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연애(4)
2017.02.06.
“..........”
무슨 말인가 싶어 난 소처럼 눈만 끔뻑였다.
“리테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하는 거 알아. 아마도 돌아가면... 가문에서는 널 내치겠지.”
오라버니는 아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자신의 부모님이 쓸모가 다한 나를 절대 거둬주지 않을 거라는 걸. 살인멸구만 안 해도 감지덕지라는 걸...
나 역시 그걸 알았기에, 이기적이든 속물이든 뻔뻔하게 누구라도 낚아서 살아남을 생각밖에 없었던 거고. 그게 리일이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저도 짐작하고 있어요.”
“파양되고 나면, 법적으로도 혈연으로도 우린 남남이야. 남매가 아니라는 거지.”
“...네!?”
설마, 설마 그런 말 하려는 건 아니죠? 오라버니, 이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듣지 않아도 들렸다. 망설이며 입을 떼지 못하는 오라버니였지만, 그 눈동자만은 뚜렷이 말하고 있었다.
-리엘. 널 여동생으로 아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어느 새 나도 모르게 널 좋아하게 되어버렸어...
너무나 선명히 들려오는 오라버니의 생각에, 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리엘, 사실 나...”
“...!! 오라버니!”
뒷말을 듣지 않기 위해 다급히 오라버니를 부르며 말을 끊었다. 이미 책임지고 싶다는 말을 들어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
“오라버니 안 돼요. 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15년간 동생이었는데, 이제 와서 핏줄이 아니라고 어떻게 그래요... 피 한 방울 안 섞여 있어도 우린 남매예요.”
“미안해. 나도 이런 내가 이해가 안 가...”
“남남이 되어버릴 거라고 해서,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이 달라져요?”
“하지만 어떻게 해... 내 마음이 그런 걸...”
“전 단 한 번도 오라버니를 그런 의미로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넌 항상 내 어여쁜 동생이었어! 하지만... 네가 쫓겨나고 나서 안타까움과 그리움에 나도 모르게 이렇게...”
난 차갑게 오라버니의 말을 끊어버렸다.
“참 편리하네요.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연정으로 변해요?!”
후벼 파듯 던지는 내 말에 오라버니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네가 시해사건에 휘말렸을 때, 네 걱정에 얼마나 피가 말랐는지 몰라. 그저 네가 무사하기만을 빌고 또 빌었지. 내 앞날이건, 가문이건 어떻게 되든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말 여동생일 뿐이라 생각했어.”
“그래요. 전 그냥 동생이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어떻게 그렇게 한순간에 동생이 아니게 느껴지냐고요!?”
자신도 스스로 괴로운 듯, 오라버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궁무도회에서 널 봤을 때, 처음에는... 네가 황자 전하 곁에서 마음 다칠까봐, 그게 싫은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봐.”
“......”
말도 안 돼. 이게 무슨... 오라버니가 날 여동생 이상으로 생각하도록, 그걸 자각하게 만든 계기가 리일이라고?
“미안해. 이미 내 마음을 깨달아 버렸어. 하지만 너에게 방해가 된다면 영원히 말하지 않으려 했어. 지금 말한 것도 단지... 일이 다 끝난 후 널 지켜주고 싶어서 말한 것뿐이야.”
“......”
“리엘...”
“오라버니, 그때도 지금도 전 오라버니의 동생이에요.”
“...이제는 아니잖아.”
아직까지는 법적으로 동생이지만, 그게 곧 아무 의미 없어질 껍데기뿐이라는 걸 사실 둘 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아뇨. 변함없어요. 우리가 핏줄이든 아니든, 오라버니는 영원히 제 오라버니일 뿐이에요.”
“난 단지 널 지켜주고 싶어서 그래!”
“오라버니가 그렇게 해 주실 필요 없어요.”
딱 잘라 대답하는 내가 야속해 보였는지, 오라버니는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라버니는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너 혼자 어떻게 살려고 해!?”
“..........”
“설마 아직도 황자전하에게 미련을 못 버리는 거야?”
“..........후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리엘,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좀 들어봐. 아카데미 유학기간을 연장하면서, 제국에 정착할 방법을 알아볼게. 리테인에 돌아가지 말고 나와 여기에 남자.”
“오라버니, 그만 하세요.”
“네가 싫다면, 내 마음이 끔찍하게 소름끼친다면 널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을게.”
“......오라버니”
“그냥 널 지킬 수 있게만 해 줘. 평생 여동생으로서 대할게. 하지만 이대로 네 파국을 볼 수는 없어. 앞일을 생각해 봐야지.”
“고마워요. 하지만 제 앞가림은 제가 알아서 할 게요.”
“........”
오라버니가 무어라 하기 전에, 재빨리 작별을 고했다.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리엘!”
날 애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리엘! 리엘!!”
***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오늘 딱 하나 남은 가족을 잃었다.
이미 그런 말을 들은 이상,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오라버니를 가족으로 대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흐흑... 흑흑...”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누운 채 하염없이 울었다. 누군가 날 좋아하게 되는 일이 이렇게 슬프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항상 그랬지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 질 거야...
난 꾹꾹 눌러 잊어버리고, 없던 일처럼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쑥 리일이 떠올랐다.
“보고 싶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스스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자기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지금쯤 연무장에 있을까? 내가 방해 방해가 되지 않을까? 내 쪽에서 먼저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나면 정말 놀라겠지?
늘 일방에 가까운 그의 애정과 관심을 받기만 하다가, 내가 힘들어지니 그를 먼저 찾아갈 생각을 하다니... 나 진짜 못된 년이구나...
그 동안 벌써 익숙해진 건지, 그가 내게 보이는 한결같은 마음을 당연하게만 여겼었다. 그런데 요 며칠 각자 마법과 검술수련으로 한동안 못 만나자, 당연한 줄 알았던 그의 존재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리일... 보고 싶다...”
오라버니의 일을 겪자, 오히려 리일에 대한 마음만 더 깨달았다.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말이다.
나 정말 리일을 많이 좋아하는데... 내가 항상 밀어내기만 해서 그는 잘 모르겠지?
이제와 생각해 보니 얼마나 상처였을까... 한 번도 거절이라고는 당해본 적 없이 곱게 자란 황자님이, 나에게 매번 매달리고 애원하고, 자존심 다 버리고 한 거였을 텐데...
그러고 보니 사귀고 나서 내 마음을 직접 표현한 적이 없었네. 리일은 늘 거리낌 없이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었는데, 난 단 한 번도 그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다음에 만나면 꼭 말해줘야겠다... 아냐!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지금 바로 찾아가서 말하는 거야. 그래! 리일을 보면 기분도 나아질 거야!!
그렇게 결심한 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의기 충만하게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퍽!
응? 왜 방문을 여는데 퍽 소리가 나지? 그러고 보니 무언가 부딪친 소리 같기도 하고...
“으악 리일!! 괜찮아요!?”
영문은 모르겠지만, 내 방 앞에는 이마를 부여잡고 끙끙대고 있는 리일이 있었다. 퍽 소리는 리일의 이마에서 나는 소리였나 보다.
“....괘...괜찮....아파....”
괜찮아와 아파의 합성어인가.........?
“어떡해... 미안해요. 정말 너무너무 미안해요...”
내가 너무 미안해하자 리일은 억지로 씨익 웃어보였다.
“훗! 이 정도 쯤이야! 하나도 안 아파!!”
저기, 리일 이제 와서 갑자기 씩씩한 척 해봤자...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 나는 웃지도 못하고 연신 그에게 사과했다.
“정말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남자가 이쯤이야!”
아니 꼭 그렇게 남자답지 않아도 난 괜찮은데... 뭐랄까, 남자답다고 하기 보다는 귀여운 연하남의 매력이 더 크니까!
난 미안한 마음에 그의 멍든 이마에 마나라도 뿅뿅 부어주었다. 힐링은 할 줄 모르지만 이것도 꽤 도움이 되니 다행이었다. 내가 발목을 삐끗했을 때 리일이 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리일, 제 방에는 웬일이세요?”
이 허름하고 누추한 시녀 숙소에 리일이 직접 찾아오다니... 물론 어디까지나 리일 기준이다. 시녀들은 전부 귀족 영애들이었기에, 숙소의 수준은 적어도 전생의 호텔방 정도는 되었다.
“아 그냥... 오랫동안 못 봐서... 잘 있나 궁금해서...”
괜히 켕기는 구석이 있는 나는 혼자 제 발이 저렸다.
“........정말요?”
그런데 왜 리일이 직접 여기에? 보통 땐 항상 나를 불렀는데...? 혹시, 오라버니와의 대화를 들은 거 아니겠지?
지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반가워서 쫓아왔다가, 우연히 듣게 되었다거나...
“응. 리엘은 나 안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다는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구석이 있었던 내 대답은 그저 어색했다.
“정말?”
“네... 정말요. 사실 저도 막 리일에게 가보려던 참이었어요.”
“와! 리엘이 나에게 먼저? 진짜?”
“네. 진짜. 보고 싶었거든요.”
좋아한다는 말도 아닌 고작 보고 싶었다는 말 뿐이었는데도, 내 마음을 제대로 받아 본 적 없던 리일은 뛸 듯이 좋아했다.
“기쁘다... 정말 기뻐!!”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은 걱정으로 꽉 차 있었다. 정말 들었으면 어떻게 하지? 신분의 비밀도 문제지만, 그것보다 오라버니가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을 봐 버렸다면...
리일의 생각을 읽어 볼까? 하지만 적어도 리일에게는 이제 안 그러겠다고 다짐했는데...
한참 갈팡질팡 고민하던 나는, 딱 한번이라 생각하고 그의 생각을 읽어버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워낙이 강렬했는지, 그의 복잡한 심정이 여과 없이 흘러들어왔다.
-그런데 아까 일은 대체... 어떻게 된 거지?
“..........!!”
정말 들은...거야? 이복 남매의 사랑고백이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분 문제까지 알아버렸을까? 핏줄로도 남남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저것만으로는 그가 어디까지 아는 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그때 한 마디 더 들려왔다.
-분명 오라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복남매라 해도 남매인데...
아... 전부 다 듣지는 않았나 보구나. 들었다면 이복남매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더더욱 이해 안 가겠지. 아무리 반쪽 핏줄이라 해도 피 섞인 남매라 생각할 텐데...
심란한 마음이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리일의 생각은, 저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튼 난 그제야 안도가 되었다. 진짜 나 속물이구나...
하지만 어쩌지? 이대로 계속 숨길 수는...
내 표정이 점차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는지, 리일은 일부러 더 밝은 말투로 애교스럽게 물었다.
“리엘, 나 보고 싶어서 힘들었어? 정말 많이 보고 싶었나봐?”
본인도 마음이 복잡할 텐데... 조금도 내색하지 않은 채 해맑게 웃으며 조르듯이 물었다. 그런데 너무 미안해서인지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
이대로 모른 척 하기엔 마음에 걸리는데, 차라리 직접 물어볼까...?
“리엘?”
“아... 네.”
“리엘,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묻지 않을게. 그냥 나를 좋아해 주기만 하면 돼. 흔들리지 말고 날 택해주면 그걸로 충분해.”
“리일...”
내가 무슨 생각하는 지 다 아는 듯한 말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는 그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난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기로 했다.
“리일”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