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전환점(7)
2017.02.23.
"네?"
습관적으로 반문했지만, 오라버니가 입을 열어 말하기도 전에 생각을 읽어 알아버렸다.
"혹시 네가 날 필요로 할 수도 있으니 멀지 않은 곳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을게. 무슨 일 생기면, 적어도 내가 있다는 건 꼭 기억해 줘."
"오라버니..."
"그래, 난 그냥... 일종의 보험 같은 거라 생각해도 돼."
내가 오라버니에게 어떻게 그런 잔인한 짓을 하겠어요...
나 때문에 오라버니의 인생이 망가질 텐데... 고작 나 같은 걸 위해 보험 역할 하려고 그 모든 걸 감수하다니...
“아뇨! 제발 그러지 마세요!”
단호한 내 말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
“내 마음 더 이상 내색하지 않을게. 그냥 널 돕게라도...”
“아뇨! 그러지 마세요! 우리 그냥 이대로 영원히 남남이 되기로 해요.”
“리엘...”
-내가 괜한 말해서 널 가족으로서조차 잃는 구나... 차라리 영원히 혼자만 간직할걸 그랬어...
“.........”
들려오는 생각에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그것조차 안 되는 거니?”
“네...”
제가 뭔데 그런 호의를 받나요...
“......”
“죄송해요.”
“그..래... 전하와의 사이 축복할게...”
“감사해요.”
“건강히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그것만으로 기쁘구나...”
“저도요, 오라버니...”
“그럼...”
“안녕히 가세요...”
여지를 주지 않는 게 그나마 돕는 거라 생각해, 내가 먼저 딱 잘라 이별을 고했다.
남매로라도 남자는 구질구질한 거짓말 같은 건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내고 나면 마지막이 되겠지...?
“.......리엘...”
하지만 오라버니는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이었다.
“먼저 가세요...”
“.......”
차마 먼저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내가 먼저 뒤돌아섰다. 등 뒤로 멀어져가는 오라버니가 느껴졌다.
얼마나 멀어졌을까... 한참을 걸은 후에, 난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오라버니!!”
우뚝 멈춘 이튼 오라버니가, 아픈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그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부디...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고마워, 리엘. 그리고 미안해. 안녕...”
오라버니 역시 등을 돌렸고, 떠나가는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흡... 흐흑...”
내가 스스로 밀어낸 건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한때 오라버니의 여동생이었던 내 존재가, 이로서 영영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난 이제, 완벽히 고아가 되어버렸다.
***
휘익!!
“.........!!”
피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언제쯤이면 나한테 싸대기 날리는 사람이 없어질까?’ 하는 황당한 생각마저 들었다.
나에게도 좀 슬픔에 잠길 시간을 달라고!! 멜랑꼴리한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 좀 내 보자!
하지만 현실은, 오라버니가 떠나자마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비올레티의 뾰족한 목소리였다.
“네 까짓 천한 년이 감히 오라버니에게 꼬리를 쳐!!??”
이거 참 신박하게 미친년이네. 근친 분위기 폴폴 풍긴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뭐? 드디어 미쳤구나?”
“뭐? 평민 주제에 이게 어디서 감히!!”
이제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비올레티는 외궁 복도 한복판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올렸다.
탁
“이익... 이거 안 놔!?”
어떻게 악역녀의 대사는 저리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지... 너도 참 개성이 없다.
“비올레티. 네 이름에 달린 가문의 성이 소중하다면, 그 가벼운 입은 좀 닥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뭐...뭐?”
“상황 파악 좀 하라고.”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흘긋대며 이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비올레티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을 나에게 바싹 디밀며 윽박지르듯 말했다.
“너 따위가 오라버니와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
“뭐?”
“지난번에 다 들었어! 전하께 꼬리치다 안 되니까 오라버니를 꼬신 거잖아!”
난 정말로 어이가 없어서 싸늘하게 조소를 내뱉었다. 슬쩍 비틀린 입 꼬리, 한심하다는 눈빛, 그리고 피식 새어나오는 비웃음. 이 세 가지가 합쳐졌으니 아마도 난 지금 최고로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일 거다.
“비올레티, 내가 넌 줄 알아?”
“뭐야!?? 너 말 다했어?
”정신 차려. 어릴 때부터 짝사랑해온 건 알겠는데, 이제 넌 이튼 오라버니와 남매라고. 나랑 달리 진짜 남매. 핏줄로도 법적으로도. 네가 제정신이야?”
“...내가... 내가 못 가진다고 너에게 줄 것 같아!!!!?”
“오라버니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준다 만다야?”
“적어도 내 오라버니야! 오라버니가 너 같은 천한 것에게 진심일 리가 없잖아! 황태자 전하도, 오라버니도 다 널 가지고 노는 것뿐이라고. 너야말로 꿈 깨!”
“그래 그렇다고 쳐. 그래서 밀어냈잖아. 뭐가 더 불만인데?”
“네까짓 게 뭔데 오라버니에게 상처를 주는 거냐고!!”
“하아...”
참 돌겠네. 넘보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좀 전에는 또 오라버니가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 하더니, 이젠 내가 상처를 줬다고 소리를 지르네...
정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내가 널 가만히 둘 줄 알아?”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안 계실걸!? 넌 당장 쫓겨날 거야.
“그래그래. 백작부인께 이르든 말든 마음대로 해. 나도 영원히 백작가에 붙어있을 생각 없다고.”
“너...! 큰소리 친 거 반드시 후회하게 해 주겠어!!”
어휴, 도저히 말이 안 통했다. 미친년은 매가 약인데 이걸 때릴 수도 없고. 이럴 땐 무시가 상책이었다.
“네 헛소리 들어주기도 지겨우니 한 마디만 할게. 난 오라버니를 한 번도 그런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어. 여태껏도, 앞으로도 영원히.”
“..........”
“그러니까 너나 주제파악 잘해.”
“뭐야!? 건방지게!! 황자 전하 곁에서 알랑방귀 뀐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함부로 거만 떨지 마! 절대로 너 잘되는 꼴 두고 보지 않을 거야!!!”
흐유... 굳이 그렇게 선전포고 안 해도 이미 다 예상하고 있거든...? 그래서 열심히 살 길도 찾고 있고.
“두고 보기 싫다니 잘됐네. 우리 피차에 불편한 거, 이제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그래! 너 따위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면 좋겠어!!”
그 말을 끝으로 비올레티는 휙 몸을 돌려 떠났다.
“.........하아...”
미움 좀 그만 받고 살고 싶다.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다니, 마음이 쓰렸다.
나도 리일처럼 사랑만 받고 살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에게 끌린 가장 큰 이유는, 그 햇살처럼 밝고 순수한 천진난만함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
아... 보고 싶다 리일.
* * *
리일을 기다리는 동안, 난 줄리한테 내 비밀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모험이다 싶긴 했는데, 생판 모르는 남들한테 이런 저런 짓 시도하다가 들키느니 믿을만한 줄리가 낫다는 심산이었다.
“.....리엘. 소설 써?”
“........”
“아니면 농담?”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에이, 세상에 그런 능력이 어디 있어...”
“진짜야. 하지만, 나... 절대로 네 생각은 멋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어!”
물론 초반에는 몇 번 그런 적 있긴 하지만, 가식 없는 줄리의 모습에 내 뇌도 쉬게 해 줄 겸 나중에는 정말로 거의 안 했다.
그리고 지금은 능력이 발달한 만큼 자유자재로 조절도 잘 해서, 살짝만 집중해도 쉽게 읽을 수도 있고, 반대로 눈이 마주쳐도 얼마든지 안 읽을 수 있다.
물론 너무 강렬하게 전해지는 건 집중하지 않아도, 아니 차단하려 해도 눈만 마주치면 절로 흘러들어올 때가 있지만 말이다.
“.......이, 이거 진짜야? 장난치는 거 아니라?”
“으응......”
“그럼 내가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아?”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나를 향한 생각을 떠올린다면, 일부러 거부하지 않는 한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줄리에게서 느껴지는 생각을 애써 차단하고 있었지만, 줄리의 물음에 살짝 열어보니 바로 느껴졌다.
“.........‘얘가 미쳤나...’ 하고 있구나? 나 안 미쳤거든!?”
“우와!!!! 진짠가 보네? 아냐아냐, 솔직히 그런 말 하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나 이렇게 생각한다고. 나라도 눈빛만 보면 맞추겠다!”
“그럼 다른 거! 아, 조건이 있어. 내 눈을 잘 보고, 나를 향해서 생각을 떠올려야 해. 꼭 나에 대한 생각일 필요는 없지만 나에게 말을 걸듯이 나를 향해서 말이야.”
“으음?”
“그니까, 예를 들면.... ‘공주 정말 싫어!’ 라고 혼잣말 하듯이 떠올리면 내가 못 들어. 그런데 나한테 말하듯이 떠올리면 들린다는 뜻이야.”
“아하? 그럼 해 볼게. 초능력이 아니면 절대 못 맞추는 걸로.”
줄리는 재미있다는 듯이 똘망똘망 눈을 뜨고는 생각을 보내왔다.
-내 입을 막고 싶다면 초코무스 3단 케이크를 바치시오!!
“어. 사줄게. 많이 많이 사 줄게!! 우리 줄리님 입을 막는 대가로 초코무스 3단 케이크 얼마든지 사드리겠습니다!”
“지, 지지지지진짜 들리는 거야?”
“네네.”
“..........”
“줄리...?”
역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닌 듯, 줄리는 한참을 말없이 멍해 있었다.
“줄리... 괜찮아?”
“아... 조금 놀라긴 했어. 진짜였구나...”
“응.. 미안. 혹시 그동안 말 안 해서 화... 많이 났어?”
“어어... 그게... 황당하긴 한데...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이해도 가네. 쉽게 떠벌리고 다닐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래도 미안...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 정말 네 생각 마음대로 읽지 않았었어.”
“정말... 이야?"
"진짜!"
"...저기 리엘”
“응.”
"그럼 딱 하나만 물어볼게."
"으응? 뭔데?"
줄리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리엘, 너 내가 황자 전하 좋아하는 거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