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전환점(8)
2017.02.24.
“리엘, 너 내가 황자 전하 좋아하는 거 몰랐어?”
“뭐!!?”
“정말 몰랐어?”
“주, 줄리... 그, 그게 저..정말이야?”
“응.”
“......”
“모르는 걸 보니 정말 내 생각 한 번도 안 읽었나 보네?”
“.......으응...”
“알았어. 믿을게.”
“........”
내가 한 번도 줄리의 생각을 안 읽었다는 걸 믿어줘서 고맙긴 한데... 하지만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줄리가 리일을...? 정말?? 난 완전히 혼란에 빠져 멍하니 똑같은 생각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그때,
“풉...하하! 거짓말이야.”
줄리가 날 퍽퍽 치며 마구 웃었다.
“....뭐?”
“황자 전하 좋아한다는 거 뻥이라고.”
“......뭐!!?”
“미안. 떠 본 거야.”
“떠 보다니?”
“네가 정말 내 생각 안 읽었는지 덜컥 불안해져서 말이야.”
“아...”
“거짓말로 떠 봐서 미안해. 하지만 당장 떠오른 방법이 그것 밖에 없어서...”
“......”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 아니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 그러니 네가 내 생각 읽어봤다면, 황자 전하를 좋아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아까 같이 반응하지는 않았겠지.”
“그렇구나... 가 아니라! 뭐라고? 사, 사귀는 사람?!”
“응...”
줄리는 쑥스러운 듯 베시시 웃었다.
“왜 여태 말을 안 했어!!”
“하려 했는데 기회가 안 나서... 사귄 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거든. 근데 갑자기 네가 암살사건에 휘말리고, 그 후에 갑자기 어딘가 틀어박혀 사라졌다 돌아오니 지금인 거야.”
“그랬구나... 아무튼!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좀 말해 봐!”
줄리는 짧고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검술대회에서 한 눈에 반한 기사님이 있었는데, 혼자 연모하던 중 본궁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이렇고 저렇고 사이가 발전되었다나...?
“맞다. 내가 검술대회 때, 그 기사님을 쫓아가려다가 황자 전하를 딱 만났던 거야! 역시 우리 둘 다 운명인 것 같지 않아?”
“어? 진짜?”
“응!”
“근데 줄리, 아까 황자 전하 좋아한다고 한 거 말이야. 내가 네 생각 읽어서 거짓말인 거 알고도, 일부러 안 읽어본 척 시치미 떼고 반응하면 어쩌려 했어?”
“에이, 그건 힘들지. 아무리 재빨리 연기하려 해도, 즉각적으로 나오는 반응이랑은 다른 걸? 넌 0.1초 망설임도 없이 깜짝 놀라던데? 내 생각 읽어서 거짓말인 거 미리 알고 있었다면, 놀라기 전에 의아한 표정이 먼저 떠올랐어야지.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말이야.”
“.......그렇네.”
줄리가 생각보다 똑똑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어...
“아무튼 놀라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황자 전하한테 전혀 마음 없으니, 그건 정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앞으로 들통 날 거 내가 널 뭐 하러 속이려 들겠어? 안 그런가요, 초능력자 리엘양?”
“아. 응... 그리고 미안하긴... 내가 더 미안하지...”
처음에는 네 생각 몇 번이나 읽었거든! 이걸로 퉁 치고 넘어가자... 하하하.
“응? 뭐가 미안한지는 몰라도, 아무튼 내 생각 마음대로 안 읽어줘서 고마워. 하지만 정 불안하면 내가 특별히 허락해 줄께! 앞으로 아주 가끔 내 생각 읽어도 돼! 나도 사실 찔리는 게 많아서 겁나긴 하는데...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고맙긴, 당연하지. 넌 내 친구인데... 그리고 앞으로도 안 그럴게. 그건 매너가 아니잖아! 근데 뭐가 그렇게 찔리는데?”
그런데 그 매너 없는 짓을 리일한테는 맨날 했었다니... 나 진짜 나빴구나. 물론 지금은 안 한지 꽤 되긴 했지만...
“어? 아... 가끔 야한 생각이라던가... 아하하하하... 리엘은 전하와 어디까지 가봤을까 라던가...”
“꺅! 줄리!!!”
난 베개로 줄리를 퍽퍽 때렸다.
“미..미안! 아무튼... 그러니까... 아! 그래서 네가 황자 전하의 정체를 계속 몰랐구나?”
“응?”
“나랑 검술대회 다녀온 날 말이야. 그때 내 생각을 멋대로 읽어봤다면, 네가 말한 기사님이 황자 전하라는 걸 너도 바로 알게 되었을 거 아냐.”
“응. 그렇지.”
“너 며칠이 지나도 계속 모르기에 나만 얼마나 간 떨어졌는지. 맨날 내 앞에서 리일 리일 거리는데... 아차,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실수 실수!”
“쿠쿡.”
입을 톡톡 치는 줄리가 너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담쓰담 해 버렸다. 난 그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태연히 속으로 리일리일 거렸는데...
“간지러..! 리엘은 가끔 엄마같이 군다니까...?”
맞아. 합산 나이는 엄마뻘이야. 정신연령이 바닥이라 문제지...
“아하하하...”
“아무튼 신기하다. 아, 나뿐만 아니라 전하의 생각도 안 읽었나 보네? 처형장에서 알게 되었다고 했지? 근데 그때 기분이 어땠어? 죽기직전에 전하께서 딱 나타나서 널 구해 주시고, 드디어 정체도 알게 되고.. 완전 로맨스 소설 같아!!”
“음... 그게.. 어땠냐면...”
사실 이미 알고 있어서 정체를 알게 된 놀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살았다는 안도감 밖에 없었다.
“어땠냐면..?”
“그냥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지. 아하하하하...”
오늘따라 웃음소리가 점점 뻘쭘해지는 것 같은데...
“에이, 뭐야 그게...”
“그냥 뭐... 아무튼 앞으로도 네 생각 절대 안 읽을게! 약속!”
“응! 나도 네 비밀 꼭 지켜줄게! 아, 대신 우리 비밀신호 만들어 놓자!”
“비밀신호?”
“왜... 내가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처럼 리엘에게 말 걸 수 있게 말이야. 내가 윙크를 두 번 하면 내 생각을 읽어보라던가...”
“풉. 뭐야 그게...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았어! 기억해 둘게!”
우리는 그 후에도 한동안 수다를 떨었다. 대화 주제는 역시나... 야한 이야기였다. 서로 어디까지 해 봤냐는 둥, 키스의 느낌이 어쩌고, 진도가 어쩌고... 꺄악!! 역시 나만 밝히는 게 아니었어!!
아무튼 비밀을 털어놓으니 꽤 후련했다. 그리고 줄리는 이 능력에 대한 내 긴긴 추론을 듣더니, 흔쾌히 연습상대가 되어 준다고 수락했다.
많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줄리의 반응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 정말 안심이었다.
당분간은 꾸준히 연습해야지! 조금 더 숙련되고,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게 익숙해지면 더 나아가 이것저것 해 봐야겠어!
* * *
긴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리일이 나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는,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게다가 예전과는 기도도 남달랐다.
“리일...!!”
반가움을 주체 못한 나는, 도도도도 뛰어가 그에게 풀쩍 안겼다.
“리엘!!!”
내가 달려가 안기자, 리일은 나를 번쩍 들어올리며 뱅글뱅글 돌렸다.
“으갸걋! 어, 어지러워요!!”
난 한참 빙빙 돌다가 간신히 리일의 품에 다시 안착했다.
“미안, 너무 반가워서... 정말 보고 싶었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마주 안아주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진한 소년에서 훅 어른이 된 느낌이었다.
“저도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얼굴 까먹을 뻔 했잖아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요?”
“미안해. 나도 보고 싶어서 참 힘들었어.”
“다시 만나 정말 기뻐요!!”
그의 품에서 살짝 떨어져, 오랜만에 보는 그의 모습을 요리저리 살펴보았다.
왠지 모를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실제로 키가 엄청 자라거나 골격이 확 발달한 건 아닌데, 그냥 어쩐지 그랬다.
얼굴이야 여전히 잘 생겼고! 으아... 새삼 다시 한 번 반하겠어! 침이 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내 꺼라니! 봉 잡았다!!
“나도, 리엘...”
그..그런데 지금 우리 자세가 좀 야했다.
나를 양손으로 번쩍 들고 돌리던 리일은, 그 자세 그대로 나를 품에 내려놓았다. 한 마디로 난 지금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있듯이, 리일의 허리에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나마 리일이 서 있는 상태라 덜 야한 거지, 누워있는 거라면...
이게 그러니까... 아기가 하면 그저 귀엽고 흐뭇한 모습인데, 다 큰 성인남녀가 이러고 있으니까 은근히 색정적인 것이... 으아악! 내가 머릿속에 음란 마귀가 껴서 그런 건 아니겠지?
“리, 리일... 저...”
“리엘...”
리일 역시 음마 한가득인 듯, 마주한 그의 얼굴이 훅 다가오기 시작했다.
“......으음...”
오랜만의 키스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아...”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이 자세는 꽤나 야한 자세였다. 누워있지 않아도 충분히 에로틱했다. 아니, 서 있어서 더 야릇한 것 같았다.
나를 안고 있기 위해서는, 리일의 두 손이 어쩔 수 없이 내 허벅지를 단단히 받치고 있어야 한다. 그 상태로 키스를 하니... 자연스럽게 엉덩이로 손이 쑥 들어올 분위기였다.
“리일...”
그리고 리일이 고개를 숙이면, 딱 내 가슴에 얼굴이 파묻힐 위치였다.
“하아... 리엘...
“으음.. 하...”
“하아... 으읏...”
녹는 듯 황홀한 키스를 만끽하던 중, 문득 그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난 슬쩍 눈을 뜨고 역시나 비슷한 황홀경에 빠져있는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짓궂은 표정으로 그를 관찰하다가, 문득 눈을 뜬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연한 바다빛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스쳐지나갔다.
“으악, 리엘, 눈! 눈!! 감아야지!!”
“왜요? 보면 안 돼요?”
소녀다운 순수함과는 일억광년 쯤 떨어진 짓이었지만, 난 그래도 눈 뜨고 키스하는 게 더 좋은데...
“부..부끄럽잖아... 내 표정이...”
“표정이 뭐 어때서요. 잘생기기만 한데...”
물론 눈을 감으면 감각이 더 잘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촉감보다는 시각적 만족감이 더 중요하단 말이야!
“하지만... 읍...!”
자꾸 딴죽 거는 그의 입술을 콱 덮어버렸다. 작고 앙증맞은 내 입술이지만, 그 하나쯤 꿀꺽 삼키는 건 일도 아니었다.
“흐읏..... 아...”
어느새 리일은 한 팔로만 나를 받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움찔거리며 내 가슴 쪽으로 오고 싶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온힘을 다해 참고 있었다.
저 손을 콱 붙잡아 가슴에 턱 올려주면 쟤가 훅 가버리겠지? 이성이고 자제고 나발이고?
막 엉큼한 생각을 실행에 올리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