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55화 (55/134)

55. 연애(6)

2017.02.08.

하지만 황녀는 계속 머릿속으로 고민만 할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신전이나 왕실 쪽 사람이 아니니 어차피 모르려나? 그래도 리테인 사람이면 뭔가 들은 풍문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예민할 수도 있는 자국의 일을 물어보는 건 역시 좀 그런가...?

천사황녀님. 뭘 그리 고민하시는 건가요. 저 별로 모국에 애국심 없으니 뭐든지 물어보셔도 되는데...

"전하?"

더 이상 훔쳐듣기도 미안해서, 난 그냥 눈을 돌려버린 채 먼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아, 리엘은 무슨 말 하려 했어?”

하지만 황녀는 결국 말을 얼버무렸다.

어라, 그런데 난 무슨 말 하려고 했더라...?

“저, 저도 별 거 아니었어요.”

결국 서로 말을 꺼내지 못한 채, 오늘의 연구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

“리에에엘!! 나 안 보고 싶었어?”

리일은 요즘 방에 돌아오자마자 맨날 쓰러져 자기 바빠, 통 나랑 만나지 못하던 중이었다. 이제 정신 차렸다더니 진짜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모양이었다.

“보고 싶었어요.”

애정표현에 솔직해진 나는, 스스럼없이 그의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물론 비밀 연애였기에, 남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만나야 했다. 심지어 그의 처소에서도 시중인들이 없을 때만 우린 연애 티를 낼 수가 있었다.

충성도 높고 입이 무거운 그의 시녀들이 공주에게 우리의 일을 일러바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불안했던 난 몸을 사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헤헤... 좋다.”

역시나 리일은 헤벌쭉 입을 벌리며 기뻐했다. 으휴. 강아지 같기는...

“마법은 잘 배우고 있어?”

“물론이죠. 곧 천재마법사로 유명해질 테니 기대하세요!”

물론 천재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꽤 진척이 빠른 편이었다.

바람계열 기초 마법을 익힌 후, 난 내 취향에 잘 들어맞는 공격마법을 연습중이었다. 물론 같은 바람계열로.

바람을 응축해서 표적을 향해 쏘아 보내는 간단한 마법이었는데,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편이었다.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고 마나도 적게 드는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바람의 칼날을 날리는 셈이니, 검술로 비교하자면 단검을 날리는 것과 비슷하다. 즉, 정확도와 스피드가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한 번 날리는 데 준비과정만 몇 십 초가 걸린다면, 그게 실전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게다가 정확도를 높이려면 수도 없이 많이 연습을 해 놓아야 하는데, 그러다간 실전에 써먹기도 전에 뇌의 과부하로 쓰러지기 딱이었다.

그런 이유로 별 의미 없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난 다르지!! 편법왕 리엘! 암기왕 리엘이니까!

달달 외운 과정대로만 착착 배열하면 되거든! 매번 끌어오는 마나량은 대동소이하니까. 그리고는 무한 반복 숙달! 더더욱 빨라지도록 끝없이 연습!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연습 또 연습, 연습연습연습연습연습을 하다 보니, 이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번 거의 똑같은 마나량으로 발동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쯤 되면 껌이지! 난 보란 듯이 시범을 보여 주었다.

퓽!

내 손에서 나간 바람의 칼날에, 호화로운 방의 벽지가 처참하게 베어져 나갔다.

“우와! 리엘 멋지다!!”

짝짝짝!!

벽지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는 리일은, 어린아이처럼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난 몇 번이나 더 보여주며 엣헴 콧대를 세워댔다.

"우리 리엘은 얼굴도 예쁜데 마법도 잘해!! 역시 최고야!!"

"아하하하..."

난도질 당한 벽 앞에서 짝짝궁 하며 좋아하는 애들이라니.... 에구 부끄러워라.

이크, 아무리 그래도 황궁의 재산에 손실을 입히면 안 되는데... 안 그래도 연무장을 망가트려 놔서 찔리는데 말이야.

연무장 벽은 이미 내가 쏘아 보낸 바람의 칼날로 온통 난도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리일은 잘 되가요? 안 힘들어요?”

“흐억... 죽을 맛이지 뭐... 안 아픈 데가 하나도 없어."

"우리 리일 힘들어서 어떡해요... 흑..."

우리 리엘, 우리 리일. 남들이 보면 아주 닭살이 돋다 못해 치킨이 되어버릴 것 같은 풍경이었다.

"괜찮아! 이게 다 우리 리엘을 지키기 위해서인걸!? 그래도 누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황녀 전하요? 검술훈련에 황녀 전하가 왜요?”

“아.. 누나 덕에 공부는 안 해도 되니까 다행이라고. 우린 쌍둥이니까, 할 일을 반반씩 나눠서 부담하기로 했거든. 공부는 누나가, 검은 내가.”

“그렇군요...”

“응. 지금 생각해보니 만약 나 혼자 다 해야 했으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근데 그 분담은 누가 나눈 거예요?”

“글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그렇던데? 어마마마 말로는, 내가 어릴 때 하도 놀기만 해서 진즉에 포기했대.”

“쿡쿡. 포기 당했군요!?”

“아, 아니!! 포기라기보다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놔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렇게 된 거지! 아바마마도 강제로 뭘 시키려 하시지 않았기에, 삐뚤어지지만 않게 그냥 내버려 뒀다나...? 그것만으로도 두 분은 만족하셨대. 내가 어렸을 때 아주 싸가지가 없었거든.”

“정말요? 상상이 안 가요.”

“그치? 근데 오냐오냐 예쁨만 받아서 아주 오만방자하고 안하무인이었대. 그대로 컸으면 셀리나 공주처럼 되었을지도 몰라.”

“헉,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착해졌어요?”

“그게... 말로는 도통 들어먹질 않아서 두드려 팼대. 쿡쿡쿡”

“헉, 누가요? 설마 황후폐하께서요?”

“에이, 설마.”

헉, 그럼 황제가 직접? 내 표정을 읽기라도 한 건지 리일이 너스레를 떨며 답해 주었다.

“아냐. 아바마마는 마음이 여려서 아이들한테 손끝하나 못 대셔.”

여리...다는 정의가 조금 특이한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럼 누구?

“왜, 내 등짝 맨날 후려갈기는 사람 있잖아. 내 훈육담당으로 아바마마한테 특별히 부탁받은 레이튼 경.”

아..! 어쩐지 리일을 거침없이 때리더라.

“그땐 맨날 욱하고 대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덕분에 사람 됐지...”

그래서 착해진 거구나. 다만 황제가 화를 안 내니 제 아빠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을 뿐...

근데 이렇게 제멋대로 버릇없이 구는데, 황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리일은 대체 누굴 닮아 저렇게 자유로운 영혼인 거지? 애가 착하긴 한데... 에휴...

“아무튼 뭐 그래. 말썽꾸러기였던 나와 달리, 누나는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는데다가 말 잘 듣고 착한 아이였어. 그러니 당연히 이렇게 된 거지.”

아하, 진즉부터 황위는 황녀꺼였구나? 혹시라도 나 때문에 포기한 건가 해서 마음이 무거웠었는데 다행이다. 하긴, 내가 봐도 황녀는 진짜 성실하고 얌전한 착한 딸이었다.

그리고 이 사연을 알게 되니 그간의 일들이 대충 이해가 갔다.

그래서 내 사건 때, 황녀 전하가 나서서 내 일을 처리해 줄 만큼 재량권이 있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권한이고, 나쁘게 말하면 엔릴이 친 사고 뒷수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고 보면 엔릴만 팽팽 노는 거지, 황제와 공동통치자인 황후, 후계자인 황녀 이 셋은 매일같이 바빠 보였다.

“리일은 부모님께 참 감사해야겠어요. 황자로 태어나게 해줬지, 하고 싶은 대로 다 살게 해 줬지, 진짜 출생또로 대박이네요.”

“또로?”

“잘 태어났다고요! 그러니 있을 때 잘 해요!”

난 잘 해드릴 부모님도 없다고...

“물론이지. 나도 늘 감사해하고 있어. 부모님께도, 누나에게도 늘. 누나가 나대신 부담을 다 떠안아 주었기에 내가 그만큼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거니까. 그러니까 황위는 누나 꺼야.”

“네?”

난 정말 깜짝 놀랐다.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그가 이런 중차대한 얘기까지 나에게 털어놓을 줄 몰랐다.

“놀랐어? 리엘에게만 말해주는 거니까 비밀 꼭 지켜야 해!?”

“네... 사실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눈치 채고 있었구나? 사실 전부터 말하고 싶었어. 네가 황태자비의 자리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가족끼리만 합의한 사항이지, 아직 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일이라 말하기가 쉽지 않았거든.”

“...고마워요. 절 믿고 말해 주셔서...”

“그러니 리엘은 아무 부담 없이 내 옆에 있어도 돼. 나랑 그냥 즐겁게만 지내자.”

“........정말 그래도 되요? 제가 이런 행운을 누려도 되는지 문득문득 두려워져요.”

“두렵긴 왜...?”

“그냥, 꿈은 아닌지 싶어서요...”

“꿈 아니야, 왜 이렇게 못 믿어?”

그야, 너무 잘해주니까... 너무 말도 안 되게 행복하니까...

리일은 내가 무언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내색을 조금만 해도, 귀신 같이 알아채고는 산더미처럼 갖다 바쳤다.

여자는 다들 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지, 아침에 눈을 뜨면 테이블 위 꽃병에 매번 싱싱한 꽃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바구니에는 딸기가 산더미처럼 놓여 있었다. 맛있다고 딱 한 번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또 언제든지 무카를 마실 수 있도록, 원두와 티세트를 완벽히 구비해 아예 방에 놓아주기도 했다.

비올레티의 드레스 사건도 마음에 걸렸는지, 산더미같이 많은 드레스들을 끊임없이 보내오곤 했다. 거기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소품들은 당연히 기본 옵션이었고.

뿐만 아니라 내가 마법에 관심을 보이자 희귀한 마법서적을 있는 대로 찾아 바치고, 마법연습으로 피곤해 하니 두뇌 회복에 좋다는 온갖 약들도 구해왔다. 자기야말로 힘들어서 몸도 잘 못 가누면서 말이다.

미처 다 기억나지도 않지만,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온갖 비싸고 좋은 것들을 주야장창 보냈다. 난 이제 뭔가 좋아한다는 내색을 하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리일은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순수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밀당 따위 모르는 그는, 나를 좋아한다는 걸, 잘해주고 싶다는 걸 조금도 감추지 않고 오롯이 내보였다.

하지만 너무 미안했다. 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직 받고 또 받고 끝없이 받고만 있었다.

그런데 이걸 거절하는 건 더욱 미안한 짓이었다. 그가 얼마나 섭섭해 할지 알기 때문이었다.

“못 믿는 게 아니에요. 그냥 꿈처럼 행복해서요...”

“더 잘해주고 싶은데, 아쉽게도 아직은 비밀이니 못 하는 게 많네.”

“이미 충분하다니까요.”

“하지만... 다음 주에 있을 여우사냥에서, 리엘을 귀빈석에 앉히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워서 그래.”

겨울이라 여우사냥이 열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공개석상이니 난 당연히 나설 수가 없다.

요즘 내가 더 이상 전면에 등장하지 않자, 무도회의 해프닝은 그날 하루의 변덕쯤으로 여겨지는 듯한 분위기였다. 셀리나 공주 역시 꽤 안도하는 눈치라고 들었다.

“전 정말 괜찮아요. 그래도 시녀로 동행할 테니 얼굴은 볼 수 있잖아요. ”

“그래도... 시녀 말고 내 옆자리에 딱 앉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죠. 제 걱정 말고 여우나 많이많이 잡아오세요.”

“알았어! 새하얀 놈으로 잡아서 목도리 만들어 줄게!!”

***

시간을 빠르게 흘러, 어느새 여우사냥의 날이 되었다.

지난 봄 축제의 사냥대회 때와는 전혀 다르게, 난 더 이상 시트를 나르며 끙끙거리고 노동하지 않아도 됐다.

대신 오늘 하루만 황녀의 전담시녀가 되었다. 셀리나 공주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일부러 리일의 전담시녀가 아닌 황녀의 전담시녀로서 나타난 것이었다.

하지만 황족들은 어차피 다 모여 있으니, 누구의 전담시녀로 설정해 두든 리일 옆에 붙어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리일과 황녀의 옆에 딱 붙어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황제와 황후와도 함께 있다는 뜻이다. 즉, 난 불편해 죽을 것 같았다.

으... 긴장된다. 황후폐하가 나 싫어하면 어쩌지... 원래 아들을 주기 싫어하는 마음은 아빠보단 엄마 쪽이잖아. 저 천사같이 상냥한 분이 나를 미워할 거라 상상하니, 생각만 해도 마음이 쓰렸다.

그래 쫄지 말자. 엄빠는 일심동체라는 리일의 말을 믿자!!

그런데 나 리일의 일로 황후에게도 불려간 적 있지 않던가? 아닌가? 꿈이었나? 이놈의 기억경계장애... 내가 붙인 이름이지만 정말 그럴싸한 증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꿈에서 셀리나 공주랑 한 판 뜬 적도 있었는데... 꿈 맞지?

난 맛이 가려는 머리를 흔들며 공주 쪽을 보았다. 매우 다행히도 공주의 자리는 조금 떨어져, 저 쪽 귀족들의 천막 쪽에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황족들의 천막과는 아예 별도였다.

흘끗 본 공주의 표정은 역시나 똥 씹은 표정이었다. 쌤통이다!

그런데 그 똥 같은 표정의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젠장. 저리 가! 똥덩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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