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46화 (46/134)

46. 무도회(5)

2017.01.29.

“.......!”

내 입술에 맞닿은 촉촉한 그의 입술을 느끼며 막 눈을 감으려는데, 익숙한 인영 둘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랬는지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리일을 밀쳐냈다. 마치 남자친구와의 키스 장면을 부모님에게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덕에 우리의 첫 입맞춤은, 키스까지 가지도 못하고 뽀뽀로 끝나버렸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의 리일을 돌아볼 새도 없이, 나는 재빨리 얼굴을 가다듬었다.

“리엘?”

이튼 오라버니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보고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지, 멍하니 나와 리일을 한참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아차 싶었던지 뒤늦게 부랴부랴 인사하는 오라버니 곁에서, 비올레티도 함께 인사를 했다.

“저..전하를 뵈옵니다.”

발음도 태도도 예법도 전부 형편없었다. 에휴... 쟨 몇 달 동안 대체 뭘 배운 거야.

어쨌든 대충 인사를 받은 리일은, 나를 돌아보며 설명을 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날 초대할 명분을 위해 유학중인 레비넌 백작가의 자제들을 째로 초대하긴 했지만, 얼굴을 모르니 누구인지 못 알아보는 듯 했다.

“이쪽은 제 막내 오라버니예요. 그리고 이쪽은... 자매...고요.”

“이튼 반 레비넌이라고 합니다.”

“비, 비, 비올레티 반 레비넌이라고 합니다. 아..아카데미 교..교양학부에 유학중입니다.”

비올레티는 황태자를 만나게 되어 감격에 겨운 듯 부들부들 떨며 자기소개를 했다.

하지만 리일은 별로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전에 공주가 나더러 사생아라고 삿대질했으니, 이들이 내 배다른 남매인 건 이미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유학생인 저들에 비해 하녀로 팔려온 내 모습을 보면, 내가 집안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도 짐작이 가겠지...

“엔릴이다.”

저 한 마디로 땡이었다. 그래.. 리일이 나한테 강아지같이 굴어서 그렇지, 저놈은 원래 황족인데다가 제멋대로이기까지 한 녀석이었다. 아까의 일로 보아 잘 알 수 있듯이, 황제고 뭐고 눈에 뵈는 것도 없이 막나가는 놈이었다.

리일이 말을 뚝 끊자 분위기는 급격히 어색해졌다.

오라버니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얘기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 주변으로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오라버니, 조금 있다가 한가해지면 갈게요."

“응, 나중에 보자.”

분위기를 파악한 오라버니는 비올레티를 데리고 떠났다.

으악, 드디어 전쟁 시작인가?

“형, 아니 전하... 이게 웬일이에요?? 아나이스 누나 외에 다른 레이디랑...”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건 순한 인상의 한 소년이었다.

“벤자민, 너야말로 웬일로 내 생일 무도회에 다 오고?”

소년은 옆에 서 있는 예쁘장한 레이디를 쿡 찌르며 말했다.

“마가렛 고모가 끌고 왔어요. 파트너가 없다며...”

“안녕, 엔릴? 소개 좀 시켜주지 않을래?”

옆구리 쿡 찔린 그 레이디는 내가 궁금한 듯 리일에게 대놓고 물어봤다. 누군지 몰라도 리일을 막 부르는 게 신분이 높을 게 분명했기에, 난 무조건 인사부터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리엘 반 레비넌이라고 합니다.”

“마가렛, 이쪽은 리엘이야. 리테인에서 왔어. 리엘 이쪽은...”

그런 건 이미 내 이름을 말한 순간 누구나 다 아는 정보라고!

“마가렛 폰 레이튼이라고 해요.”

-흐음... 예쁘긴 한데...

리일에게 제대로 된 설명은 기대하지도 않는지, 마가렛이라는 레이디는 새침한 표정으로 직접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 나에 대한 평가도 재빨리 내리고 있었다.

우와... 나 여기 와서 시녀나 하녀 대접 말고 귀족 레이디 대접 받은 거 처음이야! 무려 나에게 경어를 써 주었어!!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이디 레이튼”

리일은 이어서 옆에 있는 소년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이쪽은 벤자민 폰 레이튼. 레이튼 경의 장남으로 나랑은 육촌지간이야. 아, 레이튼 경은 많이 봐서 알지? 내 검술스승님. 그리고 마가렛은 레이튼 경의 여동생이자 아바마마의 사촌동생이야. 나에게는 고모뻘이지.”

마가렛이라는 레이디가 재빨리 덧붙였다.

“두 살밖에 차이 안 나지만 말이야.”

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황제의 사촌이면 황족인 건가...? 근데 이름 어디에도 황가의 성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외가 쪽인 건가...?

가족관계도는 언제 봐도 헷갈린단 말이야... 리일 이 녀석! 나를 무도회에 데려올 거면 적어도 이런 건 미리 알려 줬어야지!

“잘 이해가 안 가면 그냥 몰라도 돼. 사실 나도 헷갈리니까”

혼란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본 리일이 간단히 정리해 주었다.

“............”

너란 놈 참 편하게 산다... 순식간에 몰라도 되는 사람 취급 받은 두 사람은, 얜 원래 이런 놈이라는 듯 무덤덤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리일은 2살 많은 5촌 고모뻘한테 반말을 쓰고, 그 고모인지 마가렛인지 역시 황태자인 리일에게 반말하는 걸 보니 둘이 똑같구먼?

“근데 형.. 전하. 진짜 웬일이에요?”

“그러게 엔릴. 네가 드디어! 드디어 그 난봉꾼 기질을 벗었... 아야!”

마가렛은 리일에게 찔린 옆구리 덕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너 진짜! 너 그거 알아?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잠깐 널 좋아했었는데, 네가 날 너무 짓궂게 괴롭혀서 싫어졌던 거!!”

농담처럼 과거형처럼 말했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난 딱 감이 왔다. 아직도 리일을 좋아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를 경계하는구나...

“으아악!! 그런 건 뭐 하러 얘기해!”

리일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가렛은 복수하듯 더욱 자세히 얘기했다.

“엔릴이 어릴 때 조금 많이 못돼 먹었거든. 우리 오라버니에게 하도 혼나서 지금은 안 그러지만 말이야.”

-못된 녀석,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갑자기 여자친구라니...

슬쩍 그녀의 눈을 마주쳐 보니, 역시 짐작은 사실이었다. 날 보는 눈빛에 원망스러움이 절절히 느껴졌다.

“아하하하...”

난 뭐라고 대꾸해야할지 몰라 그냥 바보같이 웃어버렸다. 내가 당황해 있는 사이, 셋은 끝없이 투닥거렸다.

누가 나 좀 구해줘. 이 사람들 다 이상해!

하지만 주변의 귀족들은 눈치만 볼 뿐, 황태자의 최측근인 친족들의 대화에 섣불리 끼지 못하고 있었다.

차라리 다행인가... 웬 영애들이 벌떼처럼 몰려와서 네년이 전하를 꾀였어! 라고 뺨따구 때리는 것보단 나으니까?

근데 셀리나 공주가 제일 먼저 패악 부릴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난 공주의 행방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단상 위에서 황후에게 딱 붙어 알랑방귀 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난번에 안 좋게 끝냈으니 어떻게든 이미지를 회복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때 하이톤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전하. 오늘은 특별히 동행한 레이디가 계시군요. 저에게도 좀 소개시켜주시지 않겠어요?”

젠장. 말이 씨가 된다고, 좀 전에 말한 웬 영애들, 아니 아줌마들이 정말로 몰려왔다.

“윽...”

리일의 표정 역시 단번에 구겨졌다.

“누구예요?”

내가 작게 속삭여 묻자, 리일이 속사포처럼 빠르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리일은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받으며 시간을 끌어주었다.

“고모들이랑 고종사촌들. 그러니까 아바마마의 배다른 누나들과 그 딸들.”

머리가 폭발한다...

“사촌?”

하나같이 아줌마들, 그러니까 지긋한 귀부인들인데? 한두 명 젊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삭았다.

“아바마마가 늦둥이라...”

“아하.”

어쨌든 재빠른 정보교환 끝에 상황을 파악한 난, 화사한 표정으로 일일이 인사했다. 그런 내게 리일은 귓속말을 했다.

“대충 인사하고 도망가자. 나한테 정략결혼 엄청 들이밀었던 사람들이야. 널 잡아먹으려 할지도 몰라.”

하아.. 오늘 무도회 내내 끝내주게 시달리겠구먼. 하아... 피곤하다. 이건 파티가 아니라 일이야 일!!

하지만 바람과 달리 나는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도망가긴 커녕, 벌떼처럼 달려든 영애들에게 정신없이 공격당했다. 빙 둘러싸고 도통 놓아주지 않으니, 비집고 나갈 틈도 없었다.

셀리나 공주가 악담을 하고 다닌 건지, 허드렛일 하던 사생아 출신 하녀가 리일을 꼬셔 팔자 펴려 했다는 소문이 나 있었다. 즉 난 천하의 요망한 년이 되어있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그런데 저걸 또 대놓고 비아냥거린 게 아니라, 사교계 특유의 돌려까기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리일도 대놓고 화를 내며 도와줄 수가 없었다. 여자들의 대화에 남자가 끼어드는 건 쫌생이 취급을 받으니 말이다.

보다 못한 리일이 마가렛에게 눈빛을 보내며 도와 달라 하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끼어들지 않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공격은 점차 격해졌고, 영애들은 어느새 돌려까기가 아닌 대놓고 앞담화 까기를 시작했다.

“황자 전하라는 걸 모르는 척 접근했으니, 전하께서야 참 색다르게 느껴지셨겠죠. 꺄르르르, 안 그래요. 영애들?“

“어머 그것 참 부럽네요. 먼 변방의 소국 출신이니, 전하의 존안을 모르는 척 하는 설정도 먹혀들고요.“

“그것 참 약소국의 사생아라는 점이 도움 될 때도 있군요? 우리 같으면 엄두도 못 내는데... 호호호!”

더 이상 웃으며 받아쳐 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런 도를 지나친 공격은 나뿐 아니라 리일도 모욕하는 꼴이었다.

맞받아치는 거야 나도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하지만 저들이 황제의 친척들이라는 사실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말이 지나치지 않는가! 지금 그 말은 나 역시 모욕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는가!?”

내가 머뭇거리자 보다 못한 리일이 나서서 화를 냈다.

“어머, 전하. 그런 것이 아니라...”

“저희는 그저 요망한 작태에 속아 전하께서 눈을 흐리실까봐 걱정이 되어...”

“그렇습니다. 저희는 그저 진실을 말씀드리려 했을 뿐이랍니다.”

“맞습니다. 전하, 어찌 여인들의 대화에 간섭하려 하시는지요...”

아주 한 몸처럼 죽이 척척 맞는 아줌마들이었다.

“그딴 걱정 필요 없으니 그만하시오!!”

리일은 다른 곳으로 날 데려가기 위해, 내 손을 잡아끌며 빙 둘러선 아줌마들을 밀쳐냈다. 여자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어도, 동행한 레이디를 데리고 이동하는 것까지는 말릴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난 리일을 붙들었다. 그가 이해가 안 가는 듯한 표정으로 작게 되물었다.

“리엘, 왜?”

나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리일과 내내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여기서 도망가 봤자 분명 또 이런 상황이 올 것이다.

아무리 리일이라도,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인사가 접근하면 나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남자들끼리의 대화를 한다고 나에게 자리를 잠시 비켜달라고 하면 어쩔 수 없어진다.

그러니 그냥 지금 맞부딪치는 게 낫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걱정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내가 막 말을 받아치려는데,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다. 갑자기 사람들이 쫘아악 갈라지면서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았더니, 웬 꼬맹이 하나가 다다다다 뛰어오고 있었다. 블루 그레이빛의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보니, 아까 얼핏 보았던 로렌인가 하는 막내황자였다.

그리고 그 뒤로, 모세의 기적의 원인인 황제가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