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전환점(5)
2017.02.21.
“네.”
“어떻게 되어가나요? 공주 쪽 증거는요?”
“음...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휴우...”
수색에서도 심문에서도 공주가 추적기를 붙였다는 증거는 찾아낼 수 없었다. 거의 타버린 서류들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귀족들의 심문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치워버리고 싶은 게 셀리나 공주이거늘 정작 이런 결과라니...
“심문에서도 나오지 않는 걸로 보면, 공주의 일은 귀족들이 의뢰한 것과 별개로 이루어진 일인 것 같습니다.”
“아...”
“아마도 귀족들의 의뢰를 받은 길드 쪽에서 실행방법을 고민하다가, 리엘을 제거하려 접촉해 오던 공주와 따로 계약을 한 게 아닐까 합니다.”
“음... 공주에게 의뢰에 대한 대가를 받는 대신, 추적기를 붙여달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분명 그에 관한 증거서류가 남아있을 텐데요...”
“하필이면 타버린 잿더미 중에 들어있던 모양입니다. 미처 전부 건저내지는 못했거든요.”
“아... 그렇군요... 별궁 쪽은요?”
“수색해 봤지만 역시 유감입니다.”
오늘 아침, 공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별궁은 탈탈 털렸었다.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황제와 황후가, 아침의 일을 전해 듣고 재빨리 행동에 옮긴 것이었다.
사실 엔릴의 처소에 공주가 왔던 일은, 굳이 그가 직접 일러바치지 않아도 이미 자동으로 전해져 있었다.
황후가 재빨리 엔릴에게 발걸음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간발의 차이로 엇갈렸지만, 다행히도 황후는 근처의 별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공주를 딱 마주쳤다.
그리고는 시간을 끌기 위해 처소로 데려가 일부러 다과를 권했다. 그러면서 그 사이 황제에게 전갈을 전해 공주를 붙들고 있음을 알렸고, 황제는 재빨리 별궁의 수색을 지시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어떻게든 공주의 목줄을 틀어쥘 증거가 필요해 무리해서라도 벌인 일이었는데, 아무 소득을 건지지 못한 것이었다.
“휴우... 공주는 별 반응 없던가요?”
“뒤늦게 알고 질겁했겠지요. 그래도 무슨 항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별궁 하녀들 중에, 귀족들이 심어 놓은 이번 사건의 세작이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는데요.”
저 구석진 별궁에 황자 시해 사건의 세작이라니 솔직히 얼토당토 않는 소리였지만, 어쨌든 명분은 명분이었다. 그리고 공주 본인이 저지른 말실수도 있었으니, 더더욱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까 시녀들의 말을 들어 보니 공주가 확실히 수상하더라고요. 그러니 제 발 저려서라도 괜히 불똥 튈까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지금쯤 혹시 증거가 나올까 안절부절 못 하고 있겠죠. 그보다, 아무것도 안 나왔다니... 엘,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증거가 없으니...”
너무 답답해 차라리 조작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귀족들에게 거짓 자백을 시킨다거나, 가짜로 증거를 만든다거나...
그런 황후의 심정을 알았는지 황제가 답해 주었다.
“다른 증거 없이 우리 쪽 귀족의 자백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으니, 한다면 무언가 물증을 만들어야지요. 위조된 인장으로 만든 서류라던가... 공주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라던가 말입니다. 하지만 공주는 후계자가 아니기에 인장을 소지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걸 위조해 증거랍시고 내밀긴 힘듭니다.”
“서명은요?”
“제국 측 어디에도 그녀의 서명이 남아있는 서류가 없기에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랬다. 조약의 협정은 양국의 정상이 맺은 것이고, 공주는 그저 보내졌을 뿐이었다. 이곳에 와서 어딘가에 서명을 할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만큼 무가치한 존재였던 게 구명줄이 될 줄이야...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피의 대가를 받아내고 싶습니다만, 타이밍 역시 안 좋습니다.”
타국의 왕족인 공주를 물증도 없이 잡아다 심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친 척 동맹을 깨트리고 전쟁까지 갈 생각이라면 몰라도, 보통의 방법으로 처벌하기에는 명분이 전혀 없었다.
적어도 혼담을 파기하고 리테인에게 배상 요구 및 재협상을 하려면, 저쪽이 꼼짝없이 인정할 만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당장 사생결단 낼 게 아니라면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엘, 전쟁은 절대 안 돼요. 차라리 덮어요.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아요.”
“......”
“지금 동부에서 실로엔 전쟁이 한창이잖아요. 서쪽과도 전쟁을 하면 너무 위험해요. 북부는 또 어떻고요!?”
황후가 절대 허락하지 않는 딱 한 가지가 바로 황제의 친정(親征 -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정벌에 나섬)이었다.
“하지만 엔릴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공주를...”
“난 두 번 다시 엘을 전쟁터에 보낼 생각이 없어요. 애초에 이 협정을 왜 받아들였는데요! 전쟁이 자꾸 지지부진 늘어지는 중에 다른 쪽 국경이 불안해져서 그랬던 거잖아요. 동시다발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걸 막기 위해서요!”
“휴...”
당시 황제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끌어 빠르게 전쟁을 끝내고 오겠다고 주장했지만, 황후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들의 사기 진작이니 무력의 상징이니 뭐니 다 필요 없다며, 리테인과의 강화협정을 적극 밀어붙였다.
“저도 나름대로 마법과 관련해 리테인 쪽 일을 알아보고 있으니 우리 조금만 참고 기다려요. 감히 리일을 다치게 한 그 요망한 공주를 저 역시 용서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절대 엘을 보낼 순 없어요.”
“......알겠습니다.”
결국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사건은 아쉽게도 별 소득 없이 넘어갔다. 물론 관련된 귀족들은 싹 숙청되었지만, 공주는 엮어 넣지 못한 채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
“아!!”
내가 지금 한가하게 물고 빨고 쪽쪽쪽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녀가 연구한다는 정신계 마법. 그말을 들으니 퍼뜩 무언가가 떠올라, 난 끝없이 결혼타령을 하는 리일을 애써 떼어놓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얼른 확인해 봐야 해!
난 리일 못지않게 연무장에 뼈를 묻을 각오로 틀어박혔다.
그런데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음... 아!”
일단 가장 먼저, 그때 느꼈던 기이한 감각을 다시 느껴봐야 할 것 같았다.
자객들에게 죽을 뻔 했던 그때... 내가 강렬히 외친 말이 분명 상대방에게 영향을 주었어. 말 때문인지 생각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느낌이 이상했던 건 확실해.
그건 정확히 뭐였을까?
일단 가정일 뿐이지만... 내 특수한 능력을 생각해 봤을 때,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 생각을 전하는 것도 가능한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그런데 고작 생각을 전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왜 거미줄에라도 걸린 듯 덜컥 멈추었지? 내가 멈추라고 아무리 소리질러봤자 통할 리도 없는데...
만약에... 아주 만약이지만, 혹시 생각을 전달하는 게 발전하면 타인의 행동에 간섭을 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반 강제적으로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상상이긴 하지만, 그때의 그 느낌 분명 그런 기분이었어.
하지만 어떻게 다시 확인하지? 본격적인 연습은 고사하고 확인이라도 해 보려면 대상이 필요하잖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을 상대로 실험해 볼 수도 없고...
똑똑똑
그때 마침 식사를 내오는 하녀가 들어왔다.
“점심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래,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입 밖으로 내뱉을 말을 그냥 눈빛과 생각으로 전달하는 정도니까. 상대방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의사표현을 골라서.
난 하녀의 눈을 마주보고 생각을 보낸다는 기분으로 마음속으로 말해 보았다.
-알아서 먹을 테니 그냥 가 봐도 돼요.
“.........”
하지만 하녀는 아무 변화 없이 묵묵히 테이블을 준비했다.
젠장. 전혀 안 통하네. 으으으 쪽팔리게 무슨 뻘짓한 거야...!! 내가 무슨 초능력자도 아닌데!! 아, 초능력자 맞긴 한가? 에이씨 몰라! 그래도 저쪽이 아무것도 모르니 참 다행일 망정이지!
.....그럼 역시 착각이었나? 아니면 그때처럼 강렬하게 생각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하나도 절박하지 않으니?
아... 어렵네. 확신도 없는 일을 무작정 파고들어 볼 수도 없고... 마법 수련만 해도 태산인데...
일단 이건 덮어 두고, 당분간은 마법수련에 매진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파이팅! 반드시 스스로를 지킬 힘을 만들 거야!!”
난 정말 열심히 마법을 연마했다. 특히 공격마법의 시전속도와 정확성 향상을 집중적으로 훈련하기로 했다.
마법의 실패로 그때처럼 속절없이 위기에 처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떤 당황스럽고 급박한 경우에도 마법이 깨지지 않도록,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력훈련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근데 어떻게 하면 집중력이 높아질까? 음...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답은 어차피 하나밖에 없었다.
무한반복!
어차피 마법을 빠른 속도로 발현해 내기 위해서라도, 수도 없이 반복해서 시전하는 연습이 필요하니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
그렇게 하루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하아... 하...”
진짜 지친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단순한 반복 연습 뿐 아니라, 움직이면서도 마법이 깨지지 않게 하려고 나중에는 뛰어다니면서까지 마법을 시전했다.
“헉...헉.. 숨차... 나 왜 이렇게 몸이 부실하지...? 마법사의 숙명인가!?”
머리가 아픈 것뿐 아니라, 하도 날뛰며 난동을 부렸더니 몸도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마법을 난사해댔으면, 연무장 벽은 이미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그리고 타깃을 정확히 맞추기 위한 연습으로, 거리를 점점 멀리 벌려가며 연습도 했다.
5미터, 10미터, 15미터, 20미터... 점점 더 멀리 멀리.. 이러다 나중에 저격수 되겠어! 큭큭큭
하지만 그러기엔 연무장이 작아 그렇게 멀리까지 연습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바람이라는 게 그렇게 고밀도로 응축된 채 수백, 수천 미터를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가 어디야... 하아... 하아.. 오늘은 더는 못해........!”
난 오늘도 역시나 바닥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오늘은 이제 그만하고 기절해도 되겠지...?
으어... 나 진짜 의지의 한국인! 근데 한국이 어디지? 환생이 한번이 아니었나? 전생의 나라 이름은 헬조선이었는데...
라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난 풀썩 쓰러지듯 잠들어 버렸다.
***
이틀 째 밤을 샜더니 좀비도 이런 좀비가 없었다.
왜 밤을 샜냐고? 항상 좋은 컨디션에서만 마법을 쓰게 된다는 보장이 없잖아! 그래서 일부러 잠을 안 잤다.
으어... 수면이 부족하니 뇌가 멈추는 기분이야. 이 와중에 마법을 시전하려니 핑핑 도네, 핑핑 돌아! 나란 년 정말 독한 년일세...!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죽도록 연습했더니, 나중에는 꾸벅꾸벅 졸면서 멍한 머리로도 마법이 절로 준비되었다.
난 역시 대단해! 굳세어라 리엘!! 꼭 강해져서 날 죽이려는 놈들 다 목을 슥삭 따주겠어! 꺄하하하하!
그리고 공격마법 뿐만 아니라 힐링도 열심히 연습했다. 리일이 죽을 뻔 했던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없게 하려면, 공격도 중요하지만 방어와 회복도 중요하니까!
물론 대상이 없으니 힐링은 나에게 했다. 근데 나한테 직접 힐링을 뿌리면 몸은 개운해지는데, 이것도 뇌를 쥐어짜는 마법이라 머리는 더 아파진다는 게 문제였다.
“에고고... 리엘 죽네...!”
내가 여기 얼마나 오래 처박혀 굴렀지...? 며칠이나 지났는지도 잘 모르겠다. 날짜를 안 세서...
리일은 잘하고 있을까? 너무 보고 싶다...
그를 떠올리니 엄마미소가 절로 얼굴에 피어올랐다. 꽃처럼 화사한 리일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힐링인데... 리일도 나 많이 보고 싶어하고 있겠지?
그가 먼저 나와 있을 수도 있으니, 나도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해서 빨리 뛰쳐나가야지!!
***
난 마법을 연습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하녀들이 들락날락 거릴 때마다 ‘리엘표 텔레파시’라고 이름붙인 짓을 꾸준히 시도해 보았다.
어떨 땐 조금 먹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이게 내 마법이 먹힌 건지, 하녀가 눈치가 빨라서 내 눈빛만 보고도 말귀를 알아들을 건지 구분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똑똑
“식사입니다.”
고민하는 사이 오늘도 어김없이 하녀가 찾아왔다.
그럼 또 시도해 볼까?
하녀는 테이블 위해 정갈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금세 음식을 내려놓은 후 말없이 꾸벅 인사하고 나가려는 하녀에게, 눈을 마주치며 강렬히 메시지를 보내 보았다.
-잠깐!!
“.....!”
어? 지금 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