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무도회(8)
2017.02.01.
“엔릴에게 진심이냐"
간단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괜히 제 발 저린 것인지, 감히 진심으로 마음에 품었냐고 질책하는 듯이 들렸다.
“...... 그... 그게....”
“대답해 보거라.”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의 곁에서 당장 물러나겠사옵니다.”
“그건 무슨 뜻이지?”
“.........”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첫 인상은 그저 잘 단련된 기사에게 느껴지는 날카로운 분위기 정도라고 생각했지만, 이건 카리스마, 아니 위압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역시 이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엔릴을, 그 아이의 마음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냐?”
이용하려 한 적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순간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입술이 덜덜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폐..폐하... 그게..."
감히 천한 신분 주제에 진심이라 말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이대로 오해를 받는 것은 절대 싫었기에 떨리는 입술을 열어 외치듯 답했다.
“결코, 결코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그럼 조금 전 그 말은 무슨 뜻이지?”
“진심이기에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린 것이옵니다.”
대답을 듣고 빤히 바라보던 황제는, 돌연 알 수 없는 질문을 했다.
“......왜지?”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무슨 뜻인지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물러난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네?”
불경하게도 자꾸 네?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진심이라 하지 않았느냐.”
“네, 네!”
“그런데 왜?”
“제가... 미천한 제가 전하께 감히 누를 끼쳐드릴까 저어되어... 그래서... 전하의 마음이 더 깊어지시기 전에 제가 먼저...”
“그럴 필요 없다.”
“네?”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말 그대로다. 진심이라면 그런 이유로 물러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
거기까지 말한 황제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상대방을 둔 채 혼자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리엘은 몰랐지만, 그녀가 서 있는 발밑에는 대답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간단한 마법진이 깔려 있었다.
물론 마법진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쯤 되면, 인생 헛살지 않은 이상 눈빛을 보면 어느 정도 진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황제가 본 리엘은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쉽지는 않겠어...’
황제가 사색에 잠겨있는 사이, 리엘은 슬며시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굉장히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본 그대로, 황제는 가뜩이나 할 일이 많은데 자꾸만 닦달하는 아들 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굵직한 국가시책을 비롯한 온갖 행정 문제, 외교 및 국방 안건, 무역 및 상업 장려, 빈민 구제 정책, 마법 부흥 등등 정무가 얼마나 끝도 없는지 진짜 몸이 백 개라도 부족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리테인과의 일...
이튼이 말해주었던 국내의 사정 뿐 아니라, 국제정세까지 고려하면 엔릴과 리엘의 일은 꽤나 복잡한 상황이었다.
‘골치 아프군... 엔릴 녀석...’
원래 황제는 리테인과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제국의 동쪽과 북쪽이 안정되면 혼담을 파기하며 리테인을 확실히 정리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주변을 착실히 정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핵심인 리테인에 관해서는, 황후가 직접 신전과 왕실과의 유대관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대충 실마리만 잡았을 뿐 정작 가장 중요한 방법은 알아내지 못한 상황으로,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무엇 하나 안심할 수 없거늘... 이 와중에 엔릴 녀석은...’
저렇게 날뛰며 동맹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으니, 골치가 아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 해결된 후에 엔릴이 누구랑 결혼하든 그건 본인 마음이니 간섭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아직은 곤란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 심지어 며칠 전에는 급작스레 들이닥쳐서 자기 황태자 아닐 거라는 걸 언제 발표할 수 있냐며 떽떽거리고 갔다.
저놈은 대체 자신을 제 뒤치다꺼리 해 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말만 하면 뭐든 뚝딱 해결해주는 도깨비요정으로 아는 건지... 정말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키운 건 다 제 잘못이니 누굴 탓할 수도 없고, 황제는 그저 오늘도 한숨만 늘어갔다.
“하아...”
팔팔한 청춘인 아들 녀석은 아비가 피곤할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도 엔릴만한 나이 때는 며칠 밤을 세고도 끄떡없이 버텼지만, 한 해 한 해 피로는 쌓여만 갔다. 그런데 매번 저런 식이니...
‘그래도 이 아이는 아들놈과 달리 꽤 생각이 깊어 보이는데...’
어떻게 보면 얼른 떠넘기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아직은 곤란했고, 복잡한 상황을 다 말해줄 수도 없었다.
일단 수상한 아이는 아닌 걸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할 뿐이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눈앞의 리엘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황제의 생각이 리엘에게 고스란히 흘러들어갔다.
-엔릴의 일을 얼른 정리해야 아나이스에게 양위를 할 수 있는데...’
리엘은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푹 처박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모르는 황제는, 그만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알겠다. 시간이 필요하니 일단 돌아가 보거라.”
“네. 폐하”
***
밖으로 나오자 마치 눈 뜨고 꿈꾸고 온 기분이었다.
뭐지...? 시간이 필요하다니 무슨 뜻일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가?
리일과 나의 일을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참 파악하기 어려운 독특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도 그거지만, 양위는 대체 무슨 소리야? 황녀전하에게 양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리일... 설마 나 때문에 황태자 자리에서 밀려난 거야...?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 줘!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투성이었다.
멍하니 리일의 방으로 돌아오자, 그가 득달같이 달려와 물었다.
“리엘! 잘 다녀왔어?”
“네...”
“별로 무섭게 대하거나 그러시진 않았지?”
“네? 네... 괜찮았어요.”
“것 봐!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근데 뭐라 하셔?”
“그냥... 진심이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그렇다고 했어요.”
“그리고?”
“제가 물러나겠다고 말씀드리니까... 진심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역시!”
“.....”
“그리고 또?”
“폐하께서 알겠다고 하시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아싸!”
“네? 그게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저는 잘...”
“말 그대로지! 기다리고 있으면 복잡한 일들은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우린 그냥 알콩달콩 연애나 하고 있으면 된다고!”
“리일!!”
이런 걸 아들이라고... 황제 진짜 불쌍하다. 그런데 차기 황제는 리일이 아니라 정말 황녀전하인가? 하긴 얘한테 나라 맡겼다가는 말아먹을지도... 황제가 그래도 자식을 잘 파악하고는 있구나.
“아무튼 리엘, 그럼 이제 나 그만 밀어내는 거다!”
“...네?”
“이제 밀어낼 명분 없지? 역시 그 점쟁이는 돌팔이였다니까!?”
“하지만 아직 황후폐하의 허락이...”
“괜찮아! 두 분은 일심동체야! 보나마나 똑같을 거야!”
“.........”
말도 안 돼. 왜 나를 받아들여 주시는 거지? 도저히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불쑥 물었다.
“왜 저를 반대하지 않으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정작 내 질문에 리일은 똑같이 반문했다.
“왜 반대해야 하는데?”
“왜라니요. 신분도 조건도...”
“리엘, 조건이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이 없어요? 귀족들의 결혼이란 서로의 이득에...”
“그래. 맞는 말인데... 그 이득에 따라 조건을 맞춘다는 게 결국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부족한 점을 상대 가문에 요구하는 거잖아. 그치?”
“네.”
“그런데 이미 다 가진 황가에서, 남의 가문에 굳이 손 내밀 정도로 아쉬운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보통 정치적인 이유나...”
“우리 아바마마가 하도 수완이 좋으셔서,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이미 완벽해”
“그래도 지참금이라던가...”
“잘 모르나 본데, 그 어디에도 비할 바 없이 대륙에서 제일 부유해.”
“......”
“리엘. 그런 거 뭐를 더 따질 필요가 있겠어? 상대방 집안 재산? 지위? 권력?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 그걸 왜 계산하겠어. 차라리 마음 착하고 나와 잘 맞는, 서로에게 꼭 어울리는 그런 사람인 게 더 중요한 거잖아.”
그 말에 더욱 찔렸다. 마음 착한 것과는 거리가 먼 짓을 이미 여러 번 했기에...
“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에요.”
“상관없어. 나도 마냥 착하기만 한 여자는 싫으니까. 어쨌든 리엘, 그까짓 신분 때문에 너보다 저 성질 고약한 셀리나 공주가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니죠!!”
“거봐. 네 생각도, 내 생각도, 부모님 생각도 똑같을 뿐이야.”
“.......”
그게 정말이라면 이제 부모님의 반대라는 명분도 사라져 버렸다. 아직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긴 하지만 말이다. 당연히 극심하게 반대할 줄 알았는데...
나 정말 욕심 내 봐도 될까...?
리일이 마법도 배우게 해 준다고 했으니까, 얼른 배워서 작위를 받고 제국에 귀화하면 리테인쪽 신분이 어떻든 간에 상관없을 거야.
리테인 국적을 버리면 귀족사칭죄가 들켜도 제국에 있는 날 처벌하지도 못할 테고...
“리엘, 대답 안 해 줄 거야?”
“하지만 리일... 아..!! 제 생각에는 서두르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셀리나 공주와의 혼담이 너무 빨리 깨지면 곤란하잖아요.”
혹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이튼 오라버니의 말대로 이 협정이 정말 시간을 끌기 위한 수단이라면... 리일이 자꾸 이렇게 공주를 무시하고 나를 공개적으로 만나면 좋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응. 나도 알고 있어. 내 행동이 아바마마를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걸.”
얘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그럼 널 처형장에서 죽게 해야 했어?”
“......”
결국 내가 악의 축이였네. 왜 그런 사고를 쳐서... 물론 셀리나 공주가 엿 먹인 덕에 일이 꼬인 거지만, 내가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차피 너를 데려온 순간 사방팔방 소문이 나 버렸어. 특히 공주는 모를 수가 없으니...”
그치만 무도회는 좀 심했잖아. 공주랑 아주 한판 뜨자는 짓거리였어!
“그래서 무도회에도 그냥 데려가신 거예요?”
“이미 네 존재가 알려진 마당에 비공식적으로 꽁꽁 숨겨두면, 가볍게 희롱하는 시녀 취급이나 당할 뿐이야. 그렇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널 내 옆자리에 당당히 세우고 싶어서 그랬어.”
“........하지만 리일...”
“아바마마한테는 나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 얼마나 복잡해졌을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고. 그치만 나야 뭐 언제나 제멋대로인 아들이었으니, 속은 좀 썩으시겠지만 그러려니 하실 거야. 그러니 리엘 네가 마음 쓸 필요는 없어.”
“...........”
그래. 미안한 줄 알면 됐네. 철 좀 들어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떻게 보면 리일이 이러는 건 사실 다 나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마이웨이인 덕에 나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수긍해 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잘 된 셈이구나...
그나저나 황제는 날 뭐라고 생각할까? 속 썩이는 아들답게 여자도 딱 저 같은 것만 골라 데려왔다고 한탄하고 있으려나?
“아무튼 리엘"
상념에 빠져있는 내 귓가로 그의 목소리가 나직히 파고들었다. 부드럽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더 이상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네...”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안다는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은, 다급하게 쿵쾅거리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