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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63화 (63/134)

63. 전환점(2)

2017.02.17.

막 뭔가 집히려는데...

“리엘?”

하필 그때 리일이 나왔다. 할 말이 더 생각났다며 다시 황제의 처소에 들어갔다 온 리일이, 멍하니 있던 나를 발견하고 부른 것이었다.

“아...”

덕분에 생각날 듯 말 듯 했던 게 날아가 버렸다. 아쉽긴 했지만, 어차피 나중에 제대로 연구해 보려 했으니 다시 생각나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마법에 대해 생각했어요. 제가 많이 부족한 것 같아서요.”

맞아. 우리 둘 모두 아직 너무 부족하다는 걸 이번 일로 깊이깊이 깨달았다.

아직 헤쳐 나가야 할 게 많을 텐데,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며 보호만 받는 건 내 성미에 맞지 않아.

그리고 그건 예전과 달라진 리일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나도... 나 이제 독하게 마음먹을 거야. 그동안 너무 세상 편하게 살아왔나 봐. 내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고... 정말 한심하지. 이렇게 쓸모없는 내가 정말 싫다.”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리일이 절 지키려고 몸까지 던져 구해주었잖아요. 정말...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어요.”

한심할 리가! 절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었다.

검술이라는 게, 상상 속에서나 수십 대 1로도 다 때려눕히고 그러는 것이지 실제로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적당히 서로 몇 대 주고 받으며 하는 맨손싸움도 아니고, 한방만 잘못 맞아도 골로 가는 게 칼질인 거니까...

솔직히 보통 사람이라면, 두어 명하고만 칼을 맞대고 있어도 나머지는 속수무책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실전경험 한 번도 없는 꼬꼬마 리일이 6대 1로 저만큼 버틴 건 정말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날 지키려고 필사적이었겠지...

“당연한 일인걸!! 난 리엘의 연인이잖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부족한 건 변함없어. 이번에는 반드시 오러를 깨우칠 거야.”

오러... 거의 절대적인 절삭력을 가진 오러만이 그 불리함을 전부 극복해 줄 수 있는 셈이었다. 갑옷이든 검이든 통째로 썰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서 리일이 저렇게 필사적인 것이다.

“리일...”

“예전에는 그렇게 잔소리 들어도 맨날 농땡이만 치던 나였는데... 이젠 안 그럴 거야. 널 위해 달라질게.”

아... 뭉클하다. 이렇게 절절히 진심인데, 그깟 검술의 끝 좀 아직 못 봤다고 어떻게 구박하겠어...

그리고 검의 천재였다는 황제조차 열여덟에 깨우쳤다고 하잖아. 리일은 아직 열일곱이고!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무리하지는 말아요. 우린 어리고 아직 시간은 많아요.”

“하지만 마음이 급한 걸? 얼른 성장할게! 죽을 각오로 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줘!”

“그럼 기대할게요!”

“화이팅! 아, 그리고 리엘. 오늘 같이 와 줘서 고마워.”

“......피잇, 아까 쑥스럽다고 한 건 핑계고 저 일부러 데려온 거죠?”

“어엇, 어떻게 알았어?”

“저를 코앞에 두고 그런 말씀을 나누시는데 어떻게 그 저의를 모르겠어요.”

“하하하... 미안..."

“뭐, 괜찮아요. 사실 잔뜩 긴장했는데 생각보다 부드러우신 분이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치? 그래서 안심하고 데려간 거야. 낮에는... 내가 생각이 짧았던 거 알아. 리엘이 걱정되는 마음이 너무 큰 나머지 아바마마한테 실수했더라고. 근데 나 때문에 리엘이 미운털 박히면 안되잖아. 물론 그런 일로 리엘을 미워하시진 않겠지만 혹시 해서... 그래서 일부러 같이 간 거지!”

"죄송해요. 그런 줄도 모르고 전..."

"아냐, 리엘이 등 떠밀어 준 덕도 있으니까! 사실 오늘 바로 가게 될 줄은 몰랐거든..."

"아무튼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에요. 폐하는 정말 좋은 분이신 거 같아요!"

“당연하지! 좋다마다! 울 아바마마는 정말 천사처럼 좋은 분이야! 근데 귀족들은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

적국에서만 악명 높은 게 아니었구나... 리일, 너만 모르는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딱 몇 명한테만 안 그러시는 거야. 나도 아직 좀 어렵다고...!

“리엘도 괜히 걱정했었지?”

“네... 그러게요... 근데 황실은 가족 간에도 비정하고 살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라 많이 놀랐어요. 역시 그라츠 제국은 남다르네요.”

“응? 아냐. 그라츠라서가 아니라... 음... 이렇게 바뀐 게 고작 우리 부모님 대부터라고 들었어. 아바마마가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분이라... 이렇게 만들기 위해 많이 애쓰신 거야.”

“그래요? 그 전엔 어땠는데요?”

“뻔하지. 흔히들 소설 속에 나오는 그런 모습. 죽고 죽이고 뭐 그런...?”

“으악, 정말요?”

헉, 멋모르고 리일에게 들러붙었는데 만약 그런 황실이었으면... 내 모가지는 바로 쓱싹되었겠네...?

“응. 선대 황제만 해도 동생이랑 아버지를 죽이고 등극했고, 선선대 황제는 형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고... 그 전에도... 아무튼 자기들끼리 난리치다가 싹 다 죽었어. 그래서 할마마마 딱 한명 말고는 다른 황족 친척들이 하나도 없는 거야.”

아... 황후폐하의 어머니라는 분...? 그분이 진 최종보스인가?

“.....무섭네요. 그래도 지금의 폐하께서는 별일 없이 즉위하셨나 보네요.”

“에이, 그럴 리가. 그때도 꽤나 피바람이 불었대. 선대와 다른 점이라면 정적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 정도?”

그게 더 무서워! 설마 죽이지는 않고 사지를 잘라 돼지우리에 던졌다든가 그런 거 아니지?

죽이진 않고 어떻게 했냐고 막 물어보려는데, 리일이 대뜸 외쳤다.

“아무튼 나 내일부터 바로 폐관수련하려고!!”

“네? 벌써요?”

“응, 게으름 피우지 말아야지!!”

“그럼 저도요! 저도 연무장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마법수련 할 거예요! 우리 열심히 해요! 얍얍!!”

“한동안 떨어져 지낼 생각 하니 슬프다... 우리 내일 헤어지기 전에 같이 아침 먹자! 내 방으로 와!”

“넵!! 아침부터 진하게 데이트하고, 심기일전해서 파이팅 하는 거예욧!”

“지..진하게? 헤헤... 기대할게!”

역시 엉큼한 녀석. 다른 건 하나도 안 들리고, ‘진하게’ 라는 단어만 들리는 모양이네.

꿈 깨. 아침 댓바람부터 뭘 바라는 거야! 네가 뭐 전쟁에 나가는 장수라도 되냐! 고작 폐관수련 하러 가면서 어딜 은근슬쩍 총각딱지 떼고 가려고!

***

리일의 바람과는 약간 다른 양상이었지만, 어쨌든 우린 아침부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야외에 새하얀 테이블을 차려놓고, 잘 꾸며진 겨울정원을 바라보며 말이다. 하녀들이 식사준비로 분주하는 동안, 우리는 곧 있을 잠깐의 이별을 준비했다.

“아침만 먹고 당분간 헤어진다 생각하니 너무 슬프다... 리엘,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저도요...”

“꾹 참고 강해져서 돌아올게!”

저 오글거리는 멘트도 멋있어 보이다니, 이 나사 하나 빠진 황자님한테 내가 단단히 반하긴 반한 모양이었다.

“풋, 그래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근데, 아직 다 안 나았는데 그렇게 무리해도 돼요?”

“응? 걱정 마. 몸으로 하려는 게 아니라, 오러를 깨우쳐서 돌아오려는 거니까.”

“아... 그렇군요.”

“리엘이야말로 괜찮아?”

“마법도 몸을 쓰는 게 아니라 괜찮아요!”

“그게 아니라... 리엘도 꽤 다쳤잖아. 많이 아팠을 텐데... 부상도 부상이지만, 크게 다쳐본 게 처음이면 아무래도 심리적 후유증이 남을 지도 몰라.”

“음... 그땐 많이 아프고 놀랐었는데... 지나고 나니 괜찮아졌어요. 사실 의식 없는 리일을 걱정하느라 그런 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나간 것 같아요.”

하도 바닥을 구르면서 살다보니 멘탈이 튼튼해진 건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별 타격이 없긴 하다. 공주에게 하도 당해서 익숙해진 건가...?

“미안해 정말. 이 모든 게 나 때문인 셈인데... 네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리일 곁에 남기로 한 건 제 선택이잖아요. 그리고 절 지키려고 리일이 죽을 뻔 했는데,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하죠.”

“아냐... 리엘, 내가 꼭 믿음직한 남자가 되어올게!!”

“기대할게요.”

“그럼 떠나기 전에...”

미처 말을 끝내지도 않고 리일은 성큼 다가왔다.

그가 바랐던 지이이이이인한 것이 시작되었다.

“읍....”

“리엘.. 아아...”

“으읏.. 아... 리일...”

“전하!!”

아씨! 한참 분위기 좋으려 했는데..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방해를 받다니! 이런 쉬밤바! 진짜 욕이 육성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헐레벌떡 달려와 리일을 부른 건 시종장이었다..

“전하. 셀리나 공주저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젠장”

헙,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욕이 실제로 튀어나온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리일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 역시 나 못지않게 빡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하지... 우리 몸에 칼빵 먹인 데에 공주가 큰 기여 했으니까!

그런데 아직 증거가 없어서 어떻게 하지도 못하고 있고..! 아오!! 저걸 그냥!! 죽빵을 날려줘야 하는데!

사실 리일이 누워있는 동안, 셀리나 공주는 매일같이 문병을 왔었다. 하지만 리일의 처소에 거의 하루 종일 틀어박혀 있던 황후가, 아들의 원수 년을 들여보내 줄 리가 없었다.

증거만 없을 뿐이지 그 날의 정황상 공주가 배후중 하나라는 건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주는 전하의 용태가 안 좋아 면회가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매번 듣고 헛걸음하고 돌아갔다. 그러던 것이 이제 드디어 리일이 깨어났다는 말을 들으니 쪼르르 달려온 모양이었다.

아침 댓바람부터 미친 또라이 공주년을 봐야 한다니, 정말 짜증났다.

어쨌든 난 반사적으로 일어나 리일의 뒤에 공손히 섰다. 나란히 앉아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봤다간 또 무슨 패악을 부릴지... 으으으

물론 나도 리일도 상쾌한 아침부터 공주년을 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황자 전하!!”

하지만 역시 또라이는 또라이 다운 방법으로 멋대로 들어왔다.

하필 여긴 문으로 막을 수도 없는 야외라는 게 문제였다. 기사들이 감히 공주의 몸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이용해,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와, 이젠 자존심도 없나 봐. 처음엔 그래도 안 들여보내 주면 분한 듯 쌩 하니 돌아갔던 것 같은데...

“전하!! 전하, 무사하셨는지요!! 다치셨다는 말에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공주는 리일 앞에 오자마자, 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

탁!

그런데 가만히 있는 내 뺨은 갑자기 왜 때리려 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막을 생각조차 못했다.

고스란히 맞을 뻔 했지만, 멍하니 얼빠진 나보다 리일이 빨랐다.

“공주!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리일은 어느새 번개처럼 공주의 손목을 잡아채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나에게 역정을 냈다.

“네 년은 뭣 하는 계집이냐!? 너 따위 천한 것 때문에 전하께서 위험해지시 않았느냐! 감히 전하를 다치게 만들다니! 무엄한 계집 같으니라고!!”

“..........”

뭐? 아오, 미친년. 자기가 가담했다는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안 드는 모양이었다.

“셀리나 공주!!”

분노한 리일의 외침을 들으며, 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근데 진짜 빡치네... 이걸 어떻게 갚아주면 좋지...? 대체 저 공주년 복수는 언제 할 수 있는 거야!? 아오...!

“전하...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 사이 공주는 걱정스러운 말투로 가식적으로 호들갑을 떨어댔다.

얼씨구...?

미친년은 무시하는 게 상책이라며 다음을 기약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문득 생각이 하나 스쳐지나갔다.

잠깐,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은 아직 발표 안 했어.

리일이 깨어난 게 고작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이니, 조금 있다 열릴 대전회의에서 발표할 예정이라고 들었거든. 그러니 공주가 아무것도 모르고 저딴 소리를 하는 걸 테고...

리일과 눈이 마주치자, 그도 나와 통했는지 묘한 눈빛을 보내왔다.

훗, 궁지에 좀 몰아넣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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