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48화 (48/134)

48. 무도회(7)

2017.01.31.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편의상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고 있지만, 1황자 전하는 아직 황태자 책봉을 받지 않았어. 엄밀히 말하면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 황자 전하야.”

“네? 정말요?”

벌써 16세가 지나 성년인데, 아니 오늘 생일을 맞이했으니 이제 17세가 되는데 아직도?

“그래. 황제 폐하께서 무슨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야.”

...그러고 보니, 나를 포함해 리테인에서 온 사람들은 리일을 당연히 황태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황궁에서 그 누구도 리일을 황태자 전하라고 부르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들 황자 전하라고 불렀지.

아! 그래서 그때 외궁 무도회에서 그렇게 당당히 부정했구나..! 자기는 황태자가 절대 아니라며...

“어쨌든 나이가 나이인 만큼 곧 책봉을 앞두고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긴 해. 그러니 제국 귀족들은 당연히 황자 전하께 줄을 서고 있고. 딸 가진 자들은 전부 들이밀고 있지.”

“아...”

아까 그 아줌마들도 그 중 하나겠구나 싶었다.

“물론 그 어떤 영애도 황자비 후보로 공식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는 않아.”

“왜요?”

“황후폐하께서 딱히 힘을 실어주는 가문이 없기 때문이야.”

아... 그때 보았던 황후의 모습이라면 그럴 만 했다.

“그러던 중 우리나라와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고, 셀리나 공주저하께서 약혼녀 후보로 왔어. 하지만 황자전하가 이 결혼에 전혀 관심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

그래. 나조차도 들은 소문이니까. 황제랑 황후도 별 압박 주지 않는다 했으니 정말 시들시들한 혼담이었다.

“제국 귀족들 역시 이 협정이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해. 그러니 파혼할 확률이 높다는 걸 예상할 수 있겠지.”

“아.....”

그래서 셀리나 공주가 저렇게 안달복달 하는 구나. 자신의 지위가 불안정하다는 걸 알기에...

“귀족들은 그때를 대비해 끝없이 전하의 옆자리를 노리고 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지?”

“....네.”

......내가 거슬리겠구나. 그래서 위험해 질 수도 있다고...

“아까 황자 전하께서 아직 책봉 받지 않았다고 했잖아. 폐하께서 무슨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귀족들은 노심초사하는 중이야. 둘을 놓고 시험하다가, 혹시라도 황녀전하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게 아닌지 말이야. 황자전하에게 줄섰는데 황위를 이어받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 되는 거니까.”

시험이라니......... 리일. 황태자만 아니면 되냐는 거... 이런 뜻이었어?

그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가 밉보일 수도 있는 거야?

“하아.......”

“물론 멀쩡한 장남을 두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다들 생각하지만, 폐하께서는 예전에 법까지 고쳐가며 남녀 간 계승서열 차별을 철폐하셨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렇듯이, 그라츠 제국 역시 원래 장자상속이 기본 원칙이었다. 하지만 법까지 개정했다니...

리일이 성에 안 차면, 정말로 황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구나...

“잠깐만요. 황녀 전하 쪽이 누나잖아요. 남녀 차이를 두지 않으면, 당연히 황녀전하가 계승서열 1위가 되는 것 아닌가요?”

“문제는 두 분이 쌍둥이라는 거야. 제국은 십여 년 전 있었던 황위계승 다툼에서, 쌍둥이의 경우 출생순서에 의미가 없다는 선례를 남긴 적이 있었어.”

“아......”

“후계를 서둘러 정하라는 귀족들의 압박에도 폐하께서는 답이 전혀 없으시다고 해. 물론 이제 겨우 30대 중반인 폐하이시니, 후계를 정하는 게 급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렇군요...”

왜 정하지 않을까..? 정말 둘을 놓고 시험하는 중일까? 그런 거라면 내 존재가 리일에게 마이너스가 될 텐데...

하지만 리일은 황위 같은 거 관심 없어 보였어... 그걸 황제도 모를 리가 없고. 아니, 그것도 나 때문인가?

“어쨌든 귀족들은 다들 황자전하를 지지하고 있어. 그라츠 제국은 남녀차별이 꽤 심한 보수적인 나라니까 그럴 만도 하지. 그리고 불확실한 후계구도에 힘을 싣기 위해서라도, 유력가문들은 더더욱 결혼을 통해 황자 전하의 세력을 공고히 만들려 하고 있어.”

“.....복잡하네요.”

사교계 소문에 무지했던 나만 몰랐던 것이지, 오라버니가 알 정도면 알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폐하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걸까? 이 상황을 다 알 텐데 왜 후계자를 발표하지 않는 거지?

“그래서 네가 위험하다는 거야. 공주저하와 약혼이 파기되어도, 전하께서 네게 푹 빠져있으면 저들 입장에서는 아주 골치 아프거든.”

“그렇겠네요.”

“리엘, 멀리 떨어져 있어. 어차피 이루어 질수 없는 사이인데 너만 다쳐. 몸도 마음도.”

“.............알아요. 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오라버니의 조언 새겨들을게요.”

말을 마친 오라버니는 비올레티가 걱정된다며 찾으러 갔다. 멀어지는 오라버니의 모습 저 너머로, 셀리나 공주에게 찰싹 붙어 아부를 떨고 있는 비올레티가 보였다. 내게 달라붙으려다가 실패하니, 저쪽에 붙은 모양이었다.

감격에 겨운 듯 오버해서 호들갑 떨며 비위를 맞추려는 모습이 참 유치해 보였다. 하긴, 여기서는 찬밥이라지만 어쨌든 자국의 지고한 공주 신분이니 비올레티가 저럴 만도 했다.

그 한심한 모습을 뒤로 하고 난 무도회장을 떠났다. 그러니까 무엄하게도, 리일을 테라스에 버리고 혼자 돌아가 버렸다.

어차피 끝낼 마당인데 그에게 더 여지를 주는 건 오히려 희망고문인 것 같아, 정말 미안했지만 눈 딱 감고 잊어버린 척 돌아간 것이었다.

내가 위험해진다는 오라버니의 조언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도 이번 무도회를 마지막으로 정리할 생각이었을 뿐...

***

“리엘... 너무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죄송해요.”

난 변명도 없이 그냥 죄송하다고만 했다.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말 추웠다고... 나 감기 걸린 것 같아. 에취!”

솔직히 자존심 드높은 황족인 그가, 이번 일에는 정말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런데 차마 내게 화도 못 내고 그저 섭섭해 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못해 심장이 뻥 뚫린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헤헤, 괜찮아. 그래도 무도회에서 우리 리엘 내꺼라고 눈도장 콱 찍어놓고 왔으니 든든하다!”

“.... 전하.”

“응?”

“전 감히 전하의 연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젠 정말 그만 둬 주세요. 저도 어제를 끝으로 마음 다 정리했어요.”

“...........리엘. 그래서 그랬던 거야? 혼자 멋대로 정리하고, 통보하듯이 날 버리고 간 거야!?”

“통보라니요, 제가 어찌 감히 전하께... 그저 제 신분이 전하 곁에 있을 수...”

“그놈의 신분, 신분! 대체 뭐가 그렇게 문제인데!!”

리일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답답해하며 가슴을 팡팡 쳤다.

“.......”

그래, 이해 못하겠지.

사실 내가 위험할 수 있다는 오라버니의 경고 따위,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로 인해 그의 앞길을 막고 싶지는 않았다. 그나마 정말 잘될 가능성이 있다면, 사랑만 보고 살자고 미친 척 들이대 보겠지만... 막상 비올레티가 걸렸다.

솔직히 나도 비올레티만 아니면 조금 희망을 가져보려 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정말 황태자랑 혼담이 나오면, 비올레티는 같이 죽자는 심산으로 비밀을 터트려 내 신분을 바닥에 처박아 줄 것이다.

그래, 그러고도 남지. 내가 잘되는 꼴은 절대 못 볼 테니까. 게다가 공주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리엘, 왜 그렇게 자꾸 도망만 가려고 해?”

“얼마나 많은 반대가 있을지 모르세요? 전하의 곁에 서기 위해 겪어야 할 수많은 역경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어요.”

사생아로 위장해 귀족을 사칭한 평민 고아. 감옥에나 안 처박히면 다행이겠네. 제국에서 귀족 작위라도 받지 않는 한, 내 미래는 없는데... 작위를 받는 게 그렇게 쉽냐고.

그렇다고 다 털어놓고, 나를 위해 황제에게 졸라서 귀족 신분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어느 부모가, 그것도 황제황후 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금쪽같은 아들내미의 짝으로 평민고아를 달가워하겠는가...

사실을 다 말할 수 없는 나는, 그냥 정석적인 대답을 둘러댔다.

“내가 다 지켜줄게. 나도 바보는 아니라 알고 있어. 하지만 절대 널 위험하게 만들지 않을게!!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이제 제발 그만 둬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리엘! 리엘!!”

난 또다시 멋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일개 시녀가 하기엔 정말 건방진 행동이었지만, 리일이 먼저 날 놔주지는 않을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었다.

***

하지만 백날 뛰쳐나가 버리면 뭐하겠는가.

난 빼도 박도 못한 리일의 측근 시녀였다.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볼모로 끌려온 신분이었기에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리엘!”

...........지치지도 않냐. 이 정도 밀어내고 상처 줬으면,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라도 때려치울 텐데...

리일은 참 여러모로 대단했다.

“네, 전하.”

“호칭 자꾸 그럴 거야?”

“전 전하의 시녀이니까요.”

“휴.... 오늘은 다른 일로 불렀어.”

“네. 무슨 일이신가요?”

“아바마마가 널 보자고 하셔.”

“.........네?“

화, 화, 화, 황제가 나, 나, 나, 날?

“네가 궁금한가 봐.”

“저, 저, 저를 부르셨다고요? 어...언제요?”

“지금”

방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리일의 잘생긴 면상을, 갑자기 한 대 후려쳐주고 싶어졌다.

“...........지, 지금 당장요?”

“응. 가는 길은 시녀장이 안내해 줄 거야.”

“.......”

“그냥 얼굴 보자는 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잘 다녀와.”

어떻게 부담을 안 가져!!! 보통의 남자친구 아빠가 보자고 해도 부담스러운데, 네 아빠는 황제라고!!

하지만 내 부담감 따위는 아무 상관없이, 난 순식간에 황제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

똑똑똑

“명하신 시녀를 데려왔습니다.”

안내해 준 시녀장은 조용히 고하고는 바로 물러났다.

널따란 대전의 까마득한 황좌 위에 황제가 앉아있고, 고개가 꺾일 정도로 높다란 계단을 줄줄이 지나 저 아래 구석에 꿇어앉혀진 채...

그런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녀가 불려온 곳은 생각보다 평범한 곳이었다. 서류가 잔뜩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집무실인 듯 했다.

꿀꺽

긴장 때문에 침이 잘 삼켜지질 않았지만, 일단은 인사가 먼저인 건 당연했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예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애매했기에 다짜고짜 무릎을 꿇었다. 귀족 영애로서의 인사라면 무릎을 굽히고 허리를 숙이며 고개를 조아리는 정도겠지만, 시녀인지 하녀인지 모를 이런 신분으로서는 건방져 보일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냥 납죽 엎드려 버린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으니 일어나 가까이 오도록”

서류에 정신없이 서명을 하던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감정이 고스란히 온 몸에 드러나는 리일과 다르게, 황제의 말에서는 그 어떤 생각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리엘이라 하였더냐?”

주뼛주뼛 다가오는 모습에, 황제는 담담히 물었다.

“네. 폐하.”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 불렀다.”

어떤 아이인지 모르니 한 달 여 동안 황제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일단은 수상한 아이는 아닌 것 같다 판단하였지만, 그래도 직접 대면해 물어봐야 했기에 따로 부른 것이었다.

“하문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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