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50화 (50/134)

50. 연애 (1)

2017.02.02.

“우리 이제 연애하자."

“........”

“제대로”

쿵...

“........!!”

"리엘, 내 연인이 되어주겠어?”

나는 이제 내 심장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

결국 난 리일에게 넘어갔다. 한 마디로 우린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다.

물론 조건을 하나 붙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비밀 연애라고 말이다.

이미 공개석상에 나타난 마당에 의미가 있을 까 싶긴 했지만, 난 도저히 폐하의 입장과 셀리나 공주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연애여부와 상관없이 공주는 내가 리일의 시녀로 붙어있는 것 자체를 싫어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뭘 어쩌겠는가.

황자비도 아니고 고작 약혼녀후보인 볼모공주가, 황자가 잠시 데리고 놀았던 시녀를 내치라 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우린 당분간 연애행각을 티내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리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셀리나 공주를 억지로라도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리일은 싫다고 난리를 쳤지만, 우리 사이를 위해 주변 상황을 해결하려면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는 말에 결국 수긍했다.

“리엘, 그런데 비밀연애를 하려면 데이트는 어디서 해?”

“음.. 글쎄요? 지난 번 축제처럼 로브 뒤집어쓰고 밖에 나가면 되지 않아요?”

“그렇긴 한데, 그건 엄밀히 말하면 단둘이 아니라서...”

“네? 단 둘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밖에 나가려면 호위들을 산더미처럼 데리고 나가야 해.”

“아... 어, 그런데 지난번에는 우리끼리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서... 그리고 그때도 아마 비밀호위들이 한두 명쯤은 따르고 있었을 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로는 어림없거든.”

“그렇군요...”

리일도 바보가 아니니, 내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 난 아바마마처럼 혼자 돌아다녀도 될 만큼 아직 검에 능숙하지 않아서... 아직 오러나이트도 아니고...”

리일은 매우 소심하게 말했다.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개미처럼 작아지는 게 영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열심히 좀 할걸... 그래도 이제부터는 정말 열심히 할 거야! 리엘이랑 단 둘이 돌아다니려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그래요 파이팅!”

“그래 파이팅!! 그럼 우리 이제 뭐 할까?”

“검술훈련... 하셔야죠? 이제부터 열심히 하신다면서요.”

“그거 말고... 데이트으으으!! 리엘이 시키는 대로 오전에 공주한테도 갔다 왔다고... 그런데 상 안 줄 거야?”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건 단둘이 아니라 싫다면서요.”

“흐음... 그럼..! 아, 이렇게 하자! 어마마마의 소궁에 가서 노는 거야! 거긴 아무도 안 오니까 철저히 비밀에 부칠 수 있어!”

“네에에에? 소, 소궁이요?”

소궁이라면 그 유명한 비원이 딸려있는 황제와 황후만의 별장이다. 드넓은 황궁 어딘가에 지어져 있다는데, 실제로 가 본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사적인 공간에 날 데려 간다고?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서 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무슨 짓이야!!

“응, 딱이지?”

딱은 무슨 딱이야!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아니요!!!!”

“왜... 싫어??”

“거길 어떻게 멋대로 들어가요!!”

“왜 멋대로야?”

“거긴 황후폐하 소유잖아요.”

“뭐 어때? 어마마마껀 내꺼. 내꺼도 내꺼.”

“...........”

이걸 배 아파 낳았다니, 황후폐하 어쩜 좋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러웠다. 얼마나 사랑받고 자라면 저럴까...?

“그럼 허락받고 올까?”

“으악!!!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냥 우리 밖으로 나가요! 호위들이 한 트럭으로 쫓아와도 상관없으니까 얼른 나가요!!”

“트럭...?”

“그, 그니까.. 마차 가득 쫓아와도 되니깐 나가자고요!!”

***

결국 정신을 차려보니 난 리일과 함께 밖에 나와 있었다. 휴가 절차?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어차피 리일과 함께 다니는 것 자체가 내 일이었으니까.

남친과 데이트하는 게 업무라니, 이 무슨 어처구니 없는!

리일이 평소에 가는 곳이라 해 봐야 연무장이 전부였으니, 가서 그의 몸매나 침 흘리며 구경하면 된다.

가끔 가족들에게 가는 걸 따라갈 땐 조금 부담스럽지만, 그것만 빼면 정말 꿀처럼 편한 직장이었다.

그냥 남친과 하루 종일 붙어있기만 하면 나라에서 월급을 준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게다가 리일이 시도 때도 없이 날 찾아서인지, 그 누구도 내게 다른 일을 시키지 않았다.

물론 내가 팽팽 노는 이 순간에도, 본궁의 시녀들은 신년무도회니 뭐니 각종 행사에 바빴지만, 난 몇 발자국 동떨어져 그저 한가했다.

한 마디로 명목상으로만 시녀이지,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존재...? 올레!! 역시 고생 끝에 행복 온다고!!! 개꿀이야!!

아무튼 우린 밖으로 나와, 제도의 전경이 쫙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언덕 위에 앉았다.

“우와아아!! 제도 시내가 다 내려다 보여요! 정말 멋져요!!”

겨울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햇빛이 쨍했다. 그 눈부신 햇살 아래로, 아름다운 제도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경치 좋지!? 엣헴, 여긴 나밖에 모르는 명소야! 아참, 리엘. 춥지는 않아?”

“전혀요. 마법이 정말 좋네요! 저도 꼭 배워야겠어요!!”

리일이 황궁에서 챙겨온 방한마법이 걸린 망토 덕에, 12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춥지가 않았다.

엄청 비싼 물건일 텐데... 덮는 걸로 모자라 심지어 엉덩이 뜨뜻하고 푹신하게 깔고 앉기까지 했다.

“응! 나도 검술훈련 열심히 할 테니, 앞으로 연무장에 오지 말고 그 시간에 누나랑 마법을 배워.”

“정말 고마워요... 앗, 저기 황궁이 보여요!!”

“그러게. 아주 조그맣게 보인다. 이렇게 보니 정말 작은 세계네.”

“저 속에서 그렇게 아웅다웅 죽어라 버텨왔는데... 막상 멀리서 보니 정말 작네요. 제가 겪었던 그 모든 힘겨운 일들이 갑자기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요...”

“그건... 지나고 나서 그런 거야. 원래 과거의 일은 다 바래는 법이니까. 힘들었던 일도 추억으로 기억되고, 좋았던 일은 조금 무뎌지고 말이야.”

“그렇군요...”

“하지만 리엘, 난 널 처음 만난 순간을 선명하게 기억해.”

리일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잡기 시작하자, 그의 눈에서 마치 별이 쏟아지듯 하트가 뿅뿅댔다.

“어, 어땠는데요...?”

“얼마나 황당하고 웃겼는지, 도무지 잊을 수가 없지 않았겠어?”

“뭐예요 그게!!”

“풉... 하하하! 농담이야. 사실... 수수한 모습조차도 정말 예뻤어.”

두근...

“그래서 나한테 한눈에 반했어요?”

“뭐? 아냐!!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라고, 흥!”

“피잇, 그럼 언제 반했는데요?”

“...........”

“리일?”

“.........모르겠어. 그게 머리로 그렇게 딱... 아 이때부터였구나 계산이 되는 게 아니잖아. 그냥 정신을 차려 보니 너에게 반해 있었어. 내 마음을 확실히 깨달은 건 널 잃을 뻔 했을 때였지만 말이야.”

“.............아...”

“리엘, 그러는 리엘은?”

서글프게도, 리일을 밀어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난 진심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기 힘들어서 적당히 둘러댔다.

“저도 비슷해요...”

“역시 우린 운명이야! 리엘...”

난 리일과 사귀기 시작한 후, 연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그의 생각을 함부로 들여다보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했다.

뭐, 안 그래도 요즘 리일의 생각을 읽은 적이 거의 없긴 했다. 얘가 워낙 단순해서, 굳이 능력이 아니더라도 표정만 보면 다 알 수 있달까...?

예를 들면 지금처럼 말이다.

나에게 키스하기 위해 리일의 입술이 다가오고 있었다.

“리, 리일...”

원래 육탄공세도 주저하지 않으려 했던 처음 계획은 어디로 가 버린 건지, 사랑에 빠지자 난 그저 수줍고 또 수줍은 십대 소녀가 되어버렸다.

“.........!!!”

순식간에 다가온 그의 얼굴이, 내 작은 입술을 삼켜버렸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의 말캉한 입술을 받아들였다. 달콤하면서도 끈적한 유혹의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흐읍... 아...”

“리엘... 나 네가 너무 좋아...”

뜨거운 그의 입술과 혀가 내 안을 간질일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손을 들어 올려 내 뒷머리를 받친 리일은, 더더욱 격렬히 입을 맞춰왔다.

“하... 리일... 수, 숨이...”

“하아.. 하아...”

내가 숨이 막혀하자 그는 잠시 얼굴을 떼었다. 그 역시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우린 둘 다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리엘....”

그의 목소리엔 기분 좋은 울림이 있었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자 자꾸만 마음이 두근댔다. 마음 같아선 내 쪽에서 먼저 확 덮쳐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

하지만 이대로 끝까지 진도를 뺄 수는 없으니 여기서 멈춰야 했다.

내가 아무리 진도에 거리낌 없다지만, 적어도 여기선 아니었다. 기사들이 어디선가 다 지켜보고 있는 이런 풀밭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리엘...”

“와아, 하늘이 참 맑아요!”

난 아주아주 어색한 말투로 먼 산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기도 좋고요!”

“그, 그렇네...”

“그쵸? 에구구, 삭신이야.”

더 이상 묘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해, 깨는 소리까지 하면서 풀밭에 벌러덩 드러누워 버렸다.

“이 나이에 벌써 삭신이 쑤시면 어떻게 해...?”

“몰라요. 몇 달 동안 하도 노동에 시달렸더니 손목이고 허리고 안 아픈 데가 없네요.”

“리엘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도록, 얼른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이미 전보다 훨씬 처지가 나아졌는걸요? 그때는 정말 지옥이었어요. 추운 창고에 갇혀 며칠이나 굶었던 적도 있었어요. 공주가 언제 갑자기 절 끌어내 채찍질할까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리엘...”

대수롭지 않게 말한 내 말에, 리일은 너무나 안쓰러운 듯 얼굴을 흐리며 날 쓰다듬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니 정말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난 혼자 호의호식하고 있었는데...”

“괜찮아요. 리일이 미안해 할 일은 아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난 항상 떠받듦만 받고 자라왔기에,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대우를 받고 살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

“............”

“다들 나처럼 편히, 귀하게 사는 건 아닐 텐데... 한 번도 주변을 보려 하지 않았어. 그게 너무 한심하고 부끄러워.”

“리일...”

“네가 아니었으면 평생 몰랐겠지. 아니면 알았어도 그저 나와 상관없는 먼 남의 일로 느꼈을 테고.”

“리일의 입장에서는... 몰랐을 수도 있죠.”

“나 리엘을 만나면서 많이 바뀌게 된 것 같아. 그동안은 그 무엇도 절박하지 않아 치열해 본 적이 없었어. 그저 철없이 제멋대로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목표라는 게 생겼어.”

“목표...요?”

“응. 너에게 멋진 남자가 되도록 앞으로 많이 노력할게. 리엘, 다 네 덕분이야.”

“리일...”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는 그가 너무 매력적이라, 도저히 내 마음을 온통 빼앗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연하의 소년이 듬직한 남자로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사실은 리일의 생일이 나보다 반 년 정도 빠르니 오히려 그가 연상인데 말이다. 이건 내가 살짝 환생 아줌마스러워서 느끼는 기분인가?

어쨌든 순수한 소년 같은 그의 매력에, 난 속절없이 반해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손은 어느새 의지와 상관없이 그를 풀숲에 눕혀버리고 있었다.

“리, 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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