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사냥(3)
2017.02.11.
“..........”
하지만 아무 느낌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눈을 떠 볼 용기는 없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빛이 몇 번 더 번뜩이는 것 같았지만, 여전히 아무 느낌 없었다.
“크헉..!”
오히려 적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뭐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조심스레 눈을 떠 보았다.
“...........!!”
“끄으으으...”
조금 전까지 나를 위협하던 자들이 죽어 있었다. 뒤통수에 단검이 하나씩 꽂힌 채, 비명도 없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딱 한 명만 죽지 않고 괴롭게 신음하고 있었다.
“리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쓰러진 리일을 치료하기 위해 다급히 등을 돌렸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다가가는 누군가가 있었다.
“엔릴!!”
말을 탄 채 쏜살같이 다가와 구르듯 내려선 인영은, 리일을 안아들고 다급히 불렀다.
......황제...폐하? 황제가 직접 구하러 오다니...!
그 빛은 그럼...?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어떻게 단검이 날아온 건가 싶었는데 황제였구나! 리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이라는...
“아!”
황제의 등장에 잠시 당황했으나, 일단 리일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난 치렁치렁한 치마자락을 북 찢어서 그에게 다가가 앉았다.
그런데 그 순간,
피융!
화살이 날아들자 아차 싶었다. 아직 멀리 어딘가에 궁수가 있는데...! 황제의 등장으로 잠시 당황했던 적들이 다시금 공격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내가 리일과 딱 붙어 있었기에, 화살은 쓰러진 그에게도 날아왔다. 난 다급히 리일의 몸을 가렸다.
“아직 궁수가 남아있어요!”
멀어서 황제를 못 알아보는 건지, 궁수들은 그의 존재에 아랑곳 않고 나에게 화살을 날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황제 역시 몸으로 리일을 보호하면서 검을 들어 화살을 쳐냈다.
핑!
피융!
피잉!
피융!
하지만 궁수는 두 명 이상인지, 검을 휘두르기에 아주 애매한 타이밍으로 연달아 화살을 날렸다. 게다가 내가 바닥에 쓰러진 리일을 감싸고 있으니 화살이 자꾸 아래쪽으로 날아왔다. 검을 휘둘러 쳐 내기에 애매한 각도였다.
아무리 몸으로 막아도, 바닥에 축 쳐져 무방비로 노출된 리일의 몸은 너무 커다랬다. 여기저기 빈틈이 많았다. 어떻게든 마법이라도 써 보려 했으나, 뇌가 너무 지쳐서인지 전혀 쓸 수가 없었다.
피잉! 푹!
“흡...“
황제의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의 정강이에 정통으로 화살이 박혀 있었다. 미처 쳐내지 못한 화살을 몸으로 막은 모양이었다.
안 돼... 이러다 리일이 죽겠어...! 어찌해야 할지 우왕좌왕 하는 내 귀에,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다그닥 두두두두
다행히 황제가 왔던 방향에서 일단의 기사 무리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피융!
핑!!
하지만 그들이 오기도 전에 리일이 화살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어쩌지..... 아..!!
막으려 들 게 아니라, 내가 멀리 떨어지면 되잖아...!! 나 때문이니까... 내가 표적이니 나만 멀어지면 리일에게 화살이 꽂히진 않을 거야...
결심을 마친 난 재빨리 몸을 날려 모두에게서 멀어졌다.
푹!
아니나 다를까. 바로 어깨에 화살이 꽂히는 걸 느끼며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멀리서 병사들이 리일과 황제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
“으으...”
..........여긴....?
시야가 흐릿했다. 뻑뻑한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몇 번 눈을 깜빡였더니 익숙한 방의 모습이 보였다. 내 침실이었다.
살아있는 걸 보니 무사히 구조된 모양이었다.
“아! 리일은!!? 아악!”
몸을 벌떡 일으키려다 다시 기절할 뻔 했다. 아.. 나 다쳤지. 팔뚝과 어깨에 화살 한 방씩, 그리고 검상은 세어보고 싶지도 않네.
그래도 누군가 치료해 준 건지 몸 곳곳에는 깨끗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휴...”
진통제 대용으로 마나를 내 몸에 스스로 부었다. 눈곱만큼 살만 해 지자, 억지로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리일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으으...”
힘겹게 걸어가 문을 열자, 문 앞에 서 있는 기사 두 명이 보였다.
“.....? 저기...”
뭐지? 웬 기사? 감금일까, 호위일까? 아니면 둘 다?
“방 안에 계십시오. 문 앞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개미만한 내 목소리에, 기사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저... 황자 전하는 무사하신가요?”
내 물음에 기사들은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 명이 쏜살같이 어디론가 가 버렸다. 내가 깨어났다고 보고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들어가 있으십시오.”
“네.”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다. 리일의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무사한 듯 했다.
그런데 왜 나 감옥에 있지 않지...? 리일은 그렇다 치고, 나 때문에 황제가 다쳤는데...
“하아...“
생각만 해도 앞으로의 내 미래가 깜깜했다.
리일을 만나보는 건 생각보다 쉽게 이루어졌다. 잠시 대기하고 있었더니 곧바로 그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기절한 이후의 일은 가는 길에 대충 전해 들었다.
사냥이 다 끝났는데도 엔릴이 돌아오지 않자, 황제는 이유 모를 불안함에 대대적인 수색을 지시했다고 한다.
엔릴을 발견하면 신호를 보내기로 하고, 모든 병력이 뿔뿔이 흩어져 드넓은 황궁부지를 샅샅이 뒤졌다.
황제 또한 직접 찾으러 나섰다. 그를 따라야 하는 호위들마저 엔릴을 찾으라며 보내버리고는 미친 듯이 숲을 뒤졌다. 그 덕분인지 엔릴은 기적처럼 황제에게 가장 먼저 발견되었다.
그 다음은 나도 함께 겪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화살을 맞고 기절한 내 숨통을 궁수들이 마저 끊어놓으려던 찰나에, 수색하던 기사들이 합류해 적들을 발견해 사로잡았다.
그렇게 무사히 구조되었고, 이 일로 황궁은 난리가 났었다. 당연히 배후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조사가 있었을 테고...
조사 내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일의 파장이 엄청날 거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
“들어가 보게”
“네. 감사합니다.”
똑똑똑, 달칵
“리일!!”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아직 깨어나지 못한 채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리일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파리해진 안색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리일.. 리일 미안해요. 나 때문에... 흐흑... 나 때문에 이렇게 다치고... 흐어엉....”
의식도 없이 창백한 리일의 뺨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 같은 거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왜 그랬어요... 왜... 흐윽... 흑흑...”
“나 때문에 리일이 죽을까봐... 으흑.. 흑흑...”
한참을 흐느껴 울던 그녀의 귓가에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 하니 마음 놓아도 된다는구나.”
“.....화,화,황후 폐하..!! 죄, 죄송합니다... 계신 줄도 모르고..!”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침대 맡에 누군가가 앉아있는 모습이 얼핏 보였던 것도 같았다. 정신이 오직 리일에게 쏠린 탓에 뒷모습만 보고 대충 시녀이려니 했는데, 지금 보니 황후였다.
저 반짝이는 은발의 뒷통수를 보고도 어째서 여태 눈치 못 챘는지 한심할 지경이었다.
“황후 폐하. 죽여주십시오. 제가 감히.. 저 때문에...”
“.......”
“저 때문에 황자 전하께서 위험해 지셨고, 황제 폐하께서 다치셨습니다. 정말이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환생으로 인해 이 시대사람 답지 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는 스스로 매우 잘 알았다.
나 때문에 리일이 중상을 입었고, 나를 노린 화살에 황제가 다쳤다. 안 봐도 사형감이었다. 현대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 세계의 기준에선 당연했다.
황제를 노린 화살에 황제가 맞아도, 같이 있던 시녀가 몸 던져 지키지 않았다고 목이 잘려 마땅한 세상이니까.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할 중죄였다. 그저 무릎 꿇고 빌 수박에 없었다.
“후....”
황후는 말없이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사실 곧이곧대로 법을 적용하자면 당연히 지하감옥에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지난번에 아나이스가 살짝 넘어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런데 부상을 입은 여자아이를 어떻게 저 차가운 지하감옥에 가두겠는가. 법과 상관없이 도의적으로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이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죽을 뻔 했을 뿐, 그게 어떻게 죄가 되겠는가...
하지만 그 일에 말려들어 죽을 뻔한 엔릴을 보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게다가 남편까지 부상을 입어 돌아왔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엔릴이 죽어버릴까봐, 밤새 얼마나 울며 마음을 졸였는지... 그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했다.
“폐하.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전하의 곁에서 떠나시길 명하신다면 그 또한 당장 따르겠습니다.”
“그건... 나중에 황제 폐하와 함께 상의해 봐야겠구나. 일단 리일이 깨어나기를 기다리자꾸나.”
엔릴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금, 황후는 아무 생각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황후가 자신을 거리껴 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차마 리일을 두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리엘은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억지로 버티며 마나를 연거푸 끌어내 리일에게 부어 주었다.
화악!
“리일, 미안해요. 나 때문에... 정말 미안해요.”
화악!
“무사히 눈을 떠야 하는데...”
환한 마나의 빛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본인도 다 죽어갈 것 같은 몰골로 엔릴에게 끝없이 마나를 쏟아주는 모습이 어쩐지 애처로워, 황후는 자기도 모르게 만류했다.
“네 상태도 말이 아닌 것 같구나. 그만 방으로 돌아가렴.”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전하를 두고 혼자 편히 쉬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해 주세요.”
“그 정도는 나도 해 줄 수 있고, 황궁에는 뛰어난 힐러들이 많으니 괜찮다.”
“......폐하, 제발...”
“휴...”
“죄송합니다. 심기를 상하게 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전 그저...”
“아니다. 아무튼 돌아가 있으려무나. 나중에 황제 폐하께서 오시면...”
벌컥
“디트, 엔릴은 좀 어떻습니까.”
타이밍 좋게 황제가 등장했다. 들어오자마자 황제는 엔릴의 안부부터 물었다.
“위험한 고비는 넘겼어요. 하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밤새 곁을 지키고 있던 건가요? 안색이 말이 아닙니다. 이젠 제가 있을 테니 가서 조금 쉬어요.”
“괜찮아요. 그보다 엘...”
황후의 고개가 돌아감에 따라, 황제 역시 바닥에 꿇어 앉아있던 리엘을 바라보았다.
“이 시녀는...? 그 아이군요.”
황후는 말없이 끄덕거렸다.
“폐하.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저로 인해 황제 폐하의 존체에 상처를 입히게 했습니다. 감히 폐하와 황자 전하를 다치게 한 죄, 어떤 벌이라도 받겠습니다.”
“.........”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황제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