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데이트(4)
2017.03.02.
“왜요!?”
“아..아냐!”
“무슨 일 있어요?”
“그게...”
-망했다. 마지막에 조심해야 한다고 아바마마가 신신당부했는데!
꾸엑, 황제한테 신신당부 들었구만? 자기처럼 사고치지 말라고...
에이, 애가 뭐 그렇게 한방에 들어서겠어? 그래도 앞으론 조심해야겠다.
“그게... 별 거 아냐! 아무튼 리엘,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나랑 결혼해야 해!”
“쿨럭... 겨.. 결혼.. 아.. 네...”
***
우리는 아쉬움에 한참을 더 뒹굴 거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고, 눈을 떠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짹짹짹
숲속의 상쾌한 공기를 느끼며 새소리와 함께 눈을 뜨는 기분은 아주 낭만적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별장을 짓는 구나... 황궁 부지 안에 뭣 하러 또 별궁을 짓나 했는데, 갑갑한 본궁과는 느낌이 확 달랐다.
“리엘, 잘 잤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리일의 얼굴이 보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런 얼굴을 쳐다볼 수 있다니... 내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어! 아니, 전생은 아니니까 전전생 어디쯤에서 그랬나 보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도...”
거기까지 말한 리일은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아, 우리 어제... 사고 쳤지!
나 역시 귓가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리, 리일...”
이 오글거리면서도 어색한 분위기 어쩌지...
하지만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내 입술을 덮쳐버린 리일 덕에 말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으읍..!”
아침부터 끈적끈적한 분위기라니... 말똥말똥 눈을 뜨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눈이 스르르 감겼다.
“하아... 리엘...”
리일과의 키스는 언제나 뜨겁고 또 황홀했다. 난 적극적으로 그를 끌어안으며 촉촉한 입술을 받아들였다. 입안 구석구석을 건드리는 느낌은 언제 느껴도 참 짜릿했다.
“리일......”
그렇게 키스를 음미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돈 난 입을 살짝 벌려 말캉한 그의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어 주었다.
“아읏.. 리엘...”
내 행동에 더 자극받은 건지, 리일의 손가락이 점점 목덜미를 훑고 내려오며 가슴께로 다가왔다.
“리엘... 사랑해...”
리일이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탄탄한 그의 팔이 나를 부드럽게 끌어안자, 내 몸은 자연스럽게 또 침대로 기울어져갔다.
“아.........”
아침부터 또...?
그런데 한참을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리일이, 힘겨운 듯 몸을 떼어내며 말했다.
“하아... 이제 돌아가자.”
“....네?”
갑자기 왜 뚝 잘라먹어?
“미안, 안 그러려 했는데 내가 자꾸...”
“........”
“아직 아플 텐데 미안. 이젠 정말 자제할게.”
아, 그런 거였구나... 흥분해버린 나머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어제가 첫날이었는데 좀 과격하게 해버렸으니 아직 무리였다.
“....고마워요.”
난 얼굴을 화악 붉히며 말했다.
갑자기 어젯밤이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으아악!! 나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야! 리일이 뭐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능수능란하다니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지?
설마 별 의심 안 하겠지? 내 속내가 시커먼 아줌마라던가... 뭐 그런 건 상상도 못 할 테니까? 그래, 끽해야 내가 야설 좀 많이 읽었나보다 하겠지... 아니면 음... 아, 리테인에서는 성교육을 쫌 진하게 하나 보다 생각하려나?
몰라! 아무렴 어때! 처녀인 거 알면 됐지! 리일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런 거 많이 따질 텐데, 다행히 침대에는 혈흔이 선명했다. 혹시라도 개인차(?) 때문에 없을까 걱정했던 난 내심 안도했다.
아니아니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순진한 어린애를 덮쳐서 사고 쳤어! 그것도... 황후폐하 소유의 궁에서!
우리 참 진상이었구나... 이러라고 빌려준 게 아닐 텐데 휴...
그래도 그나마, 부모자식 간에 침대까지 공유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것도 그런 용도로...
리일 녀석도 양심은 있었는지, 마스터 베드룸 대신 게스트룸 중 하나로 나를 안내했었다. 그래도 너무 죄송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 도...돌아갈까?”
그 역시 민망했는지, 본궁으로 돌아가자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네. 아으윽...”
어제 역시 너무 무리했던 건지, 통증 때문에 절로 걸음걸이가 어기적거리게 되었다. 걸을 때마다 아래가 찢어지는 듯 아팠다.
“리엘.. 괜찮아? 내가 안고 갈까?”
“안 돼요!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 되는 소리에요?"
하지만 이러다 정말 다 들키겠다 싶긴 했다.
번쩍
“으악!! 리일!!”
하지만 리일은 제멋대로 나를 안아들었다.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로 말이다.
“꺅! 놔 줘요!!”
“이렇게 힘들어 하는데 어떻게 그냥 두고 봐?”
“괜찮다니까요? 누가 보면 우리 사이를 다 눈치 채겠어요!”
“어차피 공주는 요즘 얼씬도 안 하잖아.”
“그래도...”
“....알았어. 정 불편하면 안 할게.”
날 살며시 내려놓은 리일은, 그 대신 걷기 힘들어하는 내게 팔을 내밀어 부축해 주었다.
“고마워요.”
첫날밤을 보낸 우린 서로 꿀이 뚝뚝 하트가 뿅뿅 나오는 시선을 주고받으며,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처소로 향했다.
민망한 어딘가가 아프다는 것만 빼면 아주 상쾌한 아침이었다. 본궁 근처의 정원 앞에서 황제를 딱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 아, 아바마마”
여친이랑 외박하고 왔다가 걸린 아들내미처럼, 리일은 지레 찔려서 버벅댔다.
“화..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나 역시 찔끔해서 소심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엔릴”
아, 아까 리일 말 들을걸... 황제를 맞닥뜨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안겨 올 걸 그랬어. 이렇게 사고 친 티 다 내면서 어기적 걸어오지 말고...
“아하하...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그럼 저흰 이만...”
“엔릴. 리엘과 잠깐 할 말이 있으니 넌 먼저 들어가 보거라.”
“......네? 저 말고 리엘한테요? 무슨 일인데요?”
“넌 몰라도 된다.”
젠장. 저렇게 말하니 뭔 소리를 들을지 더 겁나는데...?
“.......네.”
아무리 망나니 황자인 리일이라도, 황제의 말을 대놓고 씹지는 못하는 듯 조용히 물러났다. 떠나면서 안심시켜주는 듯한 눈빛을 보내긴 했지만, 솔직히 하나도 도움이 안 됐다.
으으.. 긴장 돼!
***
황제 처소에 딸린 안뜰에는 아담한 티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황제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앉으려무나.”
“네.”
‘날 왜 보자고 하신 거지...? 어젯밤 일 때문인가?’
얼떨결에 마주 앉긴 했지만, 리엘은 긴장감에 침도 잘 삼켜지지 않았다. 무려 황제랑 한 테이블에 단둘이 마주 앉아 있었지만, 감격스럽기는커녕 부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것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찌되었건 정말 신분상승을 하긴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뒤에 얌전히 서 있는 시녀만 되어도 꽤 대단한 지위일 텐데, 이젠 함께 대화씩이나 나누는 입장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영광스러움 따위는 긴장감에 가려져 잘 느껴지지도 않았다. 너무 불편한 나머지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런데 정작 불러다 놓은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설마 연애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결혼은 안 된다. 그러니 아이를 가지지 않게 주의해라 뭐 이런 경고일까?’
불러만 놓고 말이 없으니 정말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었다. 리엘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녀들이 차를 내왔고, 찻잔을 집어 들며 황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흰 아직 어리다.”
“......네. 죄송합니다.”
‘역시... 어젯밤 일 때문이구나. 근데 그런 건 아들을 불러다 말해야지...’
무조건 사과부터 하는 그녀의 모습에 황제는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만, 그냥 습관이려니 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당부하는 말이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서, 혹은 너희끼리 해결하려 하지 말았으면 한다.”
‘무슨... 소리지? 애가 생기면 이실직고 하라는 뜻인가?’
“네. 알겠습니다.”
“너희는 모르겠지만, 아직은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야.”
황제는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원래 막 성년이 된 나이쯤에는, 스스로 다 컸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리고 철없었는지 뒤늦게 깨닫는 게 당연했다.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오히려 일을 망칠 수 있으니 꼭 유념해 두거라.”
“네, 폐하.”
다소곳이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잘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번 더 당부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 말을 꼭 떠올리길 바란다.”
“네.”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자, 완전히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
“..........”
리엘은 몰랐지만, 엔릴의 말대로 황제는 그녀와 함께하는 자리가 늘 불편했다. 눈치를 볼 필요 없다고 해서, 어색함도 불편함도 안 느끼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말해주어야 할 것 같았기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용건은 그게 전부다.”
“네.”
‘그럼 이제 가 봐야 하나? 뭐라고 하고 일어나지? 가보라는 말이 없는데 먼저 일어나도 되나?’
어색함만 하염없이 흘렀다. 리엘의 절규를 모르는지, 계속 기다려도 황제는 말이 없었다.
‘으아... 누구라도 좋으니 이 분위기 좀 어떻게 해 봐! 왜 가 보라는 소리도 안 하냐고!’
황제는 그저 차가 아직 남아있기에 마시고 있는 것뿐이었다. 티타임에 초대한 이상, 차를 다 마시기 전에는 자리를 뜨지 않는 게 상호간의 예의였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귀찮은 예법이었지만, ‘시녀’로서가 아닌 ‘아들의 여자친구‘로 대우해 주기 위해 바빠 죽겠는데도 나름 챙겨주고 있는 것이었다.
둘은 서로 어색함을 숨기며 말없이 차만 마셔댔다.
그때였다.
누구라도 등장해 주길 바라던 리엘의 바람대로, 정말 누군가가 나타났다.
“엘리어트으으으! 마이 레이디! 이 형님은 이만 떠나신... 헉...!
하필 기둥 바로 뒤인 리엘의 자리는, 입구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그렇기에 막 건들건들 들어오던 레이튼 후작이 그녀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한참 헛소리를 지껄이며 들어오던 후작은, 리엘을 발견하고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
순간 정적이 싸아... 흘렀다.
‘헉, 미쳤나봐. 폐하의 존함을 막 부르는 걸로도 모자라서... 지금 레이디라고 놀린 거야?’
황제의 이마에는 확연히 보일 정도로 혈관이 돋아 올라 있었다.
“폐,폐하. 그게.. 진짜 미안, 아니 정말 송구하옵니다.”
“...................”
“제가 정말 죽을죄를...”
“.............”
미친 듯이 민망한 이 상황에 셋 다 돌처럼 굳어버렸다. 특히 들어서는 안 될 걸 들어버린 리엘은 그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어떡해... 나 같아도 진짜 빡치겠다.’
“하아...”
예비며느리(?) 앞에서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인지... 친구사이니 사석에서야 원래 말을 놓고 지내긴 했지만, 왜 하필 지금...!!
“아니 그게...”
사실 황제는 이 안쪽 정원에 웬만하면 누군가를 들이지 않는 편이었다. 후작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없을 줄 알고 장난을 치며 들어와 버렸다.
시종이나 기사들이 미리 고해 주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평소 제 집처럼 들락거리던 그였기에 이번에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한 번만 더. 그렇게 부르면. 사형이라고. 했지!”
진짜 화난 듯, 분노를 최대한 꾸욱 꾸욱 눌러 참으며 황제가 말했다.
‘으아, 어떡해...’
그러고 보니 리엘은 황제가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저 어쩌고 후작도 참 능력자다 싶었다.
“소, 손님이 있는 줄 모르고... 기둥 뒤에 가려 안 보여서...”
후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자, 시선은 리엘에게 집중되었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전광석화와 같은 외침이었다. 아주 필사적이었다.
‘설마 쪽팔린 기억 지우겠다고 내 목을 슥삭하진 않겠지?’
“...............”
리엘은 어쩔 줄 몰라 양쪽의 눈치만 보다가 황제와 시선이 딱 마주쳐버렸다. 흠칫 고개를 숙이려던 그녀는, 마음을 바꿔 그냥 슬그머니 눈을 훔쳐보며 생각을 읽어보기로 했다.
‘설마 그러진 않겠지만, 적어도 날 죽여 입 막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알아야지...!!’