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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52화 (52/134)

52. 연애(3)

2017.02.05.

***

아쉽게도 달콤했던 데이트는 짧게 끝났다. 한참 만지작거리며 꽁냥거리던 우리에게 기사가 다가와서는, 돌아가실 시간이라고 딱딱하게 보고했다.

그때의 리일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나야 리일과 하릴없이 놀고먹는 시녀지만, 리일은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레이튼 경 덕에 검술훈련을 빼먹을 수 없던 리일은, 황궁으로 재빨리 돌아가야 했다.

정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지, 리일의 표정은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았다.

그리고 난 그가 연무장으로 가는 모습을 확인 한 후, 황녀전하의 처소로 향했다. 이제 연무장에서 그의 수발을 드는 대신, 마법을 배우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똑똑똑

황녀의 연구실에 다다른 난 긴장되는 마음으로 노크를 했다. 웬 얼굴 모를 시녀가 나오더니 조용히 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와, 리엘. 엔릴한테 얘기 들었어.”

안에는 이미 황녀와, 교수로 보이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함께 학습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무려 교수가 와서 일대일로 강의를 해 주다니! 역시 권력이란 좋구나!! 거기 꼽사리 낄 수 있다니 정말 이보다 더한 행운은 없었다!!

“그렇게 딱딱할 필요 없으니 이쪽으로 와서 앉아.”

나는 교수에게도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미 설명하던 중이었는지, 안경을 고쳐 쓴 교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음.. 그럼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내가 열심히 독학했던 마법학개론에 해당되는 내용이었다. 다 아는 내용이었기에, 적당히 집중하는 척 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황녀 역시 지루한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배우기 시작한 지 몇 주 된 것 같은데, 왜 아직도 저 소리만 하고 있는 거지?

“전하, 그동안 마나를 느끼는 데 성공하셨습니까?”

한참 설명이 끝나자 교수가 물었다.

“음, 해 보긴 했는데... 무언가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발현에는 성공하지 못했어요.”

아하, 마나 발현에 애를 먹고 있어서 교수가 다시 한 번 기본 이론을 늘어놓고 있었구나.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느니, 집중을 하셔야 한다느니 뭐 그런 소리들...

교수는 황녀의 마나 발현을 도와주기 위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하며 필사적으로 노력을 했다. 난 옆집 불구경 하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쯧쯔... 그게 아냐. 내 생각에 이건 절박해야만 되는 거야. 느껴지긴 한다는 걸 보니 재능은 있는 모양인데, 솔직히 내가 황녀라도 그다지 아쉬울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냥 호기심으로 시작해 본 거지, 나처럼 살아남기 위한 간절함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한참을 붙잡고 씨름하던 교수는, 잘되지 않자 안타까운 듯 발만 동동 굴렀다.

“그냥 제가 혼자 더 연습해 볼게요.”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황녀는 알아서 해 보겠다며 교수를 물리쳤다.

하긴, 저렇게 딱 붙어서 어떻게든 해 주려고 안달복날 하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될 것도 안 되겠다...

황녀가 혼자 앉아 연습하자, 교수는 이윽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리엘양은 어떤가? 마나 감응에 성공했는가?”

“네, 발현은 쉽게 돼요.”

난 직접 마나를 이끌어내 보이면서 대답했다.

“오오... 처음 배운다더니 이렇게 쉽게! 대단히 재능이 있군!”

“아... 처음은 아니고요. 마탑에 있을 때 독학을 했었어요. 마나 발현에 성공해서 실험실도 빌려서 연습했었고요.”

“그렇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수식을 이해하고 계산하는 걸 배워야겠구나. 그게 익숙해지면 마나를 변환시켜 배열하며 집중을 유지하는 연습을 해야겠고.”

아씨,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실험실을 빌려 마법을 연습했었다고!

교수는 아무래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마나 발현을 어쩌다 겨우 인증 받은 내가, 그 후 숙달을 위해 실험실에서 연습했다고 말이다.

“저, 그게 아니라 마법을 성공시키기 위해 연습하다가, 실패해서 사고를 쳤었어요. 거의 다 됐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폭주하는 바람에...”

“뭐...? 마법이라니??? 마나 발현을 성공하자마자 바로? 그것도 혼자서??”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네? 네... 책을 보고 그냥...”

“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왜 이러지...? 나 뭐 잘못 말한 건가? 아 혹시 혼자 멋대로 연습하다가 사고 낸 일 때문인가?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교수의 모습에 난 순간 당황했다. 그런데 곧바로 들려오는 다음 말은 더욱 더 놀라웠다.

“자네는 천재야!!!!”

“......네?”

“자네는 천재라고!!”

“...제가요?”

“세상에..!! 마나를 깨우치자마자 바로 마법을 발현해 내다니!!”

으잉? 새삼 왜 그래? 그렇게 대대적으로 사고를 쳤는데, 내가 마법연습을 했던 거 다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그게 놀랄 일인가요?”

“물론이지!!”

아무래도 내 마법에 대한 천재성(?)은, 사고를 내 황족을 상하게 했다는 팩트 자체에 가려져 묻혀버린 모양이었다. 그러던 게 이제 알려지니 교수가 저렇게 놀라는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나 천재 아닌데... 그거 다 편법인데... 뭐라 설명하지?

“리엘양, 이걸 한 번 보겠나? 이해할 수 있겠나?”

그럴 리가!! 이해 안 가!! 전혀 안 가!! 게다가 굳이 과정을 이해해 가며 매번 계산하고 싶지는 않다고... 마법 하나 붙잡고 차근차근 풀며 공부할 시간에, 무식하게 외워서 하면 훨씬 여러 가지를 해 볼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 편법을 뭐라 설명하기 애매해서, 그냥 말없이 마나배열을 보여주었다.

어차피 복잡한 식이야 재빨리 외우면 되고, 옆에 입력값에 따른 과정과 결과값이 표로 잘 정리되어 있으니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물론 중간에 집중을 잃어 흐트러지긴 했지만, 어느 정도 성공하는 모습에 교수는 기겁했다.

“천재야 천재! 감응력도 집중력도 두뇌도 전부!!”

으악, 제발 그만 착각해!! 난 그냥 편법이라고!!

교수가 흥분해서 이것저것 시켜보려는 걸 겨우 뜯어말린 나는, 이미 연습하던 마법이 하나 있으니 그걸 계속 연습해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럼 이걸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고 나면 수업에 다시 오게나. 바람 계열 마법을 단계별로 가르쳐 주겠네.”

이 아이가 제국인이면 정말 좋을 텐데... 라며 아쉬워하는 교수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걱정 마세요. 마법으로 서임만 받으면 잽싸게 귀화할 거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지난번처럼 사고치지 말라며, 난 안 쓰는 연무장을 하나 배정받았다. 그 곳이라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해도 되니 안성맞춤이었다.

신나서 방을 나가려는데, 한참 끙끙대던 황녀가 나를 불렀다.

“리엘”

“네, 전하.”

설마... 시녀가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걸 질투해서 괴롭히려는 건 아니겠지? 황녀가 어떤 성격인줄 대충 알면서도, 셀리나 공주한테 하도 데인 난 겁이 덜컥 났다.

“리엘, 정말 잘됐다. 이렇게 뛰어난 재능이 그대로 묻혀버릴 뻔 했잖아. 천재라니... 대단해!!”

다행히 전혀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그런 걸로 질투하면 세상의 마법사들 다 시기하게?

그래도 셀리나 공주였으면 길길이 날뛰며 지랄했을 텐데... 황녀전하가 진짜 성격이 좋구나. 그 어머니에 그 딸답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천재는 절대 아니랍니다. 교수님께서 과분한 칭찬을 해 주신 거예요.”

“겸손하긴... 아무튼 나도 기대할게!”

“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 씩씩한 대답에, 황녀는 무언가 기대하는 눈초리로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근데 리엘, 바람 계열 마법 말고 다른 건 다른 건 관심 없어?”

“다른 거요? 관심이 없다기 보다는... 사실 아직 다양한 마법의 종류를 다 알지 못해서, 일단 쉬워 보이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그랬구나... 사실 내가 요즘 정신계열 마법에 대해 연구 중인데... 같이 연구해 보지 않을래?”

“정신... 계열요?”

“응. 요즘 부쩍 관심이 생겨서 말이야. 내가 직접 마법을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으잉? 갑자기 왠 정신 계열? 그런데 그런 것도 있나?

“아... 그러시군요.”

“근데 내가 마법을 써 본적이 없으니, 내용을 읽어 봐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서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책에서 설명하는 느낌을 직접 알지 못하면,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겠지요?”

“맞아, 그거야! 여기서 말하기론, 정신계열 마법을 하려면 기본적인 마법 재능이 필요할 뿐 아니라, 그 계열에 맞는 특수한 마나감응력을 타고 나야 한다고 해. 근데 그게 대체 어떤 감응력을 말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어. 리엘이 뛰어나다니까 혹시 알까 해서... 뭔가 감이 잡히는 거 없어?”

“음... 저도 이제 막 시작한 초보라서요. 마나를 발현하는 건 익숙하지만, 특수한 마나감응력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난 진심으로 이 천사황녀님을 도와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 아는 게 없는 걸 어쩌겠는가...

“아냐, 미안하긴... 휴우...”

“그래도 제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리엘. 앞으로도 같이 공부하자.”

“저야말로 언제나 감사드려요. 이런 귀한 기회를 주셔서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

요즘 난 물 만난 물고기마냥 마법연습에 매진했다. 지난번처럼 급한 마음에 하다가 또 사고치지 않도록, 처음부터 차근차근 공부해 나갔다.

꼼수로 대충 때웠던 수식도, 이젠 차근차근 기초부터 공부해 이해해서 풀었다. 물론 내 기억력은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외우는 것보다는, 이해와 함께 외우니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마법 연습 말고는 꽤나 한가했다. 리일이 날 불러낼 겨를도 없이 검술훈련에 매진하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틈에 휴가를 신청해 이튼 오라버니를 만나기로 했다.

“오라버니!!”

약속한 장소인 외궁 어딘가로 나가니, 이튼 오라버니의 모습이 보였다.

“리엘, 잘 지냈니? 얼굴 보기 참 힘들구나.”

오라버니와는 무도회 이후 처음 만나는 거였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같은 제도에 머무르고 있는데도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다니... 제국에 와서 만난 횟수를 세 보니 한 손가락 안에 꼽혔다.

“저야 잘 지냈죠. 정말 편하게 무위도식하고 있답니다.”

“정말 다행이다. 예전에 비해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는구나.”

“감사해요. 오라버니도 잘 지내시죠?”

“응. 나야 뭐 늘 똑같지. 근데 리엘, 황자 전하와는 정리한 거지? 안 그래도 공주저하와 요즘 간간히 만나시는 것 같던데...”

오라버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물어보았다.

“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어서 그냥 거짓말을 했다.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리일과 나의 사이는 오라버니가 염려하는 것만큼 위험한 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긍정하는 내 대답에, 오라버니는 내가 리일과 끝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공주와 만나는 모습 역시 내 말에 신빙성을 더해 준 모양이었다.

“그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괜히 너만 다칠까봐 초조했단다. 황족들 곁에는 가지 않는 게 좋아.”

“오라버니, 전 황자전하의 시녀인걸요.”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그 이상의 선을 넘지 말라는 뜻이야. 그리고 일이 전부 끝난 후에는 더 이상 황궁에 남지 않으면 좋겠어.”

“하지만... 리테인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만약에, 아주 만약에 공주가 리일과 결혼해서 황자비가 되면 우린 리테인으로 돌려보내지려나?

공주가 본궁으로 들어가면 별궁은 텅 빌 테니, 우리를 굳이 놔 둘 필요 없겠지? 결혼동맹이 굳건해지면, 쓸모없는 하녀들을 볼모로 딱히 붙잡고 있을 이유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본궁의 시녀가 된 나는 원한다면 제국에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주가 날 리일 곁에 두지는 않겠지만, 드넓은 궁 어디에라도 붙어있을 수 있겠지. 마법사로 귀화하면 더더욱 좋고.

반대로 협정이 파기되고 전쟁이 날 경우도 생각해 보았다. 그럼 공주도 리테인 하녀들도 꼼짝없이 인질이 되는 셈이다.

하녀들이야 대부분 가문에서도 버리는 패니 죽든 말든 상관 않겠지만, 적어도 왕족인 공주의 목숨은 중요하겠지. 아무짝에 쓸모없는 공주라도 왕가의 상징성이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리엘.”

“......네?”

생각에 빠져있느라 대답이 늦었다.

“리엘,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오라버니는 발끝만 바라본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리엘...”

“네.”

“리엘...... 내가, 내가 널 책임지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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