 진짜 예쁘다... 이건 꼭, 로마 여신 같아! 맞나? 뭔가 잘못 기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줄리. 고마워 정말...”
난 기쁘면서도 줄리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매번 이렇게 나만 무도회에 가고, 그때마다 거들어주기만 하는 줄리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마냥 신날 수가 없었다.
“리엘, 왜 갑자기 어두워졌어...? 혹시 나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난 정말 괜찮아!”
“그래도...”
“네 덕에 별궁도 탈출하고, 시녀로 승격도 되었잖아. 너 아니었으면 난 지금쯤 공주저하한테 맞아 죽어있을지도 몰라.”
“줄리, 내가 나중에 꼭! 꼭 무도회 데려갈게! 조금만 기다려!!”
“고마워, 리엘. 말만 들어도 정말 기뻐! 그럼 이제 어서 가야지! 이러다 너무 늦겠다.”
줄리의 말에 그제야 아차 싶었다. 리일이 준비를 끝마쳤을 때가 이미 무도회가 시작된 지 한참 후였는데, 그리고 내가 또 한참을 치장했으니 이미 시간이 훌쩍 흘렀을 것이다.
“응 다녀올게!”
황제보다도 늦게 들어가는 무례를 범하면 곤란했기에, 난 후다닥 일어났다.
리일이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 앞에 선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후우...”
이 문을 열면 리일이 기다리고 있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