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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67화 (67/134)

67. 전환점(6)

2017.02.22.

움찔한 거 맞지? 아닌가?

하녀는 자기도 자기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친 채였으니, 내가 입도 벙긋 안 했다는 걸 뻔히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환청을 들었거나 혼자 착각했다고 생각하는지, 잠시 갸우뚱거리던 하녀는 나가려 했다.

하지만 난 한 번 더 시도했다.

-멈춰!!

멈칫.

이건 진짜야! 통했어!!!

난 정신을 집중해 하녀의 생각까지도 고스란히 읽어 보았다. 분명 그녀는 자기가 왜 멈칫거렸는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정말 내 의도가 전해졌다고!! 단순 전달인지 그 이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공이야!

하지만 내가 한 짓을 대놓고 기뻐할 순 없었기에, 난 시치미를 뚝 떼며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으로 하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볼 일이 남아있나요?”

“아, 아닙니다.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휴... 안 들켰겠지? 그나저나... 꺄올!!! 성공했어! 진짜였어!!! 꺄아아악!!”

난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하녀가 이상하게 여겨서 마녀라고 소문날까 살짝 걱정도 되었지만, 이내 안심했다.

솔직히 이 정도 일 가지고 무언가 수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지 않겠어?

사람은 보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면, 자기가 피곤해서 착각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니까.

물론 여기가 리테인이었다면, 나도 절대 이런 위험을 감수하며 실험 따위 안 했을 것이다. 화형당하는 건 결코 사양이니까!

하지만 여기는 그라츠 제국. 마법으로 뭔 짓을 해도 범법행위만 아니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말 건 게 죄는 아니잖아. 내가 지금 저 하녀를 세뇌시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어... 세뇌? 잠깐, 세뇌... 요즘 이 단어가 자꾸 익숙한데...? 아, 그러고 보니... 리일과 리테인에 대해 말하면서 국왕이 세뇌라도 된 거 아니냐고 했었지?

정말 누가 세뇌라도 한 거 아냐? 어쩜 그렇게 멍청할 정도로 신전의 주구가 되어 나라를 말아먹을 수가 있지?

맹목적인 신앙심이라면 그럴 수도 있긴 한데, 그 신성력이라는 게 허구로 밝혀졌잖아. 신앙심 1도 없어도 발현되는 마나를 가지고 신성력이라고 포장하는 데, 신을 누가 믿겠어?

혹시나 싶어 떠올린 가정이지만, 이거 꽤 말 되는데?

벌떡

갑자기 든 이 생각에, 당장이라도 확인을 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리테인으로 쳐들어갈 수도 없고...

황녀전하에게 가 볼까?

그 동안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황녀가 연구하고 있다는 자료가 이게 아닐까?

내가 이걸 왜 이제야 떠올렸지?

얼마 전 리일이 황녀가 연구한다는 마법 어쩌고 말해줬을 때, 난 한심하게도 내 능력에 관한 것밖에 못 떠올렸다.

정신계열 마법에는 마나의 특수한 파동을 감지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던 말이 생각나면서, 그게 혹시 나 같은 경우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한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 틀어박혀 연습해 본 거고.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

대충 흘려듣는 바람에 잊고 있었는데, 그때 리일이 분명 그 연구가 리테인과 관계된 거라고 말해줬었어!

신전과 리테인의 결속을 끊을 방법을 황후랑 황녀가 연구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럼 정리해 보면... 그동안 황녀는 정신계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고, 알고 보니 그건 신전과 관계된 내용이었다는 거지. 그리고 어쩌면 그건 내 능력과 꽤나 연관성이 있다는 거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내가 조금 전에 단순 전달을 넘어서 무언가 강제성을 띤 간섭행위를 정말 성공시킨 거라면, 그걸 더 넘어서 누군가를 세뇌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전달, 간섭, 세뇌.

내 추측이 진짜 맞을지도 몰라!

나 같은 능력자가 또 있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잖아! 만약 그런 자가 교황청 쪽에 있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냐!"

그런데 가서 뭐라고 얘기하지? 내가 초능력이 있다고 해? 믿게 만드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런 걸 얘기해도 되려나...?

입장 바꿔서 상대가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불편하겠어? 상식적으로 평생 숨기는 게 맞긴 한데... 만약 이게 정말 일을 해결할 중요한 단서라면?

"하아..."

난 결국 연무장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고 며칠을 더 틀어박혔다. 내내 고민만 한 채 마법 수련에만 골몰했다. 하지만 결국 호기심은 내 발걸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래. 굳이 나에 대해 밝히지 않더라도, 어디서 주워들은 척 하며 연구에 조언을 줄 수 있잖아. 나와 리일의 사이를 위해서라도 이건 중요한 일이니까!

***

그동안 마법 수련을 핑계로 황녀전하의 연구도 돕지 못하고 처박혀 있던 나였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방문하자, 황녀는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리엘, 오랜만이야! 벌써 나왔네? 조금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전하. 개인적인 수련 때문에 연구도 내팽개치고...”

“아냐, 이건 엄연히 내 일인데 리엘이 미안해 할 거 없지.”

“아니에요. 저도 돕고 싶어요!”

“참, 그보다 셀리나 공주는...”

황녀는 공주를 치워주지 못해 미안한 기색이었다.

“네. 오면서 줄리에게 들었어요...”

“아깝게 되었어.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았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죠!”

이건 그냥 의미 없는 낙관이 아니었다. 내가 추리한 내용대로라면, 정말 무언가 실마리가 보이는 게 맞을 것이다.

“근데 수련은 벌써 다 끝낸 거야? 엔릴은 아직 안 나왔는데...”

“아... 머리도 식힐 겸, 연구도 도와드릴 겸 해서 잠시 나왔어요. 뭔가 생각난 게 있어서요.”

“정말!??”

황녀는 눈이 화등잔 만하게 커져서는 되물었다.

“별 건 아닌데요... 일단 추측일 뿐이지만 생각난 걸 말씀드릴게요. 저도 건너 건너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을 지도 몰라요.”

난 나에 대한 얘기는 쏙 빼고 짐작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리테인에서 지내던 시절, 어디선가 그런 능력을 가진 마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말이다.

“음. 일리가 있네. 그럼 그걸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해 보라고 할게.”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겠네요... 괜히 저 때문에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닌지요...”

“아냐, 왠지 맞을 것 같다는 감이 와. 그동안 리테인 출신인 리엘에게 다 털어놓기 힘들어서 말 못하고 있었는데 이건 사실...”

난 무엄하게도 황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전하. 리테인과 신전에 관한 일이죠?”

“.....알고 있었네?”

“황자 전하께서 말씀해 주셔서 짐작하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제가 리테인 출신인 건 걱정 마세요. 돌아갈 생각 전혀 없으니까요. 전 어떻게든 제국에 귀화하고 싶어요.”

“그럼 정말 다행이다! 앞으로는 다 얘기해 줄 테니 같이 깊이 연구해 보자.”

그 전에는 마법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자문을 구하던 황녀였다.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도, 핵심 내용은 공유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혀 섭섭하지는 않았다. 아무에게나 쉽게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테니 오히려 당연했다.

역시 후계자답게 신중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층 더 벽이 누그러진 느낌이 들었다. 비단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더라...? 아, 암살 사건 이후부터였나? 하지만 나 딱히 뭐 잘 한 거 없는 것 같은데..? 굳이 꼽아 보자면 리일을 구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정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절대 은혜를 배신하지 않을게요.”

내 추측이 맞다면, 이게 리테인과의 일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럼 공주도 치울 수 있을 테고...

***

그날 이후 난 연무장과 황녀전하의 처소를 매일같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면서 리일이 나오기를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사이 어느 정도 공격마법에 능숙해 졌고, 힐링도 꽤나 익숙해졌다. 때가 되었다 생각한 난 연무장을 박차고 나왔다.

내 특별한 능력을 써 보려면 어차피 대상이 필요했기에, 더 이상 틀어박혀 있는 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누구에게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 아직 막막했다.

그래서 난 우선 마탑에 다녀오기로 했다.

“네? 마법사로서 서임을 받으려면, 의무복무를 해야 한다고요?”

이런 제길. 생각도 못 했던 복병이 있었다.

마법사로서 능력이 있어도, 서임을 받고 귀화를 신청하려면 의무복무라는 걸 해야 한다네? 힐러로서 힐링센터에서는 2년, 전장의 힐러로 가면 1년, 공격계열로는 6개월.

아... 힐링센터에서 봉사하던 사람들이 이거였던 거야?

어느 하나도 만만한 게 없네...? 제일 짧은 게 전쟁터에 끌려가 공격마법을 담당하는 건데...

짧은 이유는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이겠지? 목숨을 걸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음... 생각 좀 해 보고 다시 신청하러 올게요.”

조작된 신분이 언제 발목을 잡을지 몰라 불안했지만, 일단은 미뤄 둔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리일과 결혼하면 자동으로 제국민이 되긴 할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결혼을 위해서는 오히려 안전한 신분이 필요했다.

그와의 사이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순간, 비올레티가 같이 죽자고 미친 짓을 할 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아직은 비밀연애 중이고 아직 밝히려면 멀었긴 하지만, 그래도 비올레티를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네... 시녀 일을 내 마음대로 그만두고 의무복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리일에게 이걸 설명하긴 좀 애매해서 어떻게든 나 혼자 몰래 처리하려 했는데...

리일은 이해 못 하겠지? 자기랑 결혼하면 장땡인데, 뭣 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냐고 말이야. 출생의 비밀과 그로 인한 내 불안감을 전혀 모를 테니까...

차라리 말해 버릴까? 혹시 이미 알고 있으려나? 아냐, 이튼 오라버니와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 같지는 않았어.

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 폭발하겠어!!

“짜증나아아아아아아아악!!!”

난 치솟는 스트레스에 소리를 빼애애액 질러버렸다.

“...... 휴우! 속이 좀 뚫리네!”

고민해봤자 소용없는 건 일단 치워놓고! 자, 그럼 이제 처리해야 할 다른 중요한 일을 해 볼까?

내키지 않아 미루고 미뤄두었지만,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남아있었다.

***

“이튼 오라버니...”

“리엘! 크게 다쳤다며! 얼마나 걱정했는데!! 왜 답장 한 통 안 했니...”

“죄송해요...”

내가 또 사고에 말려들자, 이튼 오라버니는 나를 걱정하는 편지를 수도 없이 보내왔었다. 내 일이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오라버니는 눈치가 백단이었다.

하지만 난 한 번도 답장하지 않았다. 의식이 없는 리일의 일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오라버니까지 신경 쓸 겨를이 조금도 없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중으로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런 거지...?”

“........”

사실 난 리일이 없는 사이, 오라버니를 만나 마지막 정리를 할 생각이었다.

나 좀 이기적인가...? 여기 처음 왔을 때 오라버니가 날 챙겨 줘서 얼마나 의지가 되었는데, 부담스러운 마음을 확인하자마자 가족으로서도 잘라내 버리려 하다니...

하지만 한 쪽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데, 무슨 수로 가족으로서 남겠어!?

“미안해. 널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오라버니...”

“아무튼 리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네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황자 전하가 막아주셔서 괜찮았어요.”

“황자 전하께서..?”

“네“

“리엘, 전하께서....... 전하께서 혹시.... 네게 진심인 거니?”

오라버니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한다는 듯이, 힘겹게 물어보았다.

“.......네. 처음부터 진심이셨어요.”

“축하...해 주어야겠구나.”

오라버니는 힘겹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직 비밀이니 다른 곳에는 절대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특히 비올레티에게요.”

“응. 걱정 마. 그럼 내가 그동안 쓸데없는 우려를 했네. 하지만, 리엘. 그렇다 해도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걱정이 놓이지 않아. 이번 사건도 내가 우려했던 그런 일 맞지?”

세간에는 황자를 노린 암살자였다고 발표되었지만, 오라버니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는 듯 했다.

“네...”

"리엘, 네가 원치 않는다면 물러날게.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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