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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56화 (56/134)

56. 사냥(1)

2017.02.09.

“두 분 폐하를 뵈옵니다. 그리고 황자 전하, 황녀전하를 뵈옵니다.”

공주는 얼굴표정을 샥 바꾸더니 가식을 떨며 인사를 했다.

“셀리나 공주...”

“황후폐하, 이토록 성대한 여우사냥이라니... 미천한 이 몸은 제국의 위엄을 다시 한 번 느꼈사옵니다.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영광이옵니다.”

“고맙구나. 공주도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려무나.”

황제는 본 척도 안 했고, 황후만 마지못해 적당히 대답해 주었다. 그 불편한 분위기를 모르는 건지, 공주는 의기양양해서는 물러났다.

“비키지 못하겠느냐!”

물론 가는 길에 날 밀친 건 기본 옵션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주 저하”

으이그 저 바보 공주. 그래봤자 네 점수만 깎아먹을 뿐이라는 걸 왜 모르는지...

그런데 공주년한테는 대체 언제 복수할 수 있을까? 내가 받은 거 다 돌려줘야 하는데... 음, 일단 리일과 결혼부터 하고...

물론 그 자체가 복수겠지만, 그거로는 부족하지. 일단 공주보다 높은 지위를 차지한 다음에...

뿌우우우우

여우사냥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에, 내 머릿속 세계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아차, 지금 리일과 그 가족들을 옆에 두고 내가 무슨 계략을 꾸미고 있담?

뿔피리가 멈추자, 황제의 짧은 축사와 함께 곧 대회가 시작되었다. 사냥에 쓰일 폭스하운드가 하인들의 손에 준비되어 나왔다.

여우사냥은 사냥개를 풀어 여우를 쫓게 한 후, 말을 탄 채로 개를 몰아 여우를 잡아 죽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남성들 뿐 아니라 여성들 역시 참가하는데, 여성들은 주로 여우가 죽은 것을 찾아내어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 중 가장 먼저 여우가 죽은 것을 확인한 여성이 승자로서 상을 받게 되는 식이었다.

그렇기에 구멍 구석구석에 숨은 여우를 찾아내기 위해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곤 한다.

첫 번째 몰이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은 상을 받을 레이디를 가리기 위해 자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황녀는 관심 없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내황자도 아직 어려서 참가하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는 황제도 마찬가지였고, 황제가 안 가니 황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오직 리일만 신났다. 그리고 공주 역시 존재감을 알리고 싶었는지 열심히 리일을 쫓아갔다.

뛰쳐나가는 리일의 뒷모습을 보면서 난 와인과 다과를 준비했다. 그리고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얌전히 시립해 있었다.

으... 보통 막장 드라마에서 보면, 아들이 자리를 비운 새에 며느리감을 구박하던데... 막장 드라마가 뭔지는 기억 안 나도, 나랑 비슷한 상황이 전생에서도 많았던 모양이었다.

이런 생각이 떠올라 왠지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황제 일가는 리일을 구경하며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느라 바빴다. 다행이긴 했는데, 왠지 모를 소외감이 들었다.

헛, 내가 무슨! 소외감이라니! 시월드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는 건 또 처음이네!

그냥 방청객 모드로 귀나 쫑긋 기울이자.

“엘, 리일이 요즘 검술훈련에 그렇게 열심이라면서요?”

“그렇다고 합니다. 녀석도 이제 철이 들었나 봅니다.”

“한시름 놓았네요. 제 앞가림은 해야 품에서 떠나보내도 걱정이 없을 텐데 말이에요.”

음... 저 ‘엘’이라는 게 리일이 말한 황제의 애칭인가? 안 어울릴 정도로 귀여운 애칭인데? 그럼 황후의 애칭은 뭐지? 그나저나 황제님 말투 참 특이하네. 딱딱한데 묘하게 정중한 것이...

“어마마마, 걱정 마세요. 예전의 엔릴이 아니더라고요.”

“아나이스, 정말이니?”

“네. 무려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더라고요.”

“후훗.”

우와... 이 사람들 나랑 생각이 똑같아! 사람 생각은 원래 다 비슷한가봐!

“아무튼 저흰 이제 다 컸으니, 이제 로렌만 신경 쓰시면 돼요.”

“아니, 둘 다 아직 애다.”

리일이 왜 이렇게 철없나 했더니, 다 큰 아들놈을 황제가 아직도 애 취급하고 있나 보군... 성년 지난 지 일 년이나 됐는데 애는 무슨 애!

이 세계 평균 수명을 생각해 보면 인생의 1/3도 넘게 살았어! 전생으로 치면 서른이다!

황후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엘... 리일과 나나의 나이가, 제가 저 아이들을 낳았을 때의 나이보다 많은 걸요?”

“........그땐 옛날입니다.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어쨌든 아직 어린 애들입니다.”

꽁냥꽁냥 사이좋네... 근데 내 눈엔 지금도 옛날이거든요...?

그렇게 가차 없이 평가를 내린 난, 황녀의 잔이 빈 것을 보고 와인을 채워주려 다가갔다. 그런데 황녀가 나를 살짝 돌아보며 속삭였다.

“리엘. 혼자 심심하지...? 아까 엔릴이 널 부탁하고 갔어. 셀리나 공주 눈에 띄게 하지 말아달라고...”

그러자 난 갑자기 무대 위로 끌려나온 방청객이 된 기분이었다. 에잇, 나 방청객 역할에만 충실하려 했는데..!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담소 나누세요! 다과도 더 드릴까요?”

얼른 주의를 돌리려 했지만, 우리의 대화소리에 황제와 황후는 이미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으악, 착하신 황녀님. 왜 어그로 끄세요... 소외감 든다고 0.1초 생각했던 거 이미 취소했다고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막내황자까지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조용해서 있는 줄도 몰랐는데, 뭘 먹느라 말이 없던 모양이었다.

“어! 그 누나다! 조카 만들어 줄 누나!”

야!!! 역시 애들은 먹을 때랑 잘 때만 입을 다무는구나. 그냥 먹어, 더 먹어!

난 차마 말로 내뱉지 못할 의사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막내 황자의 앞에 쿠키를 잔뜩 밀어놓았다.

“리엘이구나. 그런데...”

최종보스 황후가 드디어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긴장으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다행히 그 순간,

뿌우우 뿌우우!

처음으로 잡은 여우를 발견했다는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숲 쪽을 보니 귀족들이 대거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맨 앞에 선 여자가 아마도 우승자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로는 어쩌고 레이디라는데, 난 당연히 모르는 얼굴이었다.

황제는 엄청 귀찮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내키진 않지만 치하를 하려면 뭐라도 말을 해야 할 테니 어쩔 수 없는 듯 했다.

대충 형식적인 말이 오갔고, 첫 번째 몰이는 그렇게 끝났다. 이제는 숲 깊이 들어가, 각자 마음껏 여우를 잡아오면 된다.

자리로 돌아온 리일은, 셀리나 공주가 돌아오기 전에 나를 재빨리 잡아끌었다.

“리엘, 같이 안쪽으로 들어가자. 얼른”

“자, 잠깐만요..!!”

내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리일은, 공주의 눈을 피해 후다닥 나를 말에 태웠다.

“저 다녀올게요!”

“리일, 몸조심하렴!”

황후의 외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순식간에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달리고서야 리일은 말을 멈추었다. 허리에 딱 달라붙어오느라 힘들었던 난, 뒤통수를 후려갈겨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리일!”

“휴우,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네.”

“놀랐잖아요!”

“미안,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 징글맞은 공주 같으니라고...”

“완전히 따돌린 거 맞아요?”

“응. 주변에 아무도 없잖아.”

숲 속의 풍경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꽤 깊이 들어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음이 편해진 우리는, 느긋하게 말을 타고 숲을 거닐었다.

“아... 좋네요. 말을 타고 달려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러고 보니 승마... 그놈의 승마! 내 금수저를 빼앗고 바닥으로 떨어지게 만든 원흉이었어! 이 말이 무슨 죄가 있겠냐만은, 괜히 빡치네?

“리엘? 갑자기 왜 말을 쿡쿡 찔러?”

“아, 아니에요. 하하하....”

말에서 내린 우린 여우사냥 따위는 이미 옛적에 집어던지고 그냥 노닥거렸다.

어차피 너무 깊이 들어와서인지 사냥개도 안 보였다. 오늘 사냥은 화살이 날아다니는 사냥이 아니었기에, 뒤통수에 구멍 날 일도 없었다.

난 피크닉 나온 기분으로 나무 등걸에 걸터앉았다. 옆에는 리일이 바싹 붙어 앉았다.

“리엘...”

혈기왕성한 나이답게 리일은 또 분위기를 진득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흐음... 근데 난 밖에서 하는 건 별로 취향이 아닌데...

머리로는 이딴 생각을 하면서도, 난 리일의 입술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츠읍..

쪽..

츄릅

우와 소리 진짜 야하다. 좀 아쉽긴 하지만, 아직은 설왕설래만으로도 좋을 때지...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리일은 역시나 피 끓는 어린이(?)였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숲속에서, 우리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기 시작했다.

“아흣... 리일... 거긴...”

“리엘... 정말 좋아...”

“으응...”

누가 올까봐 신경 쓰이니 은근히 긴장되면서 더 흥분되는데? 음헤헤헤...

부스럭

헉..!?

“리, 리일 잠깐만요!!”

좀 전에 무슨 소리가 났는데? 누가 볼까봐 쫄깃한 느낌이 필요한 거지, 정말 누가 보는 건 싫다고!

리일도 들었는지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확 일으켰다.

“누구냐!”

“..............”

지나가던 다람쥐인가?

“거기 누가 있는가?”

“.............”

“리일, 잘못 들어나 봐요.”

막 안심하고 다시 몰입하려는데, 수풀 너머에서 누군가 주뼛거리며 나타났다.

“........저, 전하,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기척이 느껴져 여우인 줄 알고 와봤더니...”

“....딜런 경?”

딜런이라면, 그 때 검술대회에 나에게 꽃을 바쳤던?

“어...? 아, 안녕하세요.”

아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다. 다행히 우린 아직 옷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라 별 민망함 없이 인사할 수 있었다.

“레이디,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딜런 경은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 별것도 아닌 접촉에 리일은 질투가 났는지, 가시 돋친 한 마디를 던졌다.

“경, 내 경에게 장갑을 던지고 싶지는 않네만.”

.........얘 왜 이래. 그냥 인사한 거잖아. 손등 키스는 인사잖아!!

리일의 협박에 딜런 경은 재빨리 내 손을 내려놓았다.

“너, 너무 깊이 들어와 막 돌아가려는 길이었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리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리일...”

“리엘, 안 되겠다. 더 깊이 들어가자!”

더 깊이 가서 무슨 짓 하려고 흐흐흐... 난 리일의 말에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달렸다. 아직도 숲이 안 끝났나 싶을 정도로 멀리 와 버렸다.

“이렇게 멀리 와도 돼요? 돌아갈 때 헤매지 않겠어요?”

“괜찮아, 나 길 잘 찾아. 그리고 이 숲은 어릴 때부터 자주 놀러오던 곳이라 훤해! 아바마마가 말에 태워서 자주 데려오셨거든”

“그렇군요. 정말 즐거웠겠어요. 진짜 부럽다...”

“으응? 부러울 만한 건가? 뭐 우리도 이렇게 같이 왔잖아. 리엘이랑 오니 더 좋은데?”

“후후 저도 좋아요. 근데 리일, 저 목이 말라요.”

“잠깐만, 근처에 물이 흐를 거야. 수통을 채워 올게.”

난 리일을 보내고 혼자 풀밭에 앉아 기다렸다. 냇가는 꽤 멀리 있는지 리일은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한적하고 좋네...”

새 지저귀는 소리도 좋고, 살짝 들려오는 곤충소리도 좋고... 햇빛이 나뭇가지에 부딪쳐 흔들흔들 어른거리는 모습도 참 아름다웠다.

근데 이러다 여우사냥이 다 끝날 것 같은데... 안 돌아가 봐도 되나? 지금 몇 시쯤이지?

난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그림자를 확인해 보려 했다. 내 그림자를 보려 뒤를 흘긋 돌아보는 순간,

무언가 내 귀를 따끔 스치고 지나갔다.

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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