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47화 (47/134)

47. 무도회 (6)

2017.01.30.

“형한테 갈래!!”

“렌, 뛰지 말거라. 위험하다.”

철푸덕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내황자는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렌!”

정말 자상하고 가정적인 성격인지, 황제는 넘어진 아이를 직접 다독여주며 번쩍 안아들었다. 넘어졌다고 울 나이는 지났는지, 로렌은 황제의 한쪽 팔에 앉아서 대롱대롱 다리를 흔들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헐, 열 살이나 먹어가지고는... 로렌이 유난히 작은 편이긴 하지만, 저 나이에 아빠 품에 안겨오다니 참 신기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부럽기도 했다. 아이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이 정말 따스해서, 난 왠지 서러워질 정도였다. 어쨌든 저런 아빠를 보고 자랐으니 리일도 참 좋은 남자일 텐데... 난 멍 하니 망상을 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우리 앞에 다가와 멈춘 황제는, 제 누나인지 조카인지들에게 관심이 전혀 없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귀찮은 듯 손을 휙 내젓자 아줌마부대는 순식간에 찌끄레기처럼 물러났다.

“아바마마”

그가 리일 옆에 서자, 부자지간이 아니라 마치 형제지간처럼 보였다. 엔릴은 대충 인사를 했고, 나 역시 감상은 뒤로 한 채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말없이 로렌을 내려놓았다.

“형아!!”

로렌은 리일에게 달려들며 안겼다.

“렌, 궁에서 뛰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응, 알았어! 형, 생일 축하해.”

“고마워. 우리 렌의 선물도 기대할게.”

“근데, 있잖아... 누나!”

설마 나, 나 부른 거니? 난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미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멀찍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아이는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전하.. 저... 말씀이십니까?”

“응! 누나 말이야.”

“네, 전하.”

“누나, 우리 형이랑 결혼해?”

“네? 켁... 콜록...”

...푸흡!! 이 가족들은 뭐 입만 열면 결혼타령이야? 난 너무 당황한 나머지 가만히 있다가 사레가 들려버렸다.

리일은 재빨리 지나가는 시종에서 음료수를 받아 내게 건넸다.

“고, 고맙습니다... 쿨럭...”

“누나 우리 형이랑 춤췄잖아! 결혼해?”

춤을 춘 거지, 아직 덮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순진한 꼬맹이는 같이 춤을 추면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전하.. 그.. 그게 아니라.. 저기...”

“그럼 나 동생 만들어줘.”

하... 산 너머 산이었다. 순진한 거 맞아? 알 거 다 안다고 치기엔 또 너무 애 같은 소리고... 얘 정신연령 몇 살이니? 아직 어려서 황제 황후랑 같이 본궁에 산다고는 들었는데... 이런 말은 일곱 살 때 졸업했어야지!

하지만 들려오는 황제의 말은 더 가관이었다.

“렌, 그건 동생이 아니라 조카란다.”

“아! 맞다. 헷갈렸어요! 어쨌든 아기! 나 조카 만들어줘!”

너도 아직 애야, 이 꼬맹아! 내 동생이었으면 한 대 쥐어박아 주는 건데!

“황자 전하 그, 그건...”

난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리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기라는 말에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건지, 리일은 얼굴이 벌개져서 딴청만 피우고 있었다.

아 미치겠네...

당황해서 두리번거리다가 실수로 황제랑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황제는 나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아들이 누나 말고 처음으로 에스코트 해 온 여자인데 말이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의 생각이 뚜렷이 들려왔다.

-이 아이인가? 쉽지는 않겠군...

무슨 뜻이지...? 황제는 정말 의중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가족들을 대할 때 외에는, 표정에도 생각에도 속내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내 속도 모른 채, 얼굴 빨개진 리일은 헛소리를 지껄였다.

“아바마마. 렌이 빨리 조카를 만들어 달라는데...”

이 미친놈아! 뭐라는 거야!! 그딴 말로 결혼 조르지 말라고!! 리일은 착한 녀석이긴 한데, 황족으로 오냐오냐 자라서인지 좀... 개념을 국 끓여 먹은 것 같았다.

“알았다.”

알긴 뭘 알았다는 겁니까, 황제님!! 당최 무슨 생각이신 거냐고요!! 도저히 알아들어먹을 수 없는 대화잖아!!!

리일이 나 모르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지난번에 분명히 ‘황태자 아니면 되는 거지?’ 라고 말하고는 뛰쳐나갔었는데, 설마 황제를 찾아가서 뭔가 헛소리라도 지껄인 건 아니겠지?

나 때문에 황태자 안한다고 그런 말 한 거 아니지? 나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시체도 안 남기고 죽어 없어지는 거 아냐?

혹시 아까 쉽지 않겠다는 말이, 날 떼어놓기 쉽지 않겠다는 뜻? 그리고 좀 전에 알겠다는 말은, 네가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푹 빠져있으니 내가 알아서 치워주겠다는 그런 뜻? 덜덜덜...

“...흡”

황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저 잘생긴 얼굴이 사신처럼 무시무시해 보일 줄이야... 황제가 나에게 무언가 말이라도 걸까봐 심장이 벌렁거렸다.

소설에서 보면 황제가 시험하듯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면, 여주는 아주 현명하게 잘 대답하던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머릿속이 하얘서 아무 생각 안 나는데, 그딴 소설 쓴 인간 나오라고 해!!

다행히 황제는 과묵한 건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건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도 가시방석인건 매한가지였다.

“어마마마한테 갈래요!”

다행히 숨 막히는 상황은, 로렌의 외침으로 끝나버렸다.

“그래 가자꾸나.”

시종에게 황후의 행방을 물은 황제는, 곧 아이를 데리고 말없이 떠났다.

그러고 보니 단상 위에는 아까부터 아무도 없었다. 공주를 피하려고 황후도 어디론가 가 버린 모양이었다.

“휴...”

난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무도회 두 번만 겪었다간 간 떨어져 죽겠네. 뭐 이렇게 다이내믹 서스펜스한 무도회가 다 있어!

“리엘,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잠시 바람 쐬러 나갈래?”

“네, 고마워요.”

리일은 다행히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은 아닌지, 내 지친 표정을 단번에 알아채 주었다.

테라스로 나가는 동안에도, 수많은 귀족들이 끝없이 접근해왔다. 하지만 리일은 귀찮은 듯 단호히 뿌리치며, 묵묵히 나를 에스코트했다.

“전하. 잠시 무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지금은 바쁘...”

또 똑같은 거절의 말을 하려던 리일은, 말을 걸어온 사람이 얼굴을 확인하고는 잠시 멈칫했다.

“오라버니...”

이번 방해꾼은 리일에게 용건이 있는 귀족이 아니라,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이튼 오라버니였다.

“실례를 무릅쓰고 리엘을 잠시 빌려가도 되겠습니까? 동생과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하면 되지 않는가. 내가 들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는 겐가?”

“........송구하옵니다만, 전하. 가족 간의 사적인 대화입니다. 비올레티 너도 잠시...”

나와 단 둘이 할말이 있는지, 오라버니는 비올레티도 떼 놓으며 나를 요구했다. 하지만 비올레티는 일부러 불쑥 끼어들었다.

"오라버니! 저에게도 회포를 풀 시간을 주셔야지요!"

"아니, 지금은..."

“리엘.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어떻게든 황태자와의 대화에 끼고 싶었던 것인지, 비올레티는 갑자기 나한테 친한 척을 하며 물었다.

-저 기집애가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얘 왜 이래? 얘 누구야?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 나에게 친한 척 하는 비올레티의 모습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심지어 속마음은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렸다.

“........뭐?”

“네 소식을 듣고 정말 많이 걱정했어. 오라버니와 함께 매일같이 네가 무사하기를 기도했어....”

“.......”

비올레티도 바보가 아닌 이상, 오늘의 무도회 초대가 누구로 인한 것인지 이미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니 황태자와 친분 있어 보이는 내게 저렇게 달라붙는 거겠지.

근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걱정은 개뿔!!

“리엘, 그런데 이게 어떻게...? 오라버니가 넌 안 온다고 했는데...”

-네가 어떻게 황태자 전하랑 온 거야!!

비올레티는 내가 어떻게 리일과 입장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는지, 은근히 말을 흐렸다.

무도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다고 오라버니에게 편지를 보내놨으니, 이런 일은 전혀 예상도 못했을 것이다. 이튼 오라버니도 내가 휴가를 낼 수 없어 불참하는 줄만 알았을 테고...

아!!

불현 듯, 아주 근사한 생각이 떠올랐다.

“너한테 일부러 말 안 했어. 네가 또 내 옷 찢어 놓을까봐.”

“...........”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후덥지근한 무도회장의 분위기가 시베리아 벌판이 된 기분이었다.

“리엘, 그게 무슨 말이야...? 비올레티가 설마 저번에...?”

이튼 오라버니는 대경해서 외쳤다. 하지만 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리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리일은 한 팔로 나를 감싸며, 얼음장처럼 싸늘한 목소리로 비올레티에게 말했다.

“너,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 한 번만 더 보이면 끝장날 줄 알아.”

노려보다 못해 살기까지 흘려보낸 건지, 비올레티는 안색이 퍼렇게 질리며 비틀거렸다. 고것 참 쌤통이다! 원래 악행은 돌고 돌아 자신에게 돌아오는 법! 호호호호!!

주저앉으려는 비올레티를 오라버니가 다급히 붙들었다.

“비, 비올레티!”

"오라버니, 지금은 곤란한 것 같으니 나중에 편지할게요."

지금은 그냥 비올레티도 오라버니도 보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재차 나를 붙들었다.

"아냐! 정말 중요한 할 말이 있어. 비올레티, 넌 휴게실에 가 있어. 리엘과 얘기 좀 나누고 갈게."

"오라버니! 어떻게 저한테...!!"

하지만 오라버니는 매정히 등을 돌리며 내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리일에게 양해를 구했다.

"리일, 금방 갈게요. 먼저 테라스에 가 계세요.”

리일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어쩔 수 없이 놔 주었다.

“오라버니”

우리는 사람들 눈을 피해, 아니 정확히는 비올레티의 눈을 피해 구석진 기둥 뒤로 향했다.

“리엘. 걱정 많이 했는데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지 않을래?”

“그게... 설명하자면 길어요. 하지만 오라버니가 걱정하시는 그런 건 아니니 마음 놓으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황자 전하라니! 너만 상처 입을 거야.”

“.......알아요 저도.”

“알면서도 왜? 너 설마 진심인 거니?”

“...........”

진심이긴 한데, 나 역시 리일과의 관계를 이대로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 덕에 바로 대답을 못하자, 오라버니는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리엘, 그만둬. 차라리.. 차라리 내가...”

오라버니가 무언가를 말할 듯 말 듯 망설였다. 그의 속마음이 궁금했으니, 내 고민만으로도 버거워서인지 생각이 잘 읽히지 않았다.

“오라버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리엘...”

“오늘 밤까지만요. 잠깐 신데렐라가 된 것 뿐이에요.”

“신데렐라?”

“아... 그러니까, 딱 하룻밤 꿈이라고요. 오라버니, 마음 써 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리엘... 그래. 네가 그렇다니 일단 한시름 놓았구나. 하지만... 이 일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야.”

“저도 알아요.”

그의 곁에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장애물과 반대, 시련들이 있을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셀리나 공주... 자신이 데리고 온 하녀가 약혼자에게 꼬리를 친다, 당연히 용서할 수 없겠지. 내 행보로 인해 가문에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

백작가야 어찌 되든 알 바 아니지만, 그 안에 있는 이튼 오라버니까지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혹은, 내 약점을 쥐고 있으니 백작가에서 나를 이용하려 들 수도 있다. 물론 신분차를 고려하면 잘될 가능성이 1퍼센트 미만으로 보일 테니, 이용할 생각보다는 내치려 들 확률이 더 높긴 하다. 괜히 내가 공주의 심기를 거슬러 가문에 분란을 일으키기 전에 말이다.

이런 미래를 전개하고 있는데, 한 술 더 뜬 오라버니의 말이 들려왔다.

“아니, 네가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복잡해.”

“네?”

“내가 제도 사교계에서 겉도는 외부인이긴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들은 소문 덕분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 리엘, 네가 다칠 수 있어.”

“제 마음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마음을 말하는 게 아냐. 네가 위험해 질 수도 있다고.”

“네?”

“........복잡한 내용이지만, 간단히 말해 줄게.”

“네”

오라버니는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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