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데이트(2)
2017.02.27.
뻔뻔하게 소궁으로 옮긴 우리는, 하루 종일 뻔뻔한 짓을 해 댔다. 아직 해가 안 떨어져서 차마 그 이상의 진도를 못 빼고 있는 것뿐, 바깥이 깜깜해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안 봐도 뻔했다.
“하아...”
하도 키스를 해 댔더니 입술이 붕어가 된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공주한테 쳐 맞아서 붕어처럼 부었는데, 이제는 황자님과의 뽀뽀로 탱탱 붓다니! 인생역전!! 이예!!!
그리고 입술은... 차라리 양호한 편이었다. 목덜미에 생긴 키스마크는... 꺄아악!
아까의 므흣한 순간을 떠올리며 꺅꺅대고 있는데, 갑자기 리일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했다.
“맞다, 리엘. 어마마마가, 내가 나온 기념으로 오랜만에 가족끼리 다 같이 식사나 하자고 하셔. 리엘도 같이.”
“네? 저, 저요?”
“응. 같이 오라 하시는데?
“.........”
체한다고! 백 퍼센트 체한다고!!
하지만 난 ‘생각해 볼게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불편해...?”
그걸 질문이라고 묻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네.”
“헉... 정말? 많이? 그럼 좀 더 편하게 대해 주라고 내가 얘기...”
“하지 마세요!!”
아 진짜 눈치도 없어!! 넌 다 좋은데 이게 좀 문제라고! 시월드라는 생각 안 드냐고!
아까 칭찬한 거 다 취소!
남자라서 둔한건지, 신분차로 쫄아 붙는 내 심정을 몰라서 그러는지, 얜 정말 좀 정신교육이 필요해 보인다.
“응? 왜?”
“가..갈게요! 갈 테니까 아무 말씀 드리지 마세요. 제발!!”
“으응...”
뭐, 나 실드 쳐주는 게 얘 주특기니까, 아무래도 괜찮겠지!?
“근데 언젠데요?”
“오늘 저녁.”
......빨리도 말한다 이 망할 황자님아! 지금이 저녁 직전이잖아!
***
급작스럽게, 난 정말로 황제를 비롯한 황실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으으... 엄청 부담스러워! 소화제 미리 챙겨야 하는 거 아닌가..?
“리엘, 그냥 편안한 자리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고...”
“....아, 네...”
리일의 손을 잡고 난 긴장된 마음으로 식사장소로 향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공간, 높다란 천장과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으리으리한 긴 테이블,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중한 시종들, 입 한번 벙긋하기도 어려운 엄숙한 분위기, 한편에서 연주되는 장엄한 음악 소리, 눈이 돌아갈 정도로 화려하고 복잡한 식사 코스...
...등등을 상상했는데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아니, 180도쯤 달랐다.
“여기.. 맞아요?”
잠시 본궁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리일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간 곳은, 원래 있던 소궁의 후원이었다.
“응. 여기 소궁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내가 아까 얘기 안 했나?”
“.......”
어. 안 했어.
“아차, 미안. 아무튼 여기야. 그리고... 여긴 가족 외에는 네가 처음이야!”
아... 정말정말 영광이긴 한데, 눈앞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황당해서 난 그저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엔릴! 늦었구나, 어서 오렴.”
밝게 웃으며 맞이하는 황후 옆에 황제가 있었다.
무려...
모닥불에 열심히 바비큐를 준비하면서 말이다.
“..........“
그러니까, 황제는... 한 마디로 고기를 굽고 있었다.
“리엘?”
으악, 내가 미쳤지!
“두, 두분 폐하를 뵈옵니다!!”
“함께 식사하는 건 처음이지? 마음 편히 있으렴.”
황후는 다정히 말했고, 황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던 일을 마저 했다.
그리고 난 어찌할 바를 몰라 안절부절 못했다.
뭐지 이 상황...?
다들 익숙한 광경인 듯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려 보니 황녀는 동생과 놀아주느라 바빠 보였고, 리일은 도와주는 건지 훼방 놓는 건지 모를 짓을 하며 장작을 들쑤시고 있었다.
시종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아주 멀리 군데군데 떨어진 기사들 외엔 딱 가족들 밖에 없었다.
그러니 시녀라는 존재는 나밖에 없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리엘, 불이라 위험하단다. 레이디들은 그냥 가만있으렴.”
“하..하지만...”
황후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가만히 있자니 진짜 불편했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시녀 주제에 감히 황제의 서비스를 받다니... 가시방석도 이런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쩔쩔매는 내 표정을 보았는지, 리일이 나서 주었다.
“저도 잘 구워요. 아바마마, 제가 할게요.”
“엔릴, 넌 매번 태워서 못 믿...”
“안 태울게요!!”
속절없이 자리를 뺏긴 황제는 묘한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며 불구경을 했다.
“후훗. 리일이 정말 다 컸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금슬 좋은 부부는 자기들끼리 핑크빛 분위기를 풍기며 와인을 주고받았다.
아.. 정말 멋진 한 쌍이다...
그러고 보니 황제랑 황후도 연애결혼이라고 했지? 딱 봐도 정략결혼일 것 같은 배경조합인데 연애결혼이었다니 정말 의외다... 저렇게 조건 딱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에 빠지다니, 거 참 신기한 일일세...!? 어쨌든 멋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잘것 없는 내 신분에 새삼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휴... 저 분들 정말 환생자 뭐 이런 거 아니까? 혹시 그 덕에 날 용납해 주시는 건가? 아니면 리일한테 미안한 마음에 딱 잘라서 나를 반대하지 못 하시는 걸까?
멍 때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리일이 날 슬쩍 미는 게 느껴졌다.
“리엘, 불똥 튀겠어. 저쪽에 앉아 있어.”
“하..하지만...”
뭘 해도 어색한 난, 리일 옆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애꿎은 장작만 들쑤셨다.
“리엘, 불장난 하면 밤에...”
“으악! 그 다음 말은 제발..!”
난 셀리나 공주가 아니라고! 아, 걘 대낮에 오줌 쌌지...
“쿡쿡, 미안.”
한참 이리저리 바비큐를 들쑤시던 리일은, 이리 저리 골고루 잘 익힌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주었다.
“거 봐요. 안 태웠죠?”
“그래. 잘했다. 이제 너에게 맡기마.”
장성한 자식 덕에 드디어 구이맨 역할에서 탈출한 황제의 목소리였다.
“헉, 알겠어요. 렌! 그만 놀고 이리로 와! 누나도!!”
리일이 부르자 황녀는 잔디밭에서 뒹굴던 막내황자를 질질 끌고 왔다.
모두가 모이자 드디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의 어색함도 많이 누그러지고 어느새 난 자연스레 고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긴장해서 하나도 못 먹을 거라는 당초의 예상과 다르게, 고기는 입에서 살살 녹아 순식간에 사라졌다.
분위기도 꽤 부드러워졌다. 아니, 원래 부드러웠는데 괜히 나 혼자 느끼기에 말이다. 역시 먹을 것은 사람을 너그럽게 만들어 주는 법!
“어마마마! 나도 여자친구!”
입만 열면 폭탄발언인 막내 로렌이, 오늘은 꽤 정상적인 발언을 했다.
“넌 아직 너무 어려.”
그러자 여친 있다고 콧대가 으쓱해진 리일이 동생을 구박했다. 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자랑하듯 흔들어 보이며 말이다.
덕분에 내 얼굴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힝...”
“우리 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랑 결혼한다더니... 벌써 여자 친구가 좋은 거야? 엄마 섭섭한데...?”
“어마마마가 제일 좋아요! 근데 어마마만 아바마마 꺼잖아!”
“어머, 후훗. 그래서 얼른 여자 친구 만들고 싶어?”
“네!”
“그래그래. 어서 커서 만들렴.”
“피잇!”
쀼루퉁해진 로렌은 볼을 부풀리며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리.. 전하. 이것 좀...”
“아, 내가 먹지도 못하게 방해했네.”
그런 게 아니라 민망해서였지만, 어쨌든 그가 손을 놔주자 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고기를 구우랴, 식사를 하랴 바쁘던 리일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황제에게 물었다.
“아바마마. 레이튼 경이 떠나기로 했다면서요?”
“그래. 어젯밤에 와서 말하더구나. 너도 다 컸고, 검도 꽤 쓸 만해 졌으니 굳이 더 붙잡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그가 떠나면 엘이 참 섭섭하겠어요. 마가렛도 어제 작별인사 하러 왔더라고요.”
레이튼 경? 리일의 검술 스승님? 그리고 마가렛?!!
아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기에, 나도 귀를 쫑긋 기울였다.
하지만 뭐라 더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화제는 전환되었다. 황녀가 하필 우리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리엘, 둘이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
“그치? 누나 요즘 내 맘에 쏙 드는 말만 하네?”
“으휴... 저걸 누가 데려갈까 싶었는데, 그래도 임자가 있긴 있네.”
“누나!!”
황녀의 면박에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하하하”
“호호호”
이제 화제는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옮겨졌다.
“리엘, 음식은 입에 잘 맞니?”
“네, 네! 고맙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불편해 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배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물론 여전히 긴장한 티가 팍팍 났다. 내가 어색해 하는 걸 눈치 챈 황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소박한 식사는 금방 끝났고, 의자에 앉아있기 지루했던 렌은 이미 풀숲으로 뛰쳐나갔다.
황자들은 어려도 다 그림처럼 의젓하고 얌전하게 앉아있을 줄만 알았는데, 얘는 전혀 아니었다. 그냥 딱 초딩 같았다. 리일이 왜 이렇게 컸는지 알 법하달까...?
“그럼 우린 차를 한 잔 할까?”
황송하게도 황후는 직접 차를 준비해 주었다. 황제는 사양했고, 찻잔을 든 황후는 그의 손을 잡고 잔디밭에 편히 앉았다. 황녀는 그 옆에 비스듬히 앉아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나와 리일은 테이블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차를 마셨다. 진짜 그림 같은 장면이었다. 가족의 모습...
갑자기 유모였던 우리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 나 때문에 죽은 내 엄마...
너무나 부러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그 화목한 풍경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닮았군...
급히 고개를 숙였지만, 요즘 들어 더욱 발달한 능력 덕인지 찰나의 순간 생각이 들려왔다.
근데 저게 무슨... 뜻이지? 닮았다니..? 누구와?
“리엘, 여기 마음에 들어?”
하지만 리일의 질문 때문에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네. 물론이에요. 정말 따뜻하고 평화로운 곳이에요.”
“누굴 초대한 건 처음이었는데 다행이다.”
“아...”
물론 초대받기도 전에 무단침입해서 온갖 짓을 다 하긴 했지만... 아무튼 영광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소궁은 거의 황제 부부 전용으로, 그나마 가끔 가족들을 들이는 것 외에는 절대 누구도 들이지 않는다 했지? 그럼 나 이제 가족의 테두리 안에 들어오게 된 건가...? 확실히 오늘 그 전과는 달라진 느낌이 들긴 했다.
근데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거지...?
아, 혹시! 그날 밤, 리일과 함께 황제에게 찾아갔다 온 것 때문인가? 근데 나 그다지 잘 보일만한 짓 한 거 없는 것 같은데...?
“리엘, 앞으로도 자주 놀러올까?”
“하지만 그건...”
“잠깐만, 내가 물어볼게. 어마마마! 저 리엘이랑 여기 단둘이 놀러 와도 돼요?”
예의도 없이 멀리서 소리쳐 물었지만, 황후는 나무라지 않고 웃으며 답했다.
“후훗. 그러렴. 얼마든지 괜찮아.”
“고맙습니다, 어마마마!”
“전하..! 그런 걸 여쭈면 어떻게 해요!?”
난 그에게 속삭이며 티 안 나게 눈을 부라렸다. 그리고 이미 침범했는데 이제 와서 뻔뻔하게!
“왜, 괜찮다 하시잖아. 그리고 그때 허락받고 오라며. 이제라도 받았으니 됐지 뭐.”
“제, 제가 언제요!”
“저번에...”
“그런 적 없어요! 어휴, 참... 이러다 저 미움 받겠어요.”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해?”
“그게... 몰라서 물으세요?”
“아바마마 때문에 그래? 말씀이 영 없으셔서?”
“아뇨! 그게 아니라...”
한 번도 남 눈치를 보고 살아보지 않은 리일은, 찍힐까봐 걱정되는 내 마음 따위 모르는 것 같았다. 내 동생이었으면 등짝을 한 대 후려갈겨 주는 건데!
“아바마마가 원래 낯을 가리셔서 그래. 싫어하시는 게 아냐.”
아 진짜 산 너머 산이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말이 되냐고... 황제가 왜 내 앞에서 낯을 가려! 황제는 그 누구도 불편해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말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한참 떨어져 있는데도 우리의 투닥거림이 들린 모양이었다.
“원한다면 아예 새로 하나 작은 궁을 지어줄 테니 전용으로 쓰려무나.”
뜨허어... 스케일이 달라. 미친 스케일! 역시 로열 패밀리, 아니 임페리얼 패밀리!!
정말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리일 말대로 날 싫어하지는 않는 게 맞나 보다.
***
식사 후 차까지 한 잔 하자, 바쁜 황제와 황후는 금방 돌아갔다. 황녀도 막내황자를 데리고 떠나니, 소궁에는 이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다.
리일은 이왕 온 김에 둘이 더 데이트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날도 어둑어둑해 졌으니 진도를 빼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내 손을 잡고 안쪽의 방으로 이끌었다.
드디어... 하, 합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