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사냥(6)
2017.02.15.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죠!? 법이 이상해서 그렇지 벌 받을 사람은 따로 있다고요! 그럼 그렇게 넘어가 주실 거죠?”
엔릴은 끝까지 엔릴스럽게 졸라댔다.
“전하... 하지만 그건...”
당황한 리엘이 버벅대며 뭐라 하려는데, 해탈한 듯한 황제의 대답이 곧바로 들려왔다.
“알았다... 그리 하마.”
그리고 뭐라 말할 새도 없이 황제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내 부상은 알려지지 않았으니 그것도 죄를 물을 필요 없겠지.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
“아 맞다! 그 부분을 생각 못했어요!”
누가 봐도 저건 황제의 부상에 대한 걱정을 빼먹어 죄송하다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 문제를 놓친 게 아차 싶었다는 뜻이었다. 리엘 때문에 황제가 다쳤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는데, 왜 그 부분을 해결할 생각을 못했나 하고 말이다.
다행히 황제는 늘 그랬듯이 알아서 해결해 주었다. 없던 일로 덮어주겠다고.
“엔릴......”
황후는 진심으로 한탄했다.
“전하... 제발...! 폐하. 정말이지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번번이...”
리엘은 이제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우....”
황후와 황녀는 이제 나무랄 기력도 잃은 듯 그저 말없이 한숨만 쉬어댔다.
“고맙습니다. 아바마마.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그래... 회의 중에 잠시 나온 거라 다시 가봐야겠구나. 이만 쉬어라.”
아들의 어깨를 다독여준 황제는 피곤한 안색으로 다시 일어났다. 똑바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리엘은 황제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도 못하고 왠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엘은 잘 몰랐지만, 황제의 부상은 고작 개인의 일이 아닌 국가 중대사와 맞물려 돌아가는 사안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국경 부근이 어지러워 전시에 준하는 상황이었기에, 황제는 주변에 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사소한 부상이긴 했지만 괜히 헛소문이 퍼질까 우려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만 아는 상태로 쉬쉬하며 숨겨왔다. 황제 역시 내색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걸어 다녔기에 아무도 몰랐다.
떠나가는 남편의 그런 뒷모습을 보며, 황후는 따끔히 말했다.
“...엔릴. 내색은 안하셨지만 정말 서운하셨을 거야. 다친 데는 괜찮으시냐고 어떻게 한 마디도 묻지를 않니!? 오직 리엘밖에 안 보여?”
“아... 죄송해요. 어마마마. 제가 미처... 정말 죄송해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엔릴은 아차 하며 사과했다. 괜찮으시냐, 많이 안 다치셨냐 한 마디 물어보기는 했어야 하는 건데...
“아무리 너라도 그에게 상처를 주는 건 용서할 수 없구나. 나중에 꼭 찾아뵙고 죄송하다고 말해라.”
“네...”
“아직 피곤할 테니 푹 쉬도록 해라. 나도 이만 가봐야겠구나.”
황후는 복잡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리엘은, 그저 조용히 인사만 올렸다.
***
깨자마자 한바탕 실랑이를 해서 지친 건지, 리일은 다시 곧바로 잠이 들었다.
“으음...?”
그의 곁에서 꾸벅꾸벅 졸던 난, 리일이 일어나 뒤척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밖을 보니 이미 밤이었다.
“리일... 잘 잤어요?”
“리엘, 계속 여기 있던 거야?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편히 누워서 자야지.”
“괜찮아요. 리일에 비하면 가벼운 부상이라 거의 다 나았어요.”
“그래도... 앞으론 여기 있지 말고 방에서 마음 편히 쉬어. 그동안 마음고생 많았을 거 아냐.”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사실 그랬다. 리일에 대한 걱정 뿐 아니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도 도저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믿을 구석이라고는 리일밖에 없는 상황에, 아무런 방패막이 없이 죄인 신세가 되어버렸으니 정말 한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누워도 잠도 잘 안 오고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으니, 차라리 그의 곁에서 간호하고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렇게 마음 졸이던 중에 리일이 깨어나 앞일을 담판지어 주자, 죄송한 마음과는 별개로 눈 녹듯 걱정이 사르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아무 처벌이 없다니, 사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이 세상에서, 무려 황제를 다치게 했는데!
솔직히 전생이라 하더라도, ‘너 같은 년 때문에 내 귀한 아들이!’ 라고 남친 엄마에게 싸대기 정도는 날아올 법 한 일이었다.
그러니 리일이 막아줘서 처형까진 안 당한다 하더라도, 꽤 중한 벌을 받을 거라 각오하고 있었다.
사지 멀쩡히 걸어 나갈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사실까지 바꿔가면서 내 일을 덮어주신다니... 너무나 죄송했고, 정말 감사했다.
“흐흑.. 고마워요... 리일. 정말 고마워요...”
“이제 아무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고마워요... 하지만 리일, 폐하께는 정말 잘못했어요. 꼭 사과드려요.”
내 눈에 비치는 리일은 정말 후레자식이었다. 저렇게 사랑받는데, 어쩜 저리 고마운 줄도 모를까.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그렇겠지?
기댈 부모가 있는 게 너무너무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저러면 안 되는 데 싶었다.
나한테 잘 하는 거 반 만이라도 좀 하지...
그리고 황제의 그 애틋한 모습을 보니, 예전에 출비 어쩌고 했던 게 얼마나 황당한 생각인지 새삼 실소가 나왔다.
게다가 따로 놓고 볼 땐 몰랐는데, 나란히 두고 보니 부자는 꽤 닮아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꼭 사과할게.”
역시나 리일은 유야무야 흐지부지 넘어가려 했다. 나중은 개뿔!
“아뇨, 이런 건 늦어질수록 어색해 지는 법이에요. 지금 얼른 가서 사과드리고 와요.”
“지...지금? 지금 바로?”
“네.”
“지금은 그게...”
“왜요?”
“아니 사실... 지금은 가기에 아직 좀... 그리고 갑자기 그러자니 쑥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긴 뭐가 쑥스러워요!?”
“그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아바마마랑 별로 그런 낯간지러운 얘기를 해본 적이 없는데... 그, 그리고 아바마마도 괜찮다고 하셨잖아!”
“하나도 안 괜찮아요!!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슬프겠어요!?”
강경하게 말한 난 다짜고짜 리일을 침대에서 질질 끌어내려 했다.
“으앗, 리, 리엘... 잠깐만... 그, 그만 당겨... 그리고 옷은 입고 가야지...!”
내 성화에 일어난 리일은 급히 잠옷 위에 외투를 하나 주워 걸쳤다.
“어서요!”
“다..당기지 말고... 앗...! 아니 우리 그러지 말고, 그냥 일단 오랜만에 단 둘이 오붓하게...”
“리일! 지금 그런 말 할 때예요? 어서요! 아, 아얏..!”
그를 끌어당기느라 너무 힘을 주는 바람에, 다친 부위에서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리엘!! 괜찮아?”
나 바보. 아직 안 나았는데... 푹 쉬었으면 모를까 이틀 내내 무리했으니 벌써 완치되었을 리가 없었다.
잠깐, 내가 이럴 정도면...? 리일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다쳤는데?
“으악! 리일, 피, 피 나요!”
아니나 다를까, 내가 막 당겨댄 덕에 상처가 벌어진 건지 붕대에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아... 응. 괜찮아.”
“미안해요. 어떡해... 정말 미안해요! 제가 바보라... 아플 텐데 왜 말을 안 했어요...”
“아냐, 별로 안 아파... 하하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당기지 말아달라고 말했었는데 그래서였구나! 내가 눈치도 없이...
쑥스럽네 어쩌네 하면서 말을 돌리고, 단 둘이 어쩌고 한 것도 다 움직이기 힘들어서 그랬던 거였어.
내가 미안해 할까봐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외투를 급하게 입은 것도 피가 나는 걸 가리려고 그랬던 거고...
그런데 오히려 내 걱정만 하다니...
“정말 죄송해요. 정말 정말... 저 왜 이렇게 바보 같고 철없을까요.”
“정말 괜찮아.”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저 때문에 다친 걸로도 모자라 또...”
리일은 정말 천사인가... 다른 황족이었으면 내 목은 이미 몇 번이나 떨어지고도 모자랐을 텐데... 리일뿐 아니라 가족들 모두 천사인가 봐...
“아냐, 아무튼 리엘 말이 다 맞아. 그럼 일어난 김에 가 보지 뭐.”
하지만 악화된 상처 탓에, 한밤중에 힐러를 부르고 한참 난리를 친 후에야 리일은 겨우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휴... 다행이에요. 진짜 죄송해요...”
“괜찮으니 그만 미안해 해. 리엘이 뽀뽀 한 번만 해 주면 싹 안 아파질 것 같은데...”
“얼마든지요!”
쪽!
쪽쪽쪽!!
나는 미친 듯이 뽀뽀세례를 퍼부어주었다. 역시나 단순한 리일은 금세 헤벌쭉 입이 귀에 걸렸다.
“그럼 얼른 다녀오세요!”
“리엘, 같이 가자.”
“네에? 제가요? 제가 왜요?”
“뭐 그냥... 혼자 가기 민망한데 같이 가주면 안 돼? 음... 그리고... 아! 리엘도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거나... 등등 같이 갈 핑계라면 얼마든지 있잖아?”
그렇기 말하니 거절할 말이 없네...? 그리고 선처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도 하긴 해야 하니까...
“아, 알았어요. 그렇지만 가서 또 제 편만 들어서 속 뒤집어 놓으면 안 돼요! 알았죠!?”
“알았어, 안 그럴게.”
어휴, 내 팔자야. 내가 어쩌다가 오밤중에 황제와 대화하러 찾아가는 처지가 되었는지...
***
“아바마마 안에 계셔?”
“네, 침소에 드셔 계십니다.”
문을 지키는 기사에게 물어본 엔릴은, 시종장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라 명했다.
“아바마마!”
황후는 아직 막내황자의 방에서 돌아오지 않았는지 황제는 혼자였다. 엔릴을 본 황제는 걱정부터 늘어놓았다.
“엔릴...? 다 낫지도 않았을 텐데 돌아다녀도 괜찮은 것이니? 이 밤에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어, 그게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어요. 리, 리엘도 같이 왔어요!”
영 뻘쭘한지 주춤대던 엔릴은, 불쌍한 제물인 리엘을 앞으로 슥 내세웠다.
‘이 망할 황자놈이!!’
하지만 리엘은 잽싸게 한 발 뺐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자 전하께서 폐하께 사과하고 싶으시다 해서 모시고 왔습니다. 두 분 담소 나누시는 동안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재빨리 저 멀리 떨어진 문가에 섰다. 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영락없이 혼자 남게 된 엔릴은 주뼛주뼛 황제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어...음.. 아바마마, 그게 그러니까...”
“.....??”
“다, 다치신 데는 괜찮으세요?”
별 것도 아닌 그 말에 매우 기쁜 듯, 황제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돌았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정말 괜찮으니 염려 말고 네 몸이나 잘 챙기거라.”
“네, 아바마마. 그런데 저...”
막상 말을 하려니 왠지 쑥스러워서 잘 나오질 않았다. 한참 머뭇대던 엔릴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아까는 정말 죄송했어요. 서운... 하셨죠?”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인지, 황제의 얼굴에 얼핏 의외라는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
사실 살짝 서운하긴 했다. 저걸 얼마나 힘들게 배 아파 낳아놨는데...
하지만 섭섭하다고 대놓고 말하기는 뭐해 속으로만 삼키고 있는 중에, 예상치 못하게 아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보아하니 제 발로 오지는 않았을 테고, 리엘이 등 떠밀어 온 것 같았다.
자신이 역시 사람을 잘못 보지는 않은 모양이라 생각하며, 황제는 저 멀리 서 있는 리엘을 슬쩍 바라보았다.
“사과드리려고 왔어요.”
그 한마디로 마음이 다 풀린 듯, 황제는 자상하게 웃어 주었다.
“담아두지 않았으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다 그렇게 되는 법이야.”
“아바마마, 그 동안 제 제멋대로인 행동들을 다 참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죄송해요.”
“엔릴, 무언가 오해하고 있구나.”
“오해라니요?”
“난 널 참아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