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전환점(1)
2017.02.16.
“네? 그게 무슨...?”
“널 참아주고 받아준 게 아니다. 자유롭고 즐겁게 사는 널 보며 그저 기뻤던 거였다. 네가 행복하면 나도 마냥 좋았으니까."
물론 가끔 진심으로 빡치게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사는 아들의 모습이 그저 보기 좋았다.
“.........아바마마....”
“보상심리라고 해야 할지... 내가 누리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너를 통해 보았다고 하는 게 낫겠구나. 네 모습에 나를 투영했으니까. 그렇다고 널 대리만족의 수단으로 여긴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려무나.”
“알아요. 아바마마께서 절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래. 나는.... 내가 너무 엄격하게 강요받고 자라서, 너희들에게는 그 어떤 짐도 지워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황제는, 문득 묻어 두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의 자신이 엔릴처럼 저랬다면, 단순히 혼나는 정도가 아니라 보나마나 기절할 때까지 죽도록 맞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감히 저런 짓 까지는 할 엄두조차 못 냈었다. 제멋대로 굴기는커녕 작은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엔릴에게는 그런 짓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된다는 게, 참 신기하면서도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랬군요.... 아바마마는 어떻게 자라셨는데요?”
“........”
차마 말할 수 없는 그 비참했던 학대... 그것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받지 못했던 만큼 더더욱 사랑을 듬뿍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바...마마?”
그 사실을 아들이 몰랐으면 했기에, 황제는 그저 엷게 웃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글쎄... 그냥... 부모님이 너무 무섭고 엄해서 조금... 조금 많이 힘들었단다. 조금만 잘못하거나 실수해도 호되게 벌을 받았거든...”
그래서 더더욱 엔릴을 혼내지 못했다. 아니, 혼내는 게 두려웠다.
겪은 그대로 자기도 모르게 같은 짓을 반복할까봐, 숨어있던 흉포한 기질이 어디선가 튀어나와 아이를 죽도록 때릴까봐 겁이 났다.
“아바마마는 실수 같은 거 안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나도 네 나이 무렵엔 실수투성이였어.”
“정말요?”
“물론이지. 지금도... 정작 부족하고 미숙한 건 네가 아니라 나구나. 한 생명을 오롯이 키워낸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너도 곧 혼인을 하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거야. 나도 널 낳고야 깨달았다. 정말 쉽지 않더구나.”
엔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의 시선이 깊어졌다. 자신도 만약 이렇게 자유롭게 자랐다면, 엔릴처럼 해맑고 명랑한 아이였을까...
그런데 그렇게 자라서인지 아들 녀석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였다. 그 점이 걱정되긴 했으나, 어차피 황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엔릴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저 개념 없기만 한 아이는 아니었다.
제 누나가 황위를 잇는 데 방해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철없어 보이도록 행동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천방지축인 것도 맞지만, 그 나름대로는 생각이라는 것도 꽤 하는 편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자유롭게 자랄 수 있던 건 전부, 아바마마께서 배려해 주셔서라는 걸 잘 알아요. 늘 감사해 하고 있어요.”
“나야 네 아버지니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내가 모자란 아버지인데도 삐뚤어지지 않고 잘 자라주어 고맙구나. 레이튼 경이 널 잘 잡아주었어.”
“아하하... 레이튼 경은 잔소리쟁이니까요... 아바마마, 저 이렇게 제멋대로고 나쁜 아들이지만... 아바마마가 절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아요. 그런데 항상 실망만 시켜드려 정말 죄송해요.”
“아니다. 너에게 실망한 적 없다.”
“아니에요, 아바마마. 저, 제가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생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제멋대로 그저 즐겁게만 살았는데... 좋아하는 여자 하나 스스로 못 지키는 제 모습에 처음으로 회의가 들었어요.”
“.....음...”
“저 여태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어요. 무엇하나 아쉬운 것도 절박한 것도 없었으니까요. 누구하나 제게 무엇도 강요하지 않았었기에 한 번도 문제를 못 느꼈었지요. 그런데 이젠 깨달았어요. 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지... 정말 처절하게 느꼈어요. 제가 그동안 너무 철이 없었다는 걸요.”
“....그래. 하지만 넌 아직 어려.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면 되는 나이야. 조금도 늦지 않았구나.”
“어리긴요.. 열일곱인데요.”
“열일곱이라... 그래 그렇구나. 누구에겐 끝이 될 수도, 누구에겐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그런 나이구나...”
“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부터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옛날의 제가 아니에요! 리엘 앞에 당당한 남자가 될 거라고요!”
“그래그래.”
남의 손에 맡겼던 아이는 어느덧 훌쩍 커서 제법 기특한 소리도 할 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작고 귀엽던 아이였는데...
어쩐지 여전히 귀여워서 황제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리엘이 네 부족한 점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내 눈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구나."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던 그 꼬맹이가 벌써 다 커서 제 여자를 데리고 오다니...
“맞다! 리엘도 아바마마께 드릴 말씀이 있대요!”
엔릴은 가까이 오라며 리엘을 불렀다.
“폐하. 미천한 목숨을 구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신 점 각골난망 새겨 잊지 않겠습니다. 또한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큰 죄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 점도 감히 어찌 갚아야 할 바를...”
당황한 나머지 말이 끝도 없이 장황하게 나왔다. 그런 리엘을 보며 황제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 딱딱하게 예의차려 말하지 않아도 된다.”
“...소, 송구하옵니다. 귀하신 존체를 상하게 한 점 백 번을 생각해도 벌을 받아 마땅하나, 폐하께서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리엘, 괜찮아. 그만 하고 편히 말해. 아무도 없는데 뭘 그리 격식을 차려.”
아무도 없다니... 제일 중요한 황제가 눈앞에 있건만, 황당한 소리에 리엘은 더 버벅거렸다.
“하..하오나 폐하께서...”
사석에서는 예법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황제였지만, 그걸 모르는 리엘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황제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리엘”
“네! 네, 폐하”
“엔릴을 잘 부탁한다.”
“네!! 제가 잘 모시겠습니다!!”
긴장한 나머지 여장부처럼 우렁찬 대답이 튀어나왔다.
“.......”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전혀 엉뚱하게 받아들인 듯 했다.
사실 어색한 건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비 며느리와 시아버지라는, 이 얼마나 생소하고 낯선 관계인지...
난생 처음 접해 보는 괴상한 상황에, 황제는 결국 리엘에게 말을 거는 걸 포기하고 만만한 아들을 돌아보았다.
“엔릴, 내 아들. 네 어머니도 나도 널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한단다. 네가 사랑을 받고 자란 만큼, 주는 법도 알았으면 하는구나."
“네, 아바마마.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오직 가족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만 사시는 아바마마를 보면서 예전에는 참 이해가 안 갔어요. 항상 다 양보만 하시는 게요. 나라면 저러고 못 살 것 같은데... 라고 생각도 했고요. 근데 리엘을 만나게 되니 저도 이젠 알 것 같아요.”
“원래 그런 거란다. 사랑은 배려와 헌신이지. 자신보다 더 중요한 누군가가 생기는 거니까.”
“맞아요. 누군가의 강요 때문이 아니라 저절로 바뀌는 거더라고요."
리엘은 코앞에 자신을 두고 하는 대화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도무지 몸 둘 바를 몰라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황제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적국인 리테인에서는 피에 물든 전쟁광으로 악명이 자자한 황제였는데, 직접 만나본 황제는 권력이니 정복이니 그런 것에는 새털만큼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리엘이 멍하니 듣고 있는 사이, 황제와 엔릴의 대화는 또다시 이어졌다.
"그래. 바뀌어야지. 엔릴, 나한테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리엘한테는 그러면 안 돼."
"저 이미 잘 하고 있어요! 그치, 리엘?"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움찔거리는 기분이었는데, 급기야 말까지 거니 리엘은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버렸다.
"네,네! 물론이지요! 분에 넘칠 정도로 잘 해 주십니다!"
"후후.. 그래. 알았다."
"저도 리엘에게 뭐든지 다 해주고 싶고, 저 자신보다 더 챙기게 되요! 이렇게 이기적으로 받고만 자란 저인데도요.”
“대견하구나.”
“아바마마 덕분이죠!”
"아무튼... 한쪽만 일방적이어서는 오래 버틸 수가 없단다. 둘이 항상 서로 진심으로 위해주었으면 하는구나. 이 녀석이 철은 없지만 나쁜 아이는 아니거든.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아, 알고 있사옵니다. 전하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십니다!"
"고맙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이해란다.”
“네.”
“예전에 나도 그걸 잘 몰랐다. 내 나름대론 사랑하고 아껴서, 큰 관심을 기울여주지는 못했지만 그 아이를 위해 참고 희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린 전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그것이 큰 오해와 비극을 불러왔어.”
“아바마마, 지금이라도 다시 화해하면 되잖아요.”
“그건 불가능하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되돌릴 수가 없으니까.”
엔릴도 리엘도 누구의 얘기인지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니 혹시 나중에 너희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성급히 판단하지 말고 너도 리엘도 대화로서 서로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면 좋겠구나. 특히 엔릴 네가 더 많이 양보하고.”
“네.”
“네, 폐하. 새겨듣겠습니다.”
리엘은 황제가 이렇게 길게 말하는 걸 처음 봤다. 깜짝 놀랄 정도로 신기했다. 원래 말이 없다기보다는, 아주 가까운 사이 외에는 잘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내가 벌써 늙은이처럼 잔소리가 많았구나. 아직 다 낫지 않아 피곤할 텐데 어서 가서 쉬려무나.”
***
“휴...”
긴장이 풀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고작 두 번째 만남이니 여전히 긴장되는 건 당연하구나...
그래도 뭔가 그 전보다는 훨씬 가까워 졌다고 할까? 테두리 안에 들어갔다고 할까...? 아무튼 확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난, 현재 상황 때문에라도 당분간 서로 거리를 두는 척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차피 리일은 이번 일에 충격을 받아 아예 칩거하여 검을 수련하기로 결정했다. 나 역시 당분간 마법에 전념할 생각이었으니 마침 잘 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때 느꼈던 그 기이한 감각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다.
그게 대체 뭐였을까?
절체절명의 순간 내가 멈추라고 간절하게 외쳤을때, 정말로 적이 덜컥 멈추어 버렸는데...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지만,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멈추라고 소리지른다고 그렇게 고장난 기계처럼 멈춰서 움찔 거리는 게 말이 돼?
무언가 있어.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내게 있는 거야. 그걸 알아야 해.
대체 뭐지? 그 특유의 기이한 느낌... 다시 느껴질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조금만 더 접근하면 뭔지 알 것 같은데...
아!? 혹시 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