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전환점(4)
2017.02.20.
"왜!!!"
리일도 빡쳤는지 버럭 화를 냈다. 시종은 눈치를 살피며 머뭇머뭇 말했다.
"그게... 황후폐하께서 찾아계시온데..."
으악! 아까 죽여 버리겠다고 한 거 취소 취소!!
그런 헛소리를 속으로 지껄이며, 난 번개와 같은 속도로 후다닥 떨어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보니 이미 생긋 웃고 있는 황후가 보였다.
"어머, 하던 일 마저 하렴. 다음에 다시 오마."
"........"
그리고는 정말로 쿨하게 가버렸다.
"......"
거 참 뽀뽀 한 번 아, 아니...밥 한 번 먹기 힘드네... 이미 공주 때문에 입맛도 뚝 떨어지고, 더 이상 스킨십을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나는 말을 슬쩍 돌렸다.
“아무튼 리일 우리 얼른 쑥쑥 커서 돌아와요!”
“이게 뭐야...! 당분간 헤어져야 하는데 아침부터 다들 정말 왜!!”
“......”
이보세요, 불효자식씨. 좀 전에는 엄마였다고요. 황후폐하도 당분간 못 볼 아들 얼굴 보러 온 것 같은데 이런 반응이라니...
그나저나 좀만 빨리 오셨으면 공주랑 마주칠 뻔 했었네? 황후도 공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던데...
“리일.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뭐?”
“저야 당연히 그렇다지만, 리일은 공주를 처음부터 왜 그렇게 싫어했어요? 그리고 리일 뿐 아니라, 왠지 모르게 두 분 폐하도 그렇고 다들 공주를 싫어하는 것 같이 느껴져서 궁금했어요.”
이 온 가족이 셀리나 공주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내내 궁금했다. 분명 리일은 나랑 처음 마주쳤을 때, 나에 대한 감정과 상관없이 공주를 엄청 싫어하고 있었다.
“아... 그건 왜냐면... 음 이거 말해도 되려나?”
“아니에요. 곤란한 거면 말 안 해도 돼요.”
“아냐. 이미 지난 일이니까 상관없겠지? 그리고 리엘도 이제 거의 가족이고... 아무튼, 사실은 말이야...”
“네.”
“리테인과의 협정할 때, 저쪽에서 맨 처음 원한 자리가 황비의 자리였어.”
“네에?”
“전에 얘기했었지? 아카데미 마법학부에 보낼 영식들에 대해서 말이야.”
“네.”
“그 제안을 리테인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공주를 볼모로 보내면서 황비의 자리를 원했어. 우리 쪽에서 당연히 거부할 걸 아니까 영애들도 하녀로 덤으로 보내고, 영토도 잔뜩 할양하면서 말이야.”
“아... 그런데 어쩌다 리일의 약혼녀 후보로 오게 된 거예요?”
“그야 당연히 아바마마가 미친 듯이 화를 내며 반대했으니까. 차라리 전쟁을 하겠다고. 어마마마께 그런 짓을 할 수는 절대 없다고 말이야.”
“.........헐”
그러니까 말이지, 감히 언감생심 황제의 옆자리를 노려서 저렇게 미운털이 콕 박혔다는 건가? 오기도 전부터 온 가족이 엄청나게 싫어했던 거구나.
휴... 나도 황제 쪽은 쳐다보지도 않길 정말 잘했네... 어쩐지 엄청 잘생긴데다가, 합산나이로 딱 내 또래인데도 이상하게도 안 땡기더라!
“하지만 정말 전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무고하게 죽어나갈 백성들을 생각하면... 그리고 리테인 왕이 저렇게 광신도인 이상, 나라가 멸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쉽게 항복 안 할 거야. 죽기 살기로 끝까지 결사항전하면 우리도 곤란하다고. 그놈의 종교가 뭔지...”
“그러게요.”
“우리 역시 강화협정이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완전히 튕기기도 힘들어서, 이리저리 협상 끝에 이렇게 된 거야. 한 마디로 내가 이 한 몸 희생했지! 뭐, 어마마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귀찮음 쯤이야!”
얘가 늘 뇌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실제로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지는 않는구나... 사람 역시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요즘 들어 자주 느낀다.
근데 왜 굳이 이렇게 뇌가 순수한 것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거지? 아, 황위 때문인가? 쓸데없이 귀족들에게 자신을 지지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고?
부모님한테는 철없이 굴지만, 생각보다 속 깊은 녀석이구나...
“그런 거였군요.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싫어했던 거군요...”
“응. 그래서 공주가 온 후에도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거고.”
그러고 보니 리일은 처음에 리테인 하녀들의 실상에 대해 전혀 몰랐다. 협상 과정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면서도 말이다. 아마 협상 타결 후에는 공주가 오든 말든 신경을 일체 끈 모양이었다.
“그랬군요...”
“어? 근데 내가 공주를 처음부터 싫어했는지 어떻게 알았어?”
헉, 이거 직접 들었던 게 아니라 생각을 읽었던 거였나!? 실수했네.
“저, 전에 리일이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꼴 보기 싫었다고.”
“아, 그랬었나?”
“네.”
리일은 다행히 눈치 채지 못했는지 대충 넘어갔다. 휴...
하긴... 생각을 읽지 못하더라도, 그가 공주를 싫어한다는 것 정도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주워들을 수 있는 일이니까.
“어마마마의 자리를 노리는 그런 이상한 여자를 아바마마 옆에 들이고 싶지 않아 양보한 거였지만, 내 짝으로도 별로였어. 예쁘지도 않은 게 성격도 나빠 보였다고.”
“풉... 쿡쿡쿡”
그야 당연히 나에 비하면 공주는 그냥 호박이지 호박. 호박에 드레스 입힌다고 수박 되나?
“그래도 내가 정말 기겁을 하고 싫어하니, 아바마마도 나름 신경 써 주셨어.”
“어떻게요?”
“협정 당사자인 황제가 결정하는 황비자리와 달리, 내 짝으로 공주를 들이는 건 당사자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약혼녀가 아니라 그나마 약혼녀 후보가 된 거지.”
“아하!”
“그리고 나한테 굉장히 미안해 하셨어. 잠시만 공주를 참아달라고. 얼른 주변 상황이 해결되면, 결혼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응? 그게 미안해 할 일인가? 귀족이나 왕족으로 태어난 이상 정략결혼에 대한 강요는 당연한 거 아니었어? 이 황실 정말 민주적이구나... 진짜 언제나 깜짝깜짝 놀라게 되네.
오히려 내가 고리타분한 이 세상사람 다 됐어.
“리일은 참... 부모님 잘 타고 태어났어요. 정말 좋겠어요...”
“응?”
진짜 부럽다. 나도 가족 가지고 싶은데...
“아니에요. 훌륭하신 분들이니까 잘 해 드리라고요.”
“피이, 그래도 나 그렇게 못되기만 한 아들 아냐. 엣헴!”
“네, 네. 잘 알아요. 이런 사정이 숨겨져 있는지 전혀 몰랐네요.”
“뭐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니까. 아, 아무튼 리엘, 어디 가서 이런 거 말하면 절대 안 되는 거 알지?”
“물론이죠, 걱정 마세요! 전 리테인에 애국심 1도 없어요.”
“응? 1?”
가끔 내가 이상한 단어를 쓸 때마다 리일은 고개를 갸웃댔다. 어쩌다 튀어나오는 것뿐이지, 사실 나도 잘 모르는 단어였다.
“돌아갈 생각 절대 없다고요.”
“그야 당연하지! 나랑 결혼할 건데 어딜 돌아가!?”
왜 모든 대화의 결론은 결혼이지? 내가 꼭 로맨스 소설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드네. 내가 책 빙의자도 아닌데 말이야. 난 환생자라고!
“.............아..아무튼 여기서 마법을 배운 이상 돌아가 봐야 마녀로 처형될 테니, 전 제국에 뼈를 묻을 거예요!”
“그래!! 나랑 같이 백년해로 한 다음에 여기에 뼈를 묻자!”
“.....”
"리엘?"
"....네. 근데 우리 같이 백년해로 하려면 저쪽 일부터 정리해야죠. 특히 공주요. 이번 일로 공주를 어떻게 못 하나요? 오늘 말실수를 꼬투리 잡는다거나..."
그리고 대체 이번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 걸까? 뭐, 내가 신경 안 써도 황제 폐하가 알아서 하고 계시겠지?
처음에는 나 모르는 곳에서 복잡한 일들이 휘리릭 정리되는 게 참 적응 안됐었는데,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자연스러웠다.
“음... 겁을 줘 놓긴 했지만, 사실 물증이 나오지 않는 이상 다짜고짜 심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쳇. 좋다 말았다. 증거... 안 나오려나?
사실 아까 공주의 생각을 슬쩍 들었다. 평소라면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공주였지만, 옆에 리일이 있으니 배짱이 두둑해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공주년은 덜덜 떨면서도 ‘어차피 증거를 남겨두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쳇쳇쳇!
“정말 아쉽네요...”
“아바마마가 뭔가 찾아내려고 최선을 다하고 계실 거야! 아무리 공주가 증거를 인멸했다 한들, 원래 그런 계약의 흔적은 쌍방이 가지고 있는 법! 탈탈 털고 계실 테니 아직 너무 실망 마!”
“아..! 그러네요. 뭐라도 찾아내면 좋겠어요!”
황제님 화이팅!!
남한테 떠맡겨놓고 ‘나는 모르오’ 하고 사는 리일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솔직히 편하거든!
넌 좋겠다. 비빌 언덕도 있고 말이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 언덕이 아니라서 차마 비벼댈 수가 없네...
“그러게. 아무튼, 아직은 리테인 쪽을 대놓고 뒤집어엎기엔 상황이 안 좋은 게 문제야. 어휴, 정말 지긋지긋한 리테인!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아무리 종교적 신념이라도 그렇지... 그 종교 자체가 허상이라는 게 낱낱이 밝혀졌는데, 어째서 리테인 왕은 저리도 굳건히 흔들리지 않는 걸까?”
“글쎄요...”
“이건 종교가 아니라 거의 세뇌 수준이라고. 휴...”
“무섭네요. 세뇌 수준의 종교라니.”
“이 어설픈 동맹을 깰 수 있을 때가 되어야 공주를 완전히 치워버릴 수 있는데... 리테인 왕과 신전과의 결속을 끊게 하는 게 쉽지가 않아. 우리 사이를 빨리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얼른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데 말이야. 아바마마도 골치 아프실 거야."
리일을 위해 다들 뭔가 바쁘네... 근데 리일만 놀고 있고. 나라도 뭔가 도와야 할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흐음. 어렵네요.”
"아무튼 아직은 그런 상황이야. 누나랑 어마마마가 마법 쪽으로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네? 마법 쪽이요? 신전의 일을 왜 그 쪽으로?"
"어? 아... 뭐 그런 거 있대. 자세한 건 누나한테 물어봐."
"아... 네, 그럴게요."
사실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난 알겠다고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뭔가 퍼뜩 떠올랐다. 지난번에 막 생각나려다가 리일의 방해를 받아 놓친 그거!
그래, 이거였어!
지금 여기서 이러고 노닥거릴 때가 아냐! 얼른 확인해 봐야 해!!
***
리엘의 일은 덮어주었지만, 황제는 엔릴의 일을 허투루 넘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들이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받아내야 했다.
황자에 대한 암살 미수라는 공식 발표와 함께, 황궁 안팎으로는 부는 피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황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탈탈 털린 암살길드는 허둥지둥 증거를 없애고 꼬리를 잘라 숨어들려 했지만, 황제는 끝끝내 의뢰를 받은 집단을 찾아내 희미한 실마리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벽난로에 막 소각되어가던 증거서류들이, 완전히 태워지기 직전 아슬아슬 건져내어진 것이었다.
순식간에 관련된 귀족들이 줄줄이 끌려왔고, 황궁 지하 감옥에서는 연일 끔찍한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귀족들은 황자 전하를 시해하려 한 게 아니라며 억울하다고 울부짖었지만, 황제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타깃이 엔릴이었다는 공식 발표 때문만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어쨌든 이 일로 엔릴이 다쳤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황궁 지하 감옥에서는, 리리커플의 행복한 순간과는 180도 다른 지옥도가 매일 펼쳐지고 있었다.
“엘! 증거가 나왔다면서요?”
조사 결과를 전해들은 황후는 바람처럼 황제에게 달려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