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전환점(3)
2017.02.18.
“걱정 끼쳤구려, 공주. 그런데 조금 전 그게 무슨 소리요?”
“네?”
리일의 말에 공주는 어리둥절해했다. 제도가 온통 전부 뒤집어질 정도로 난리가 났던 사건을 정작 본인이 왜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하긴, 공주 입장에서야 황당할 만 했다.
리일이 중상을 입어 돌아왔으니 습격이 있었다는 건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온 병력이 총동원 되어 그렇게 숲을 수색해 댔는데, 그 일이 알려지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게다가 분노한 황제가 온 사방을 뒤집어엎어 쑤셔대는 터에 모두가 덜덜 떨며 몸까지 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모를 뿐 밖에 얼마나 피바람이 몰아치고 있을지...
그리고 황제는 절대 그렇게 말캉한 사람이 아니었다.
화는커녕 실수도 잘못도 다 덮어주고, 오밤중에 찾아가도 말랑말랑 자상하게 덕담이나 들려준다고 해서, 결코 그 모습이 전부일 리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 황궁의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내가 타깃이었다고 알려졌으리라 공주가 예상한 것이다. 비록 아직 공식 발표는 안 했지만 말이다.
사실 내 옷에 추적기가 달려있던 이상, 수사관이 바보가 아니라면 모를 수도 없을 테니까...
그래. 거기까지는 다 맞는데 다만...
문제는 그 조사결과를 황제가 전부 덮어주기로 했다는 것이지...
게다가 리일이 깨어나 담판지어 주기 전에도, 황제는 이미 입단속을 시켜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걸 비밀로 부쳐주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주는 그걸 당연히 모르겠지.
리일은 태연히 셀리나 공주를 유도하는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 아이 때문에 다치다니? 나는 습격당하자마자 곧바로 쓰러져 내내 의식이 없어, 무슨 일인지 아직 제대로 듣지도 못했소만...”
그리고 지금 시점은, ‘처음부터 리일이 타깃이었다’ 라는 거짓말을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직전. 나이스 타이밍!
공식 발표를 들은 후라면 이런 실수 안 했을 테니, 우리 쪽에서 덜미를 잡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야...!
예상대로 셀리나 공주는 함정에 걸어 들어왔다.
“전하, 정말 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프옵니다. 저런 천한 계집을 노린 자객들 때문에 전하의 귀한 존체가 상하시다니요...”
옳지, 설마 이쪽에서 180도 다르게 발표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수밖에!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게 파격적인 일인데, 고작 날 감싸려고 타깃을 내가 아닌 그로 바꿔 발표할 거라고는 생각이나 하겠어?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황제가 받아들여 준 건 나도 정말 황당한 일이라고.
“공주, 이번 사건에 대해 아는 게 많은 모양이오?”
“그야 물론... 전하께서 부상을 입으신 중차대한 일이니 주변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답니다.”
귀를 기울이긴 개뿔.
“그런데 공주, 그대의 말이 조금 이상한 것 같소만?”
“네? 전하 그게 무슨...”
“아직 조사결과를 발표도 하기 전인데, 공주는 타깃이 리엘이었다고 어찌 그리 확신하시오?”
“.......”
겔겔겔. 저 당황한 표정이라니! 이제야 뭔가 실수한 걸 깨달은 거니? 나도 한 방 보태 줘야지! 먹어라, 엿. 빅 엿 먹어라!
“어머, 전하. 듣고 보니 정말 이상하군요. 자객이 하잘 것 없는 제 목숨을 노릴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난 일부러 더 얄미운 말투로 리일에게 맞장구 쳐 주었다.
상식적으로 암살자를 맞닥트리는 건 주로 황족이니, 나 같은 일개 시녀 나부랭이가 타깃이었다고 생각하는 건 이상했다.
오히려 반대로 실제 내가 타깃이었다 해도 리일을 노렸거니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니까.
이튼 오라버니처럼 내 상황에 대해 특별히 우려하고 있던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이제 공주는 완전히 허둥대기 시작했다.
“그..그게 전...”
“공주, 이번 일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요? 설마.....”
“전... 저, 전 그저 전하께서 다치신 모습을 보고... 저, 전하께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셨으니 누군가를 감싸려다 다치셨을 거라고 오해를... 그, 그러니까 누군가가 리엘을 노린 거라고 생각을...”
“그래도 이상하군. 내 부상 소식을 들었다면 보통은 내가 타깃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소? 실제로도 자객이 노린 건 나였고.”
“.....네?”
“자객은 분명 나를 노렸소. 현장에 내가 있었는데 착각할 리가 없지 않소?”
“.........”
큭큭큭. 어이없겠지. 사실과 전혀 다른 소리니까. 하지만 아니라고 반박도 못 하겠지? 리일은 이 정도로 만족이 되지 않는 듯 공주를 점점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아무래도 공주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군.”
이제 리일은 형식적인 반 존대도 거의 때려 친 상태였다.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서운 표정으로 공주에게 살기를 흘리며 압박하고 있었다.
“....저..전하...”
“혹여 그대가 고국과 내통하여 불미스러운 일을 계획했다거나...”
덜덜덜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아무래도 황제폐하께 말씀드려야겠군. 그대가 이 일에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오.”
리일은 일부러 ‘아바마마’라는 친근한 단어 대신 ‘황제폐하’라고 강조한 듯 했다. 리테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황제를 두려워 하니까.
“.......저, 전하! 아, 아닙니다!! 결코 그..그렇지 아..않사옵니다! 오해십니다!!”
“글쎄, 그건 조사해보면 나올 일.”
“정말 아닙니다! 전하,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글쎄... 그건 조사해 보면 알겠지. 제국의 마법심문 앞에서는 그 어떤 진실도 숨길 수 없는 법. 그렇지 않나, 리엘?”
리일이 나를 돌아보며 눈을 살짝 찡긋해 보였다. 뭘 원하는지 잽싸게 캐치한 난 열심히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제국에서는 전근대적인 방법으로 무식하게 고문 하지 않지요. 마법을 이용한 효과적인 고문으로 얼마든지 진실을 알아낼 수 있으니까요.”
“.......저..전...하...”
마법 고문이라니, 전에 나랑 줄리가 별궁에 퍼트려놓은 헛소문이지만, 미개한 공주는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듯 했다. 그 창백해진 표정을 즐기며 몇 마디 더 덧붙여 주었다.
“끔찍하게 고통스럽긴 하지만, 신체에 아무 후유증을 남기지 않는 혁신적인 방법이지요. 그렇게 지독하게 고문당한 저도 이리도 멀쩡히 돌아다니고 있지 않습니까. 제국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늘 감사할 따름입니다.”
“...............”
이제 공주는 덜덜 떠느라 말도 한 마디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번 겪으라면 차라리 화형을 당하는 걸 택하겠습니다. 산 채로 손톱 발톱이 전부 뽑혀도 그거보다 아프진 않을 테니까요. 제 혐의가 벗겨져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휴...”
쿡쿡쿡. 마법으로 신종 고문방법이라니... 내가 지어낸 소린데, 그걸 아직도 믿냐?
난 속으로 신나게 공주를 비웃으면서, 리일과 주거니 받거니 허풍을 떨며 대화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느껴졌다. 응? 뭐지 이 냄새? 어디서 지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으윽, 뭐야 설마...? 오 마이 갓!!
공주는 무려 오줌을 지렸다...! 똥덩어리가 오줌을 쌌네!?
드레스가 축축이 젖는 모습을 보자 리일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쟤 이제 쪽팔려 두 번 다시 못 나타나겠다... 시종장에 기사들까지 다 봤으니 얼마나 수치스럽겠어. 와, 대박이야! 저러고도 또 나타나면 어떤 의미에서는 참 대단하다고 칭찬해야겠어.
근데 하나도 안 불쌍해. 불쌍하기는커녕 속이 뻥 뚫린 기분이야! 나 너무 못됐나?
아냐. 솔직히 공주년 때문에 리일이 다친 걸 생각하면, 정말로 고문실에라도 처넣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그건 리일도 마찬가지일 테고.
정말로 처넣으려면 물증을 확실히 찾아내야 하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네년의 하루하루를 지옥으로 만들어 줄 수는 있지.
언제 죄인의 신분으로 끌려 나가 옥에 갇힐지 모르니 얼마나 심장이 쫄깃하겠어?
마법고문이라니, 상상만 해도 무서울 거다. 꺄르르르! 두려움에 떨면서 매일 떨면서 지내렴. 있지도 않은 마법고문인데 거 참 쓸모 있네. 큭큭큭
내가 신나서 마음속으로 이불을 팡팡 차는 동안, 리일은 마지막 강타를 날렸다.
“돌아가 있도록. 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그대에게 사람을 보내지.”
“저...전하...”
공주는 이제 눈물까지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일은 차갑게 외면하며 기사들에게 그녀를 끌어내라 지시했다.
오줌싸개 공주 때문에 식욕이 뚝 떨어진 덕에, 우리는 아침을 먹기 위해 다시 실내로 자리를 옮겼다.
“어휴, 겨우 치워버렸네. 이제 당분간 얼씬도 안 하겠지?”
“큭큭큭, 리일 진짜 최고였어요. 우리 이렇게 죽이 척척 맞을 줄은 몰랐어요!”
“뭐어? 섭섭하게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린 당연히 최고의 콤비지!”
........리일, 그런 단어는 초딩 때 졸업하는 거야. 최고의 콤비라니... 우린 영원한 짝궁! 뭐 거의 이런 수준이잖아...
“아, 네...”
“그나저나 아침부터 재수 없는 얼굴 봐서 기분 잡칠 뻔 했는데, 그래도 한 방 먹여주니 시원하다! 그치?”
“네! 완전!! 중간 사이다!”
“사이다? 뭔진 모르겠지만 그래 사이다! 근데 리엘은 가끔 뜻 모를 소리를 잘하는 거 같아.”
“뭐 그런 거 있어요.”
그래 아직 최종 사이다는 멀었지. 저 공주년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는 게 최종 사이다라고. 지금은 그냥 맛보기 시식용 사이다 정도랄까?
“쿡쿡.. 뭐 그렇다고 하자. 사실 공주가 우리 리엘 괴롭혔던 거 생각하면 이 정도로 어림도 없어! 진짜 복수는 나중에 꼬옥 하게 해 줄게!”
“고마워요!!! 역시 우린 최고의 콤비!!”
우와, 나 양심 없다. 아까 그렇게 콤비라는 단어 구박해 놓고, 제대로 복수하게 해 준다는 한 마디에 급 어록에 추가했어!
“그래 콤비!! 리엘, 하이파이브!! 짠!!!”
“짠!! 역시 리일이 최고예요!”
그래그래 하이파이브! 우리 리일 어린이 순진하고 착하기도 하지. 아이고 예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자라렴. 마음은 순진, 몸은 음흉하게! 흐흐흐
우리 그럼 아까 하려던 짓 마저 할까...? 으흐흐흐흐....
"리엘..."
리일도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다시금 입술을 겹치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래. 여기 어차피 실내인데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하게... 우리 리일 소원대로 폐관수련 떠나기 전에...
"리일..."
그런데 하필 그때,
"흠흠, 전하!"
아아아아아악! 이번엔 또 누구야!!!!!! 죽여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