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사냥(4)
2017.02.13.
“나는...”
하지만 너무 많은 생각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말이 쉽사리 나오질 않았다.
사실 제 몸의 부상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엔릴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자, 오랜만에 이성이 증발하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이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만큼 사랑스러운, 자신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내 아이가 다른 사람의 일에 말려들어 다친다는 게...’
그게 이렇게 속상한 일인 줄 미처 몰랐는데, 참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엄밀히 말하면 엔릴의 일로 인해 리엘이 위험해졌고, 리엘을 노린 암살자들 때문에 인해 다시 엔릴이 다친 것이었지만, 그래도 영 착잡했다.
“후.....”
깊은 한숨과 함께,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자신 때문에 수도 없이 황후가 다칠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지...
매번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었다. 심지어 황후는, 아들과 달리 여리디 여린 레이디였다.
선뜻 말을 잇지 못하는 황제의 모습에, 리엘은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감히 저 같은 것이 전하의 곁에 있어서... 차라리 지하 감옥에 투옥시켜 벌을 주시옵소서.”
잘못을 비는 리엘의 모습에, 황제는 예전의 자신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라고는 성별과 신분 정도였다.
그렇기에 자신 역시 남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이 아이가 잘못이 없다는 것도, 엔릴을 살리려고 제 목숨을 포기하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러나이트이기에 청각이 유난히 밝은 황제는 멀리서 달려오면서도 리엘이 한 말을 다 들었다.
덕분에 상황의 급박함을 알 수 있었고, 곧바로 오러가 맺힌 단검을 던져 적들을 없앴던 것이었다.
그 후 화살비가 내릴 때도, 리엘은 일부러 자신의 보호를 벗어나 멀리 떨어지려 했다. 그것도 전부 엔릴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왜 모르겠는가.
그래도 부모 마음이라는 게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솔직히 말해 정말 마음이 안 좋았다.
"이번 일은 정말 유감이구나..."
그 말에 리엘이 몸을 움찔 떨었다. 벌을 내려달라 청하긴 했지만, 이어질 말이 너무 두려웠다.
지하 감옥이라니...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생생히 떠올랐다.
“나는... 엔릴이 다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한참 고뇌를 마친 황제는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입이 백 개라도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엔릴의 일에 엮여 위험해 진건 오히려 리엘이라는 걸, 황제 또한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황족의 신분도 부모로서의 마음도 다 떼고 보면 사실 엔릴의 잘못이 컸다. 위험한 상황을 알면서도 그렇게 깊숙이 들어가다니...
젊은 혈기에 단 둘이 있고 싶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이야...
‘만약 배후가 엔릴파 귀족이라면, 엔릴의 옆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거슬리는 리엘을 죽이려 든 것이겠지...’
혹은 셀리나 공주가 사주했거나, 양쪽이 서로 손을 잡은 것일 수도 있고...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누군가 엔릴을 차지하기 위해 리엘을 제거하려 한 일이었다.
이튼도 짐작한 걸 황제가 모를 리 없었으니, 그 역시 어느 정도 우려하고 있던 바였다. 그리고 엔릴 역시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리엘과 밖으로 나갈 때 투덜거리면서도 임페리얼 가드를 꼬박꼬박 동행하고 다녔다. 아니면 아예 안전한 궁 안에서만 머물거나.
소궁에 가서 데이트 하자고 했던 것도, 엔릴이 그저 머리가 텅 비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 곳이 안전한 장소였기에 제안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바깥도 아니고, 보안이 철저한 황궁부지에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게 불찰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엔릴이 늦자 황제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곧바로 눈치 채고 즉시 찾아 나섰다.
다행히 도중에 엔릴을 마주쳤다는 기사를 발견한 덕에 늦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던 게 천운이었다.
다시 한 번 엔릴의 무사함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황제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 당분간 거리를 두어라.”
복합적인 뜻이 함축되어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황제의 속내를 다 알 수 없는 리엘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네, 폐하."
“곧 조사가 있을 것이다.”
그날 리엘이 입었던 옷에 추적기가 붙어있는 게 발견되었다.
마도구의 일종으로, 한 쌍으로 제작된 탐지기를 사용하면 찾고자 하는 대상의 위치와 방향에 따라 빛을 내는 아이템이었다.
그걸 누가 언제 어떻게 붙였는지를 알려면 리엘의 증언을 들어봐야 했다.
“네....”
하지만 리엘은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지라, 조사라는 말에 겁부터 덜컥 났다. 또 심문, 아니 고문당할까 싶어 두려웠다.
“그럼 돌아가 있거라. 나중에 사람을 시켜 부르겠다.”
“네, 폐하.”
자신의 생각만으로도 벅찼던 황제는 그런 그녀의 두려움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세한 설명 없이 일단 돌려보냈다.
***
배후를 캐기 위한 조사가 쉬지 않고 진행되었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물론 사주한 배후나 암살 동기 등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엔릴파 귀족 혹은 셀리나 공주일 게 뻔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증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엘, 뭐 나온 것 있나요?”
황제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침입 루트를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살해된 채 발견된 숲지기 때문에 별로 캐낸 게 없습니다.”
“암살자들은요 ?”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실행도구일 뿐,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심문해도 사주한 귀족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던군요.”
마법도 고문도 전혀 소용없을 정도면, 보나마나 정말 아는 게 없을 것이었다.
“휴우...”
“일단 정황상 정규 기사나 용병이 아닌 암살길드 소속이라는 걸 짐작할 뿐입니다. 귀족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황궁 부지에 침입하는 건 대역죄에 자신의 휘하 기사를 연루시킬 리 없으니까요.”
일이 잘못되면 의뢰 내역이 역추적 당하는 용병길드 역시 마찬가지. 그러니 남는 건 철저히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암살길드밖에 없었다.
“네.”
하지만 문제는 어느 집단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걸 알아내면 통째로 탈탈 털어보기라도 할 텐데, 조직 특성상 말단 실행책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이 참에 암살길드 전체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맨 위 길드장을 털어보면 뭐라도 나오겠지요.”
“그래야지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요.”
감히 황족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타깃으로 삼은 게 아니더라도 털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면 어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어야 했다.
“물론입니다. 진즉에 없앴어야 하는 것을... 예전에 약물조제 길드를 그리했듯이 말입니다.”
십여 년 전, 황제의 결혼식에서 일어났던 살해미수 사건으로 당시 약물조제 길드가 공중분해 된 적이 있었다.
그 후 모든 종류의 약품과 독극물들은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도록 바뀌었고, 덕분에 그라츠 제국에서 독은 어설프게 직접 만들거나 외국에서 입수하지 않는 한 결코 쉽게 구할 수 없는 품목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엔릴과 리엘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만약 검에 독이 발라져 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니까.
“휴우... 어서 밝혀지길 바랄게요.”
아무튼 그런 이유로 결국 불똥은 암살길드 전체에 튀었고, 진노한 황제는 본보기 삼아 암살길드를 해체하다 시피 대대적으로 뒤집어엎었다. 하지만 아무리 길드장이라도 모든 집단의 의뢰내용을 전부 알 수는 없는 노릇으로, 수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오리무중인 사건에 황제의 분노는 더더욱 커져 버렸고, 살벌했던 옛 성격이 오랜만에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귀족들은 과거의 피바람을 떠올리며 모두 몸을 웅크리기에 바빴다.
***
똑똑
“리엘 양.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으니 조사에 협조에 주길 바랍니다.”
"네? 네..."
드디어 올 것이 온 모양이었다.
감옥으로 끌려가기는커녕 아무 제제 없이 방에서 지내도록 선처 받은 상태였지만, 조사라는 단어에 겁부터 덜컥 났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자꾸만 예전에 고문당할 뻔 했던 일이 오버랩 되었다.
하지만 방문한 조사관들은 정중히 몇 가지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정말이지 다행이다 싶었다.
“습격이 있던 날, 누군가 수상한 자의 접근은 없었습니까?”
“네? 수상한 사람이요...?”
“리엘양이 입고 있던 옷에서 마법아이템인 추적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네?”
“습격을 준비한 자들이 리엘양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붙여놓았을 겁니다. 무언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습니까?”
“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음... 그날 내가 누구누구를 만났더라? 설마 딜런 경? 아냐, 그때는 이미 한참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어. 어떻게 거기서 우연히 날 찾아 추적기를 붙였겠어?
그래도 혹시 싶어서 그를 언급하긴 했다. 정말 아무 상관없다면 마법심문으로 별 일 없이 밝혀질 테니...
“또 집히는 곳은 없습니까?”
“음...”
또... 아!
한참 기억을 더듬은 끝에, 간신히 무언가를 떠올렸다.
“저... 수상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그런데 이걸 말해도 될지...”
공주를 의심한다니, 리테인이었다면 불경죄로 당장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겠지만 여기는 다행히 그라츠 제국이었다.
게다가 공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 수 있는 더 대단한 존재들이 줄줄 있는데다가, 그 중 한명이 공주 때문에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네, 말해보십시오.”
“그게... 공주 저하께서 저에게 손을 대신 적이 있어요.”
“셀리나 공주 저하 말입니까?”
“네... 사냥이 시작되기 전, 제 쪽으로 잠시 왔다가 저를 밀치며 돌아갔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그 외에는 짐작 가는 곳이 없습니까?”
“네.. 딱히 없어요.”
이후에도 몇 가지 더 질문이 오갔으나, 그냥 사실 확인 정도의 질문이었기에 성심성의껏 답해줄 수 있었다.
걱정과 달리 아주 무난하게 끝났다.
***
“휴....”
방에서 요양하라며 허락을 받았지만, 의식이 없는 엔릴을 두고 차마 혼자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라리 그를 간호하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기에, 황제와 황후가 정무로 바쁜 시간에는 리엘이 대신 곁을 지키며 돌봤다.
그녀가 하루 종일 들락거리는 동안, 지난 번 파티에서 마주쳤었던 마가렛이라는 영애도 여러 번 왔었다.
마가렛 역시 엔릴에게 상당히 진심인 것인지, 걱정으로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하염없이 울며 리엘에게 원망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갔다.
그런 그녀가 영 불편했지만, 못 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어쩔 수 없이 종종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오늘도 리엘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그에게로 향했다. 벌써 거의 이틀째 한시도 쉬지 않고 꼬박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이 없을 걸 알고는 있지만, 의례적으로 말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방 안의 풍경은 평소와 달랐다. 그를 돌보던 주치의와 힐러, 하녀들이 유난히 다급해 보였다.
'설마...!'
그가 위독해지기라도 한 건가 겁이 덜컥 났다.
"무슨 일인가요?! 리일... 전하께 무슨 일 생긴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