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연애(5)
2017.02.07.
할 말이 너무너무 많았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말부터 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
“저 리일이 좋아요.”
난 드디어 그에게 고백했다.
“........리엘...”
“아주 많이 좋아해요. 한참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밀어내기만 하느라 말을 못 했어요. 너무 늦게 말해서 미안해요...”
와락
대답 대신 리일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고마워. 리엘 정말 고마워...”
한참을 안은 채 날 놓지 않던 리일은, 내가 버둥거리자 그제야 살짝 힘을 빼 주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난 리일에게 반쯤 안긴 자세로, 그 애정 가득한 눈빛을 여과 없이 받았다.
그 잘생긴 얼굴에 환한 미소가 한가득 걸리는 걸 보니, 주변이 찬란하게 밝아지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리일 있잖아요. 좋아한다는 말 말고도... 제가 해야 할 말이 많아요. 조금... 아니 꽤 많아요. 제가 그게...”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횡설수설하고 있는데, 리일이 손가락을 들어 내 입에 가져다 댔다.
“쉬잇. 말하지 마. 신분 같은 거 아무 상관없어.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네가 날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궁금해 하고, 듣고 싶어 하는 게 보통 아닌가? 리일의 눈동자는 무언가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듯,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리엘, 날 좋아해 줘서 기뻐. 그거면 된 거야. 다른 건 필요 없어.”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내 곁에 있는 이튼 오라버니가, 사실은 연적일 수도 있다는 그 진실을 듣기가 무서운 걸까...?
아니면 신분상의 이유로 내가 그를 떠나버리게 될까봐? 자신 없는 나머지 그를 포기하고, 오라버니에게 가 버릴까봐 걱정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할 만 했다. 사생아라고 알려졌던 그동안도 리일을 그렇게 밀어냈는데, 그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아지면 내가 멀리멀리 도망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겠지...
“........”
내가 숨긴 게 신분만이 전부가 아닌데...
그의 품에 안긴 채 긴긴 갈등을 했다. 수많은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유예’였다.
그래. 다 말할 거야.
내가 스스로 당당해 진 다음에, 과거 따위 다 날려버릴 만큼 떳떳한 신분이 되고 나면 다 말해야지. 출생의 비밀도, 숨겨온 내 능력도 전부...
하지만 그건 어쩌지...? 리일의 신분을 알고도 모른 척 했던 시절의 못난 내 모습...
고민하는 내게 그의 따뜻한 손길이 닿아왔다. 나를 다정히 쓰다듬으며 리일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날 택해 줘서 고마워, 리엘.”
“리일. 제가 더 고마워요, 항상 분에 넘치는 사랑을 줘서...”
“리엘에게는 뭘 줘도 아깝지 않아. 아깝기는커녕, 줘도 줘도 부족한 것만 같아. 그러니 그런 말 하지...!!”
그의 바람대로 난, 쓸데없는 말 대신 내 입술을 그에게 주었다. 내가 먼저 입을 맞춰올 줄은 몰랐는지, 동그랗게 떠진 리일의 눈이 보였다.
나 역시 눈을 감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의 눈동자를 뚜렷이 바라보며 입술을 탐닉하듯 맛보았다.
혀로 사르륵 쓸어내리며 입술을 살짝 깨물자, 리일이 움찔 몸을 떨었다.
“맛있어요....”
난 유혹하듯 아찔한 미소를 지어주며 말했다. 그에게서 나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기분 좋았다.
멍하니 내 입술을 받아들이던 리일은,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갑자기 격정적으로 덮쳐왔다.
“아읏...”
전기가 오르듯 짜릿한 느낌에 절로 야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아...”
그의 거칠어진 호흡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길에 맡긴 내 몸은 점점 뒤로 밀려나며, 어느새 방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리일...”
순식간에 엉덩이에 침대가 닿아왔다. 그가 슬쩍 밀자 내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침대로 기울어졌다.
리일의 입술이 귓불을 지나 목덜미를 타고 내려왔다. 손은 어느새 내 가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읏... 하아...”
“리엘.... 리엘......”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망설이던 다른 한 쪽 손은 결국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읏...”
나 역시 손을 뻗어 그의 상의를 헤집고 탄탄한 복부를 쓰다듬었다. 맨 살에 그대로 만져지는 근육의 느낌이 정말 섹시했다. 이런 몸에 이런 얼굴이라니...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리일은, 적극적이었던 게 언제였냐는 듯이 갑자기 갈등이라도 하듯 주저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이럴 수는 없는데...
다 들려! 그리고 그딴 생각 하지 마! 키스는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해 대더니, 왜 자꾸 미적대는 거야!?
“리일...”
이미 난 잔뜩 흥분해 있었기에 리일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는 그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으며 유혹했다.
“으....”
그가 몸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고 그의 목덜미에 진한 키스를 남겼다.
“리엘... 아.......”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키스는 점점 진해졌다. 허리를 쓸어내리는 리일의 손길에 나는 연신 므흣한 소리를 냈다.
“하읏.. 아... 으으.....”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던 리일은, 고개를 들어 다시 내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어느새 내 상의 안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고작 그 얇은 한 겹 옷이 뭐라고, 그의 손이 직접 맨살에 닿자 미친 듯이 찌릿해졌다. 내 가슴은 이미 단단히 그의 손에 반응하고 있었다.
몸이 뜨거워지며 간질거렸다. 이미 아는 감각이지만 이 몸으로는 처음인지라, 난 유난히 예민하게 느꼈다.
사실 오래 전, 그의 신분을 알게 된 초반에는 꽤나 고민하며 머리를 굴렸었다.
만약 그와 가까워지면 육탄공세로 녹여야 하는 건지, 아니면 비싸게 굴며 애태워 첫날밤을 기다리게 해야 하는 건지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런 고민 따위는 다 사라졌다. 아니, 생각도 안 난다. 난 그저 온 몸으로 그를 받아들이려 했다.
“리일... 아아아....”
그런데 정작 리일은 입술을 꽉 깨물어 피를 내더니, 갑자기 나에게서 떨어졌다.
“으... 리엘.. 그만.. 안 돼...”
“......리일?”
뭐지? 얘 갑자기 왜 이래? 왜 하다 말아!?
설마, 이건 마치... 나를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에 마치 죽도록 충동을 억누르고 있는 듯 했다. 더 이상 나아갔다가는 도저히 자제할 수 없을 것 같아 억지로 멈춘 것처럼...
“미안, 리엘! 내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봐. 정말 미안해...”
“.........네?”
“이렇게 함부로 안으려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뭐야! 왜! 니 동생이 조카 만들어 달라잖아!
물론 장소가 좀 그렇긴 하다. 저 문만 나가면 곧바로 복도다. 시녀들이 언제 지나다닐지 모르는... 그리고 다른 시녀나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수도 있고.
아니 그래도 하다가 마는 게 어디 있어!!? 나 잔뜩 기대했는데! 침까지 흘려가며 네 조각 같은 몸을 감상했다고! 미친 행운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지작거렸는데!!
리일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연신 사과했다.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이 충격이라도 받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미안해, 정말. 앞으로 조심할게.”
그게 아냐!!!! .....진심 한 대 때릴 뻔 했다.
“............”
정말 참는 거야? 헐... 17세 피 끓는 나이에 그게 가능해? 너 바람둥이 아니었어? 혹시 진심인 여자에겐 정작 못 하는 뭐 그런.... 요상한 거야?
몸도 마음도 좋아하는 사이에 왜 그래!!!
하지만 난 솔직한 속마음을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치자마자,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미안. 나도 처음이라서 이성을 잃을 뻔 했어.
헐... 정말 총각이었던 거야!!?
그럼 내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나한테 잡아먹힐까봐 무섭겠지? 리일이 기겁을 하고 도망갈지도 몰라.
“네. 다, 다음에... 낭만적인 첫... 날을 기대할게요...”
결국 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조금 더 그럴싸한 로맨틱한 장소에서. 분위기 잡고...
이렇게 돌려 말하니 꽤 그럴싸하군. 섬세한 소녀 같아 보이기도 하고.
발갛게 물들인 내 볼은 대사와 퍽 어울렸다. 물론 수줍어서 붉어진 건 절대 아니다. 몸이 달아올라 붉어진 거니까.
리일 역시 볼을 붉히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 후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어느새 황녀와 만나 같이 연구하기로 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리일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나를 바래다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첫 시도는 미수로 그쳤다.
***
그 날 이후 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서라도 정말로 열심히 마법 연습을 했다. 리일이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는 동안, 반대쪽 연무장에서는 내가 머리가 터지도록 매일같이 마법을 날려댔다.
혼자 연습하다가 막히거나, 더 이상 연습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익숙해 질 때만 교수님을 찾아갔다. 찾아가서 이런 저런 조언을 받고, 다음 단계에 적합한 마법을 추천받아 나날이 바람계열 마법에 익숙해져갔다.
그리고 틈틈이 황녀전하와 정신계열 마법에 대한 연구도 함께 했다. 물론 아직 별 진척은 없었지만 그래도 조금 알아낸 건 있었다.
어디서 자꾸 자료를 받아오는 건지는 몰라도, 수집한 자료가 많아지자 그나마 나았다. 분석할만한 내용이 생겼으니까.
“흐음... 마나의 특수한 파동을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 같다는데...”
“특수한 파동이요? 전하, 그걸 알아냈다는 건 그게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는 게 아닌가요?”
“아냐. 고대의 문헌이나 쉬쉬하며 감춰오던 책들을 찾아내어 분석한 내용일 뿐이지, 정확히 무얼 뜻하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야. 마탑과 아카데미의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라고 해야겠어.”
역시 황녀가 직접 연구하는 건 아니고, 전문가들에게 맡겨놓고 확인을 하는 정도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뭐라도 건질까 하는 마음에 매일같이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거겠지...
“도움이 못 되어 드려 죄송해요...”
“죄송하긴. 혼자 끙끙대는 것보단 낫지. 마법을 아직 써보지도 못한 난, 보고를 받아도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니까.”
“전하도 곧 직접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이것 때문에 갑자기 마법을 배우려 했던 건가? 근데 이게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중요시 여기는 걸까? 물어봐도 될지 말지 난 잠시 갈등했다.
“전하..”
“리엘”
막 물어보려는데, 황녀도 나에게 할 말이 있었는지 하필이면 둘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황녀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내가 재빨리 양보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하지만 황녀는 나에게 선뜻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리엘에게 물어보는 건 좀 그런가...?
읭? 뭘 물어보려 했기에?? 난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쫑긋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