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무도회(4)
2017.01.27.
문을 열고 들어서자 멍청하게 서있는 리일이 보였다.
“..........리엘...”
내 눈부신 모습에 홀린 듯, 그의 시선은 그저 멍했다.
“저 괜찮아요?”
수줍어서인지 약간 어색한 말투가 튀어나왔다. 나에게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하겠는지, 내 물음에도 리일은 그저 말없이 내 얼굴만 바라보았다.
“리일!”
“어? 어, 어... 너무 예쁘다, 리엘... 정말 예쁘다...”
“훗! 제가 좀 예쁘죠!”
난 리일이 평소에 맨날 하는 자뻑을 고대로 돌려 주었다. 하지만 리일은 나와 달리 핀잔은커녕, 정말 한심한 표정으로 헤벌쭉 웃었다.
“응, 진짜 예뻐!! 어마마마보다도 더 예쁜 것 같아!”
....고맙긴 한데,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마! 마마보이 같잖아!!
“고, 고마워요...”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리일이 근사한 자세로 내게 팔을 내밀었다.
***
무도회가 열리는 세르티아 홀은, 본궁 중앙에 위치해 있기에 우린 그냥 복도를 따라 걷고 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면 됐다. 지난번에 구두까지 벗어들고 외궁의 담벼락을 따라 한참을 걷던 때와는 다르게 말이다.
역시 권력의 중추가 좋구나! 에헤라디야!
그나저나 셀리나 공주는 어떻게 됐을까? 에스코트도 없이 어떻게 올 생각인 거지? 무도회에 혼자 등장하는 남성은 있어도, 여성은 에스코트 없이는 절대 참석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
약혼자가 없으면 가족이라도 함께 와야 하는 건데, 기러기 공주 신세인 그녀가 어디서 가족을 구해오겠는가 말이다.
몰라, 알 게 뭐야.
곧 황금과 상아로 장식된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이 문 너머로 입장하는 순간, 전장 한 복판에 내져지는 셈일 것이다.
“휴...”
“리엘, 긴장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 줄게.”
“고마워요.”
내 손을 꾹 잡아주며 리일은 시종에게 눈짓했다.
“그럼 고하게나.”
“네, 전하”
막 시종이 문을 열려는 순간,
“전하!!”
어디선가 튀어나온 셀리나 공주가 눈앞에 나타났다. 별실 구석에라도 숨어 있다가 리일의 모습을 보고 달려 나온 건지, 공주는 꽤 숨이 차 보였다.
“.....공주”
“전하!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어찌 레이디에게 파트너도 없이 혼자 입장하라 하시는 것인지요..!”
공주는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 있는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오직 리일에게만 매달렸다.
“나는 이미 파트너가 있소.”
“어떻게... 어떻게 이러십니까!”
솔직히 불쌍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도 안 불쌍했다. 리일도 더 상대하고 싶지 않았는지, 공주를 무시하고 시종에게 눈짓했다.
드디어 거대한 문이 스르르 열렸다. 시종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엔릴 세이라 폰 그라츠 1황자 전하와, 리엘 반 레비넌 영애께서.....”
저렇게 들으니 나도 꽤 그럴싸한 신분 같아 보인다며 시종장의 외침을 음미하는데, 갑자기 시종이 뒷말을 흐렸다. 응? 왜 그러지?
“그리고... 셀리나 피엔스 반 리테인 공주저하께서 드시옵니다!!”
“............”
“............”
이런 미친년이!
리일도 나도 순간 당황해서 굳어버렸다. 어느새 리일의 반대편 옆구리에는, 셀리나 공주가 찰거머리처럼 붙어있었다.
그러니까... 저 공주년이, 자존심도 다 팽개쳐버리고... 문에 들어서는 리일의 옆으로 잽싸게 따라붙은 거다.
졸지에 우린 리일을 가운데 두고 양 옆에 여자들이 들러붙어 있는 형국이 되었고, 셋이 동시에 들어가는 모습에 시종은 어쩔 수 없이 문장을 마치려다 말고 공주를 끼워 넣은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입장을 해 버렸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려 있는데, 대놓고 떨쳐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무도회장의 반응은, 내가 애초에 상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센세이션이었다.
수군수군
웅성웅성
부채 뒤에서는 끝없는 정보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래요?”
“왜 전하께서 두 명을 에스코트해서 오신 거죠?”
“한쪽은 셀리나 공주인데...”
“저 옆의 레이디는 누구...?”
“어머, 소문도 못 들었어요?”
“전하께서 아끼셔서 끼고 도는 시녀라고...”
“공주를 따라 리테인에서 온 영애라지요?”
“아까 이름이.. 리엘이라고요?”
리일이 나랑만 들어왔어도 난리가 났을 텐데, 양쪽에 하나씩 여자를 끼고 들어왔다. 하나는 약혼녀 후보, 하나는... 황태자 후리는 요망한 시녀(?).
하아.. 오늘 이후 이 황궁에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군.
저들은 이제 신나서 내기를 해 대겠지. 어느 쪽이 승자가 될 것인지. 엔릴이 첫 춤을 누구와 출 것인지 등등...
어쨌든 리일은 당황스러움을 순식간에 수습하고, 내게 팔짱을 낀 채로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난 그에게 의지하며 떨리는 발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그리고 공주는 리일이 팔을 내주지 않자, 껌딱지처럼 알아서 옆에 들러붙어 쫓아왔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쫙 갈라져나갔다. 걷는 걸음걸음마다 수군거림이 쫓아왔다. 드디어 홀 중앙에 서자, 우리 주변으로 둥그런 인간 원이 생겨버렸다.
그 속에서 호기심어린 시선을 가득 받으며 서 있으려니 정말 고역이었다. 리일 역시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공주를 흘긋 보았다.
원래 주인공이 등장한 후에는 첫댄스가 있어야 하는데... 오케스트라도 벙쪘는지 그저 굳어있었다.
이 와중에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곧 일어날 일을 예상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우리를 구해 준 건, 시종장의 우렁찬 외침이었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 납시옵니다!”
이어서 또,
“그리고 아나이스 세이라 폰 그라츠 황녀 전하와, 로렌 세이라 폰 그라츠 2황자 전하께서 드시옵니다!”
곧 우리가 들어온 입구가 아닌 안쪽 문에서 황제일가가 등장했고, 장내에 있던 모두는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했다.
다행히 황제의 입장에, 우리에게 쏠렸던 시선이 순식간에 분산되었다.
그리고 리일은 이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내 손을 잡고 공주에게 멀리 떨어졌다. 셀리나 공주 역시 인사를 올리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라, 우리가 떠나버리는 걸 미쳐 놓쳐버렸다.
“리, 아니 전하..!!”
얘 미쳤어! 다들 고개 숙이고 있는데 뭐하는 짓이야! 으어어 이러나 날벼락 떨어지는 거 아냐?
너야 니네 아빠니까 인사고 뭐고 쌩 까고 막 이동해 버리는 거지만, 난 좀 입장이 다르다고! 다들 고개 숙이고 있는데 내가 네 손 잡고 휘적휘적 걸어가면 심장이 얼마나 쫄깃하겠어!! 난 황제의 ‘황’ 자만 들어도 무섭다고!
라는 눈빛을 마구 보냈지만, 리일은 둔한 건지 멍청한 건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하!! 이러시면...!”
난 질질 끌려가면서도 작게 항변했다. 분명 저 단상 위의 황좌에서 다 보일텐데...!!
“휴. 드디어 떨궜네. 징하다, 징해.”
리일은 공주에게서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멈췄다.
“......”
잠깐의 해프닝이 순식간에 지났고, 황좌에 앉은 황제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라.”
드디어 사람들이 허리를 폈고, 공주는 그제야 우리가 사라진 걸 알아챘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롱!
“그럼 모두 연회를 즐기도록”
황제는 대충 무성의하게 말하더니 이윽고 이쪽에 신경을 껐다. 사람들은 원래 늘 그랬다는 듯이 무도회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휴... 다행이다. 그나저나 조금만 더 늦었으면 황제보다 늦게 입장할 뻔 했어! 리일 녀석이야 아들내미니까 괜찮겠지만, 나만 괜히 곤란해질 뻔 했네...
“리일! 대체 왜 그랬어요!! 혼나면 어쩌려고요?”
난 한숨 돌리며 리일에게 작게 속삭여 물었다.
“공주를 떼놓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안 혼나. 그런 거 신경도 안 쓰셔.”
“.....리일!”
헐... 잘났다, 이 막돼먹은 아들놈아.
솔직히 레비넌 백작가였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야 외동딸이자 막내라 그런지 고이고이 자란 편이었지만, 레비넌 백작은 자식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사람이었다. 특히 얼굴도 몇 번 못 본 큰 오라버니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이 세계에서 가주의 권한은 절대적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근데 리일은 아버지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심지어 얘네 아빤 황제인데!
으휴... 너도 나중에 꼭 너 같은 거 낳아봐라! 지금 보니 황제가 보살이네 보살! 귀찮다고 자기 생일도 안 챙기는 사람이, 자식 생일이라고 억지로 참석해 준 것 같은데 아들놈은 본 척도 안 하고!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고 리일은 그저 해맑게 신나했다.
“리엘, 이쪽으로 와.”
본격적인 무도회가 시작되자,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준비하는 것이 보였다.
첫 댄스는 주인공인 리일과 황녀가 스타트를 끊는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나이스 황녀는 전혀 생각이 없는지, 단상 위 자리에 앉아 어린 동생을 챙기고 있었다.
“저에게 레이디와 한 곡 추실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리일은 당당하고 뻔뻔하게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새초롬하게 쏘아보면서도 그의 손 위에 살포시 손가락을 얹었다.
우아한 선율이 흐르고, 드디어 우리의 춤이 시작되었다.
리일이 의상은 처음부터 내 것과 세트로 맞춘 것인지, 흰색 바탕에 금사로 군데군데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내 드레스 역시 연한 골드 톤이었기에 완벽히 잘 어울렸다.
몸을 핑그르르 돌릴 때마다 사르르 흩날리는 내 드레스자락은 허공에 은하수를 새겨놓는 듯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라츠 제국의 댄스에 익숙하지 않은지라, 나는 몇 번이나 틀릴 뻔 했다. 하지만 리일의 리드가 워낙 뛰어나서, 내 모든 실수가 커버되었다.
역시, 이 자식 바람둥이였어. 춤을 왜 이렇게 잘 춰!
그렇게 구박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마음이 쿵쾅대서 미칠 것 같았다. 찰랑이며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에 바다빛 눈동자가 스쳐지나갈 때마다, 그 눈빛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이러다 내가 더 좋아하게 되어버릴 것 같아...
어느덧 수군대던 사람들도 가만히 입 다물고 우리를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의 품에 안겨 돌면서도 언뜻언뜻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모두 눈빛에 이채를 띈 채 흥미롭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분노에 떨고 있는 셀리나 공주도 보였고, 경악한 얼굴의 비올레티도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복잡한 표정의 이튼 오라버니가 있었다.
짧은 한 곡의 끝나고, 우린 마지막 동작의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하아..하아...”
너무 열심히 춤을 춰서 그런지 숨이 조금 찼다. 가쁜 호흡을 하고 있는 내게, 리일이 가까이 다가오며 나를 불렀다.
“리엘...”
순식간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서, 설마 이런 곳에서 키스하려 드는 건 아니겠지? 얘는 왜 시도 때도 없이 입술을 박으려 들어!!
“리, 리일... 저, 저기...”
꽉 안겨 있어 거부하지도 못한 채, 점점 다가오던 그의 입술이 드디어 내게 닿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